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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 거짓말 (66/72)

66. 거짓말

재혁이 눈을 뜨자마자 꺼낸 첫 마디가 ‘이나는?’이었다.

그는 이나의 상태부터 챙기고 자신의 상태에 대한 소견을 들었다.

뼈가 다칠 정도의 큰 충격이 있었지만, 다행히 뇌는 다치지 않았다고 했다.

천운이었다.

모든 말을 듣고 다시 이나를 찾았다.

재혁은 잠들어 있는 동안 그녀의 꿈을 꿨다.

그녀와 결혼하는 꿈이었다.

그 행복한 꿈에서 깨자, 이나를 보지 않고는 견딜 수 없을 것만 같았다.

재혁의 요청으로 이나와 같은 병실로 옮겼다.

그리고 이나가 눈을 뜰 때까지 기다리고 있었다.

“미안해요. 내가 오해했어요. 미안해요.”

마주 잡은 손 위로 이나의 눈물이 떨어졌다.

“내가 미안해. 나 때문에….”

“아니야.”

“트라우마가 올라왔어. 촬영장 도로가 마치 그날의 도로처럼 보였거든.”

“….”

“저번에 트라우마를 겪었을 때는 운전을 하지 않았는데, 왜 그랬을까? 곰곰이 생각해 봤어. 그랬더니 답은 하나더군. 이나, 너야. 사고가 날 아프게 한 게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이 날 떠난 사실에 대한 아픔이었던 거야. 그래서 네가 옆에서 자는 동안 생각했어. 너 없이는 이제 살 수 없을 거 같아.”

“재혁 씨.”

“지금 이런 모습으로 말해서 미안하지만, 이나야. 이제 내 것 하자. 1년 말고, 딱 100년만 같이 살다가 그때 싫다면 보내 줄게.”

“….”

“나랑 결혼해 줄래?”

꽃다발도 반지도 없이, 병실에서 받는 프러포즈였지만, 이나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재혁이 쓰러져 있는 동안, 이나 역시 뼈저리게 느낄 수 있었다.

그가 없이는 자신도 살 수 없을 것 같다는 것을 말이다.

이나의 눈에서 다시 한번 눈물이 차올랐다.

그것은 이전에 흘리던 눈물과는 다른, 감격과 감동 때문에 흐르는 눈물이었다.

“응.”

이나가 힘차게 고개를 끄덕이자 맺혀 있던 눈물이 주룩 양 볼을 타고 흘렀다.

“고마워.”

병실 안에는 사랑이 가득 차 포근한 기분이 들었다.

그때, 문 앞에서 무언가 떨어지는 소리가 나더니 열린 문틈으로 사과 하나가 굴러 들어왔다.

“누구세요?”

이나의 외침에도 아무런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이나 역시 거동이 불편한 상태여서 누가 왔었는지 나가 보지 못했다.

복도에는 커다란 과일 바구니가 떨어져 있었고, 그 맞은편으로 유리가 병실로부터 멀어지고 있었다.

***

결국, 유리가 김 작가에게 사과하는 것으로 김 작가의 하차 소동은 마무리되었다.

물론 이나와 재혁은 건강 문제로 해당 회차로 하차했다.

드라마는 최고 시청률 8%라는 준수한 성적으로 마무리되었고, 썬라이즈 개장 행사는 재혁과 강 회장이 없는 채로 치러졌다.

재혁을 대신해 유리가, 강 회장을 대신해 부회장인 정수가 리본 커팅식을 했다.

지역 신문 1면에 실린 커팅식 사진 속 유리는 어쩐지 씁쓸한 표정이었다.

강 회장이 개장 행사에 등장하지 않은 것을 두고, 언론은 강정수 부회장으로의 권력 승계가 이루어진 것이 아니냐고 추측했지만, 알려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리고 며칠 뒤, 충격적인 사실이 한 언론사를 통해 흘러나왔다.

이번 드라마의 최대 수혜자라고 여겨지는 재혁과 이나의 연애설이 터진 것이다.

두 사람의 알콩달콩한 병원 생활이 파파라치들에 의해 알려졌고, 자연스레 찬의 존재 역시 들통났다.

찬의 존재가 자극이 되어, 세상은 새로운 신데렐라 이야기에 열광했다.

세상의 약자인 미혼모 이나가, 대기업 계약직으로 시작해서 인기 배우가 되기까지의 스토리가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렸고, 재벌 3세와의 화려한 연애는 신데렐라 스토리의 하이라이트가 되어 왜곡되기도 하고 부풀려지기도 하면서 사람들의 환상을 자극했다.

이나는 그런 언론의 관심을 애써 모른 척했다.

일상생활을 해야 하는 엄마와 찬에게는 미안했지만, 지금은 재혁과의 행복을 깨고 싶지 않았다.

두 사람은 병원 속 자신들만의 공간에 머물며 행복한 한때를 보내고 있었다.

“손이 안 올라가는군. 밥 좀 먹여 줘.”

찌릿-

이나의 날카로운 눈총을 받으면서도 재혁은 태연하게 말했다.

“이러다 영원히 손 못 쓰면 이나 손해 아닌가?”

“거짓말하지 말아요. 아까 옷 갈아입어 놓고.”

“진짜야. 옆으로는 움직이는데 위로는 안 움직여. 환자를 그렇게 몰아붙일 수 있지?”

“….”

프러포즈 이후, 재혁은 평소와 180도 달라졌다.

평소의 무뚝뚝한 모습은 온데간데없었고, 애교가 넘쳐흘러 부담스러울 정도였다.

이건 엄마가 된 건지 애인이 된 건지 가끔 헷갈릴 때도 있었지만, 재혁의 새로운 모습이 이나는 나쁘지 않았다.

그녀는 못 이기는 척 재혁의 침대 옆에 앉아 밥을 한 숟가락 떠서 그의 입에 넣어 주었다.

밥을 먹여 주는 것이 어색한 탓일까? 밥풀 한 알이 재혁의 입가에 달라붙었다.

이나가 손을 뻗어 밥풀을 떼 주려는데, 못 움직이겠다던 재혁의 팔이 그녀의 허리를 쑥- 감았다.

이나가 깜짝 놀라 뭐 하냐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자, 재혁이 장난스럽게 웃었다.

“뭐 해요? 안 움직인다며!”

“그랬는데 갑자기 움직여.”

“놔요. 혼자 먹어, 이제.”

“싫어. 그러게, 뽀뽀 좀 해 달라고 할 때 해 주지, 왜 사람을 거짓말하게 만드나?”

“병실에서 무슨 뽀뽀를 해요?!”

“병원은 치료하는 곳 아니야? 이나 뽀뽀는 내 치료제니까 병원에서 처방받지 않으면 어디서 처방받아야 하지?”

오글거리는 재혁의 말에 이나는 말문이 막혀 버렸다.

대체 이런 말은 대체 어디서 배워 오는 걸까?

허리 뒤로 자신을 잡아당기는 재혁의 강렬한 손길이 느껴졌다.

재혁의 몸 상태가 많이 회복되었다는 방증이기도 했다.

“오랜만이네, 네 입술.”

사고 이후 처음으로 두 사람의 입술이 겹쳐졌다.

아직 아물지 않은 입술의 상처가 따갑게 느껴졌지만, 그것조차 행복한 기분이었다.

그녀의 행복이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마음속 애써 모른 척하던 불안이 슬며시 고개를 들었다.

찬이가 재혁의 아들이 아니라면 어쩌지? 하는 불안이었다.

그런 생각이 날 때마다 이나는 불안한 마음을 애써 내리눌렀다.

찬이가 누구의 아들인지는 상관없다. 설령 영인의 아들이라 할지라도 재혁을 사랑하는 마음에는 변함이 없을 거라고, 재혁 역시 자신을 향한 사랑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을 거라고 되뇌고 또 되뇌었다.

***

“할아버지는 어떠신지 연락 받은거 있어?”

“아직 회복하고 계시는가 봐요. 연락을 해 봐도 괜찮다고만 하고 별다른 말은 없네요.”

“….”

그 후로 다시 일주일이 지났다.

이나는 사고 후유증에서 벗어났고, 재혁은 혼자 운신이 가능할 정도로 회복되었다.

사고가 난 지 벌써 2주가 지난 시점. 재혁의 수술 날 이후, 강 회장은 한 번도 재혁의 병원을 방문하지 않았다.

평소 재혁을 끔찍이 아끼던 강 회장의 성격상 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이 분명해 보였지만, 비서는 몸이 힘드셔서 그런 것뿐이라며 말을 아끼고 있었다.

무슨 일이 있는 걸까? 재혁은 퇴원을 하는 대로 서울로 올라가 봐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저, 오늘은 회사에 들어가 봐야 할 거 같아요.”

“그래. 너무 오래 자리를 비우긴 했지. 대신 갔다가 빨리 와.”

“그래요. 알겠어요.”

이나가 병원 밖으로 나타나자, 기다리고 있던 기자들이 몰려들었다.

아직도 식지 않은 취재 열기에 놀란 이나는 서둘러 차에 올라탔다.

호텔로 향하는 길, 이나는 비서실에 지시할 일들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이제 행복한 병원 생활을 끝내고 일상으로 복귀해야 하는 때가 다가오고 있었다.

때마침 울린 전화에, 이나는 무심코 전화기를 들었다.

영인에게 온 문자였다.

잊고 있던 영인에게서 연락이 오자, 그녀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녀는 휴대 전화를 열어 문자를 확인했다.

[할 말이 있어. 좀 봤으면 좋겠어.]

이나가 뭐라고 답장할까 생각하고 있을 때, 영인에게 다시 문자가 왔다.

[급한 일이야. 꼭 봐야 해.]

문자를 바라보며 한참을 고민한 이나는 영인과 만나기로 했다.

어차피 한 번은 만나서 관계를 정리 할 필요가 있었다.

[장소랑 시간 보내.]

이나는 영인이 말한 해운대의 한 카페로 향했다.

썬라이즈에서 멀지 않은 곳이어서 호텔 앞에서 내려 약속 장소까지 걸어갔다.

약속 장소에 도착하니, 바다가 보이는 창가에 영인이 앉아 있었다.

어쩐지 심각해 보이는 그의 표정을 보고 있으니, 처음 그가 이별을 고했던 때가 떠올랐다.

이나는 영인이 어떤 말을 해도 흔들리지 않을 생각이었다.

단호한 태도로 그와의 남은 관계를 끊어 내야겠다고 생각하며 영인에게 다가왔다.

“어? 왔어?”

멀리서 이나를 발견한 영인이 반가운 듯 손을 들었지만, 이나는 모른 척하고 그의 앞에 앉았다.

“무슨 일이야?”

이나가 다짜고짜 본론을 꺼냈다.

영인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에게 물었다.

“몸은 좀 어때?”

“괜찮아. 바쁘니까 본론만 말하고 가자. 내가 먼저 말할게. 이제 드라마도 끝났고, 앞으로 마주치지 않았으면 해.”

영인은 아무 말 없이 이나의 말을 들었다.

“연락도 하지 않았으면 좋겠고, 혹여 일하다가 만나더라도 그냥 같이 일했던 동료 정도로 보면 좋겠어.”

“왜?”

영인이 불쑥 물었다.

이나는 단호한 태도로 대답했다.

“그 이상 만날 필요가 없으니까. 나, 강재혁 대표랑 결혼해.”

“결혼. 그렇구나.”

어쩐 일인지 영인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난 할 말 다 했어. 더 할 말 없으면 그만 일어날게.”

이나가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그러자 영인이 그녀를 잡았다.

“잠깐. 앉아 봐.”

이나가 자리에 앉자 영인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더니 가방에서 서류 봉투를 꺼내 이나에게 내밀었다.

이게 뭐냐는 이나의 눈빛에, 영인은 확인해 보라며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이나는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은 채 서류를 열어 보았다.

뻥긋 열린 서류 위로 유전자 검사 결과지라는 글씨가 보였다.

“?!”

이나가 놀란 눈으로 영인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그는 조금은 슬픈 눈빛을 하고 이나를 바라보았다.

마치 자신도 어쩔 수 없이 이런다는 듯한 눈빛이었다.

“6년 전 나 찾아왔을 때, 아이 가졌다고 했었지?”

“그…. 그건.”

이나가 말을 더듬자, 영인이 송곳같이 질문을 던졌다.

“그 아이, 안 지웠지?”

그 질문에 이나는 마음이 덜컥 내려앉았다.

“확인해 봐.”

영인이 말했다.

이나는 침을 크게 한 번 삼키고 두려운 눈빛으로 서류를 내려다보았다.

그 안에 든 것을 확인하면 판도라의 상자처럼 이나의 모든 것을 파괴할 것만 같았다.

“빨리.”

영인의 재촉에 이나는 안에 들어 있는 서류를 꺼내 보았다.

서류에는 찬이가 영인의 아들일 확률이 99.99%라고 적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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