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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 고마워요. 일어나줘서. (65/72)

65. 고마워요. 일어나줘서.

재혁의 사고 소식을 들은 강 회장은 한달음에 부산으로 내려갔다.

자동차 사고였다는 말에 그는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아들로 모자라 손자까지 자동차 사고로 잃을 수 있다는 생각에 하늘이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그는 병원에 도착하자마자 재혁의 병실로 달려갔다.

재혁은 인공호흡기에 의지한 채로 정신을 잃고 누워 있었다. 

그 모습을 보니 다시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가까이 다가가 물끄러미 바라보던 강 회장이 다리에 힘이 풀려 넘어지려 하자, 옆에 있던 비서가 그를 부축했다.

하늘도 무심하시지, 어떻게 이런 일이….

그는 비서의 부축을 받으며 말했다.

“병원장 오라고 해.”

강 회장이 말한 지 10분이 채 지나지 않아 병원장이 헐레벌떡 달려왔다.

“회장님 오셨습니까.”

“상태는?”

병원장 뒤에 서 있던 담당 의사가 죄스럽다는 듯 말했다.

“그게, 아무것도 장담할 수 없는 상태입니다.”

“심각한가?”

“두개골 출혈이 심합니다. 뇌에 손상이 없다면 단순 타박상이지만….”

줄어드는 그의 끝말이 의미하는 바가 너무나 명확해, 강 회장은 충격으로 다시 휘청거렸다.

“회장님!”

놀란 비서와 의사들이 강 회장을 부축했다.

강 회장의 입에서 깊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무슨 짓을 해도 좋으니 살려만 주게.”

“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의사들이 나가고, 강 회장은 밤새 재혁의 옆을 지켰다.

열 손가락 깨물어 아프지 않은 손가락이 어디 있겠냐마는, 둘째보다 첫째를 더 사랑하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은 거짓말이었다.

첫째가 세상을 등지고, 재혁을 아들로 여기며 살아왔다.

재혁은 그런 할아버지의 기대에 부응하기라도 하듯 아들을 쏙 빼닮은 청년으로 자라났다.

재혁을 볼 때마다 죽은 아들을 생각했고, 마음속에 아들을 묻을 수 있었다.

그런데 이게 웬 날벼락이란 말인가.

아들을 보낸 것과 같은 이유로 재혁마저 그의 곁을 떠난다면 더 이상 버틸 수 없을 것 같았다.

이루 말할 수 없는 비통함에 마음이 찢어질 듯이 아팠다.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절대 드라마를 시키지 않았을 것이다.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이나와 만나는 것도 반대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이제는 후회해 봤자 돌이킬 수 없는 일들만 남아 있었다.

그렇게 후회와 자책 속에서 시간이 흘렀다.

밖에 나가 있던 비서가 병실에 들어와 보니, 강 회장은 망부석이라도 된 듯 나갔을 때의 그 자세로 조금도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그냥 두고만 볼 수 없었던 비서가 강 회장에게 다가가 말했다.

“회장님, 조금 쉬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괜찮아.”

“너무 무리하고 계십니다.”

“손주가 죽어 가는데 내가 편히 있을 수 있겠나. 괜찮으니까 그냥 둬.”

“그럼 잠깐 일어나서 화장실이라도 갔다 오시죠. 제가 앉아 있겠습니다.”

간곡한 비서의 말에 더 이상 고집을 부리고 있을 수는 없었다.

강 회장은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래, 그럼 잠깐 갔다 오지.”

“네.”

비서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강 회장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강 회장은 복도를 걸어 화장실 쪽으로 향했다.

어두운 복도, 문틈으로 휴게실의 불빛이 새어 나왔다.

강 회장이 그 앞을 지나가는데, 찬의 목소리가 들렸다.

“슝~ 슝~”

며칠 전 들었던 아이의 목소리에, 강 회장은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안을 들여다보았다.

그의 예상대로 찬이 자신이 준 장난감을 가지고 놀고 있었다.

강 회장은 문가에 서서 아이가 노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인기척을 느낀 찬이 강 회장을 발견하고는 소리쳤다.

“어? 산타 할아버지다!”

“여기서 혼자 뭐 하니?”

“심심해서 놀고 있어요.”

“이 시간에?”

“네! 엄마랑 할머니랑 자요. 엄마는 아까부터 오~래 자요.”

“오래 잔다고?”

“네. 할머니가 엄마 피곤하시니까 깨우면 안 된다고 했어요.”

부산으로 내려오는 길에 이나 역시 같은 병원에 입원했다는 보고를 들은 것이 생각났다.

“그랬구나. 찬이는 안 졸리니?”

“아까 많이 자서 지금은 안 졸려요. 할아버지는요?”

“나는 네 아빠…. 아니, 할아버지 손자가 아파서 왔어.”

“할아버지 손자는 나보다 커요?”

“그래. 많이 크지.”

“큰 사람은 안 아픈데.”

“그래, 큰 사람은 안 아파서 할아버지 손자도 금방 일어날 거란다.”

“네! 그런데 할아버지 나랑 놀래요?”

“응?”

“옥토넛 가지고 나랑 놀아요.”

찬이가 강 회장의 손에 장난감을 쥐여 주며 옷소매를 잡아당겼다.

잠시 고민하던 강 회장은 재혁의 병실을 한번 바라보고는 모른 척 찬의 옆에 앉았다.

“그래, 이 할애비랑 놀자꾸나.”

“와! 신난다! 자 할아버지는 저쪽에서 오는 거예요! 찬이가 로켓 발사할게요.”

“허허허. 그래그래.”

강 회장은 재혁의 어린 시절을 추억하며 찬과 즐거운 한때를 보냈다.

***

“괜찮을 게다.”

“회장님.”

이나의 말을 들은 엄마는 급하게 인사했다.

“회장님? 안녕하세요.”

“허허. 처음 뵙겠습니다. 사부인.”

“사부인이요?”

“손주 놈하고 여기 이나 양하고 만나고 있다니, 사부인이시지요.”

갑작스러운 강 회장의 태도에 이나는 어안이 벙벙했다.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이나에게 헤어질 것을 종용하던 강 회장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사부인이라니.

이나가 놀라는 사이, 강 회장이 이나에게 말했다.

“나랑 얘기 좀 하겠나?”

이나는 고개를 끄덕인 후 휠체어를 밀고 있는 엄마의 손을 잡았다.

엄마는 이나의 말을 알아듣고 자리를 비켜 주었다.

어두운 수술실 앞 복도에 이나와 강 회장만 남았다.

강 회장은 서 있는 것이 힘겨운지, 이나의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나이가 드니까 이렇게 서 있는 것도 일이야. 자네도 많이 다쳤다던데? 몸은 어때?”

“대표님 덕분에 조금밖에 안 다쳤습니다.”

“다행이구먼. 다행이야.”

이나가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으로 강 회장에게 사과했다.

“대표님 일은 죄송합니다. 제가 잘 보좌했어야….”

“자네가 죄송할 게 뭐 있나. 억지로 드라마를 시킨 내 잘못이지. 인생이 말이야. 참, 뜻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어. 내가 제일 먼저 팔았던 게 뭔지 아나?”

“아니요. 듣지 못했습니다.”

“똥이야. 똥. 먹고살 게 없어도 사람이 똥은 싸지 않나. 그걸 가지고 말려서 비료로 내다 팔았지. 사람들한테는 소똥이라고 속이고서 말이야. 그러다 소똥이 아니라 사람 똥이라는 걸 들켜서 죽도록 얻어맞았어. 얼마나 얻어맞았던지, 이후 며칠 동안 사경을 헤맸지, 나는 내가 그때 죽는 줄 알았어. 하지만 살더군. 그런데 멀쩡하던 아들이 먼저 죽었어. 이런 나도 살았는데…. 그리고 이제는 손주가 죽을지도 모른다는구먼. 허허.”

“….”

“사람 욕심이란 거, 참 우스워. 재혁이가 건강할 때는 자네가 절대 안 될 것 같았는데, 이렇게 아프고 나니 그깟 게 뭐가 중요했는가 싶구먼.”

“회장님.”

“그때 상처를 받았다면 내가 미안허이. 늙은이의 노욕이라 너그럽게 이해해 주게.”

“그 말씀은….”

“그래, 앞으로 우리 재혁이 잘 부탁함세.”

“!!”

울컥하는 감정에 이나는 목이 멨다.

강 회장은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진작 이렇게 말해 주지 못해 미안하네.”

“아니에요….”

“강한 아이야. 잘 이겨 내고 일어날 거니 너무 걱정하지 말게.”

“네….”

“그리고, 내가 자네에게 말할 게 하나 있는…. 으….”

말을 하던 강 회장은 갑자기 심장을 부여잡으며 허리를 숙였다.

“회장님!”

놀란 이나는 급하게 몸을 일으키다가 휠체어에서 넘어졌다.

와당탕 소리가 나자, 엄마와 비서가 동시에 달려왔다.

“회장님!”

“이나야!”

비서는 강 회장에게, 엄마는 이나에게 달려왔다.

“이나야, 괜찮아?”

“어…. 괜찮아.”

이나는 고개를 들어 강 회장의 상태를 살폈다.

그는 비서가 건넨 약을 먹고 숨을 고르고 있었다.

약을 먹고 진정이 됐는지, 강 회장이 비서에게 손짓하며 안심시키려는 듯 멋쩍게 웃었다.

“어제 좀 무리했나 보군. 좀 쉬면 괜찮아질 테니 너무 염려 말아.”

강 회장은 비서의 부축을 받아 자리에 앉았다.

이나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심장 마비로 쓰러진 지 얼마 되지 않은 데다가 재혁의 사고로 신경을 많이 썼을 터.

강 회장 역시 아무렇지 않을 리가 없었다.

“정말 괜찮아. 정말이야.”

강 회장이 다시 한번 이나를 안심시켰다.

“네. 회장님.”

이나는 대답하며 다시 한번 수술실의 불빛을 바라보았다.

할아버지를 위해서라도 재혁이 무사히 나오기를 바라면서….

***

수술은 두 시간 만에 끝났다.

수술을 마치고 나오는 담당 의사의 얼굴에는 피곤이 잔뜩 묻어 있었다.

이나가 그에게 다가가 재혁의 상태를 묻자, 의사는 다행이라며 그녀에게 말했다.

“뇌 손상이 경미해서 상처만 아물면 될 것 같습니다.”

의사의 말을 듣고서야 이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강 회장은 몸이 계속 안 좋아져 한 시간 전쯤 병원을 떠난 상태였다.

이나는 그의 비서에게 재혁의 상태를 말해 주었다.

[수술 잘 됐어요. 마취가 풀리면 일어날 수 있다고 하네요. 회장님은 어떠세요?]

[다행이네요. 감사합니다. 회장님은 좋아지셨습니다.]

가벼운 답장이 돌아왔다.

이나 역시 더 이상 답장하지 않았다.

수술이 끝나자 온몸에 긴장이 확 풀려 버렸다.

성치 않은 몸으로 계속 움직이는 바람에 피로가 몰려왔다.

재혁이 수술실에서 나오는 모습을 끝으로, 그녀는 정신을 잃고 잠에 빠졌다.

***

쏟아지는 아침 햇살이 이나의 감은 눈꺼풀 위로 떨어졌다.

깊이 잠든 듯, 세상 모르게 잠들어 있던 이나가 움찔하며 몸을 뒤척이자 옆에서 누군가 귀엽다는 듯 웃었다.

“귀엽네.”

그리운 목소리에 이나의 눈이 떠졌다.

놀란 마음에 몸을 휙 돌리던 그녀는 느껴지는 통증에 앓는 소리를 냈다.

“아….”

“나보다 늦게 일어나면 어떡하나? 잠꾸러기.”

목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 같았다.

이나가 천천히 고개를 돌려 옆 침대를 바라보았다.

아직도 코에 인공호흡기를 끼고 있는 재혁이 눈만 살짝 돌려 이나를 바라보았다.

“잘 잤어?”

재혁의 말과 함께 참았던 눈물이 쏟아졌다.

“왜 울어. 울지 마. 지금은 눈물을 닦아줄 수도 없단 말이야.”

“괜찮아요?”

“글쎄. 조금 아픈 거 같네.”

이나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재혁은 힘겹게 고개를 돌려 자신에게 다가오는 이나를 바라보았다.

“다행이야…. 정말 다행이야….”

다가온 이나가 재혁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너는 다친 데 없어?”

“난 괜찮아요.”

“다행이네. 긴 꿈을 꾼 거 같아.”

“깨어나서 다행이에요.”

“깨고 싶지 않은 꿈이었어. 꿈에서는 너를 실컷 봤거든.”

“나 여기 있잖아요. 실컷 봐요.”

“그래도 보고 싶었어. 이나야.”

“나두요. 나두 정말 보고 싶었어. 고마워요. 일어나 줘서.”

이나의 눈에 맺혀 있던 눈물 한 방울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재혁이 말했다.

“나랑 결혼해 줄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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