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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 허락 (64/72)

64. 허락

“엄마 잘 잤어?”

갑자기 찬이가 여기는 왜? 라는 의문이 드는 순간, 아까의 기억이 떠올랐다.

비틀거리며 달리는 자동차와 광기에 사로잡힌 재혁의 모습.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그때의 공포가 되살아났다.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야.”

엄마의 목소리에 이나 역시 안도했다. 살았구나.

“나 괜찮아.”

“아이고, 하나님, 부처님, 신령님 감사합니다.”

이나는 찬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찬아. 엄마 잘 잤어. 찬이도 잘 잤어??”

“웅! 찬이도 잘 잤어.”

“우리 찬이 착하네.”

“엄마. 그런데 병원에는 왜 와 있어?”

“응. 엄마가 좀 힘들어서 누워 있으려고 왔어.”

“그럼 엄마 더 코 자야겠다!”

찬을 안으려 손을 뻗자, 온몸에 통증이 일었다.

“으….”

이나가 신음을 내뱉으며 몸을 돌리자, 엄마가 그녀를 나무라며 말했다.

“움직이지 마. 아직 무리하면 안 돼.”

“엄마, 나 얼마나 누워 있었어?”

“꼬박 하루 누워 있었어.”

“그랬구나…. 재혁 씨는?”

“글쎄, 나는 네 옆에 딱 붙어 있느라 들은 게 없어. 에휴, 이게 뭔 일이니 대체?”

“….”

“잠깐 있어 봐. 의사 선생님 올 거니까.”

“응.”

이나는 다시 눈을 감았다.

감은 두 눈 위로, 사고 당시 재혁의 광기 어린 모습들이 지나가고 있었다.

‘닥쳐! 닥치라고!’

대체 왜 그랬던 걸까?

일부러 사고를 낸 걸까? 아니면 실수?

그에 대한 의문들과 걱정으로 머릿속이 복잡할 때, 문이 열리며 의사가 안으로 들어왔다.

“정이나 씨. 일어나셨네요.”

“네.”

“어디 봅시다.”

그는 이나의 눈 상태를 유심히 살피더니 물었다.

“뇌 쪽은 괜찮아 보이네요. 어디 더 아픈 데는요?”

이나는 손가락만 까딱해도 온몸이 아픈 지경이라 어디가 아프다고 해야 할지 몰라 아무렇게나 대답했다.

“여기저기….”

“그래요. 다행히 가벼운 타박상 외에는 심각하게 다친 데는 없네요. 뼈도 다 무사하고, 내일 정밀 검사 받아 보고 다시 얘기해 봅시다.”

“네. 감사합니다.”

의사가 나가는데, 이나가 그를 불렀다.

“저, 선생님.”

“네.”

“혹시 강재혁 씨 상태는 어떤가요?”

그녀의 물음에 돌아온 대답은 충격적이었다.

“머리를 많이 다쳤어요. 내일 정밀 검사 후에 바로 수술 들어갈 겁니다.”

“네? 얼마나 다쳤길래.”

“글쎄요. 정확한 검사를 해 봐야 알겠지만, 쉬운 수술은 아닐 겁니다. 뇌가 다치지 않았기를 바라야죠.”

“….”

“충격이 강재혁 씨 쪽으로 집중됐어요. 그 때문에 정이나 씨 쪽에 충격이 덜하기도 했고. 경찰 얘기를 들어 보니까, 차량이 마지막 순간에 방향을 바꿔서 운전자가 더 다쳤다고 하더군요.”

“….”

“아무튼, 검사가 나와 봐야 정확히 아는 거니까 정이나 씨는 최대한 안정을 취하고 계세요. 그럼.”

의사는 바쁘다는 듯 방을 나갔다.

이나는 충격에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그녀의 커다란 눈망울에 눈물이 차올라 주륵 흘렀다.

“왜….”

그 모습을 본 엄마가 이나를 위로했다.

“괜찮을 거야. 너무 걱정하지 마.”

“대체…. 왜 그런 거야….”

***

이나는 밤잠을 이루지 못하고 재혁에 대해 생각했다.

사고가 나기 직전, 그는 이미 정상이 아닌 상태였다.

이나는 재혁이 거품을 물고 쓰러졌던 때가 떠올랐다.

재혁은 그것이 부모님의 사고 이후 생긴 병이라고 했다.

“….”

이나는 재혁의 광기 어린 모습과 그날 쓰러진 재혁의 모습을 겹쳐 보았다.

문득 재혁의 이상 행동이 이해가 되었다.

교통사고를 찍는 장면.

아무리 연기라지만, 그의 트라우마를 건드릴 수 있는 일이었다.

‘트라우마 때문이었어….’

그런 생각이 들자, 모든 것이 자신 때문에 생긴 일처럼 느껴졌다.

그녀는 배우이기 이전에 재혁의 비서였다.

더군다나 재혁의 트라우마를 알고 있던 사람 역시 그녀밖에 없었다.

재혁은 이나의 마지막 장면이라는 생각에 촬영을 거부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를 말렸어야 했다.

하지만 자신은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문이 열리며 박 감독과 조감독 그리고 영인이 들어왔다.

“이나 씨. 몸은 좀 어때?”

박 감독은 들고 온 과일 바구니를 내려놓으며 물었다.

“어머니?”

“네.”

“누구?”

찬을 향해 묻자, 이나가 대답했다.

“아들이요.”

“아…. 아들이 있었어?”

“네.”

이나는 씁쓸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랬…. 그래. 아무튼, 몸은 좀 어때?”

그는 횡설수설하다가 급하게 말을 돌렸다.

“괜찮아요.”

“이나야. 괜찮아?”

영인이 앞으로 나섰다.

옆에 서 있던 박 감독이 영인을 칭찬하며 나섰다.

“영인 씨가 이나 씨 구했어. 불길 치솟는데 무작정 뛰어들더라고, 완전 다시 봤잖아.”

괜찮냐는 듯한 그의 눈빛이, 이나에게는 무언가 요구하는 것처럼 느껴져 부담스러웠다.

“고마워요.”

“정말 큰일 날 뻔했어, 이나야.”

영인이 이나 옆에 앉으려 하자, 이나가 다급하게 박 감독에게 물었다.

“촬영은 어떻게 됐어요?”

박 감독이 대답을 하며 앞으로 나오는 바람에 영인은 이나 옆에 앉지 못했다.

박 감독은 곤란한 표정으로 이나의 질문에 대답했다.

“아. 그게…. 영상은 건지긴 했는데….”

“무슨 문제 있어요?”

“김 작가가 더 이상 안 쓰겠대.”

“네?”

“알고 보니까 압박을 많이 받았다고 하더라고. 어후, 정말.”

“대표…님인가요?”

이나가 조심스레 묻자 박 감독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강 대표는 한 번도 연락한 적이 없고.”

“그럼 누가?”

“최유리 부대표.”

“최…유리 부대표님이요?”

“응. 저번에 키스 장면도 그렇고, 이번 장면도 그렇고 다 최유리 부대표가 압력을 넣은 모양이야. 김 작가가 마음고생이 많았나 봐. 이번에 자기가 바꾼 장면에서 사고가 나니까 견딜 수 없었던 모양이야. 그래서 지금 난리가 났어.”

“….”

다시 한번 재혁에 대한 오해가 벗겨졌다.

단순히 엄마의 남자 친구를 도와줬다는 이유로, 재혁에 대해 너무 많은 오해를 하고 있었다.

그에게 너무 쌀쌀맞게 굴었던 자신이 후회되었다.

이나의 눈에 눈물이 차올랐다.

때는 이때다. 영인이 그녀에게 다가가려는데 이나가 말했다.

“감독님, 저 몸이 너무 안 좋네요.”

“그래. 무리하면 안 되지, 깨어났나 확인차 와 본 거야. 우리 갈게. 쉬어.”

“저는 여기에.”

영인이 남겠다는 말을 하려 할 때, 이나가 말했다.

“엄마, 두 분 배웅 좀 해 주세요.”

그녀는 말을 하고는 바로 돌아누웠다.

나가라는데 억지로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어서, 영인은 아쉬움을 삼키며 그녀에게 인사했다.

“갈게. 몸조리 잘해.”

이나는 영인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

병원을 나가며 영인은 기분이 좋지 않았다.

이나를 목숨 걸고 구한 것은 자신이었다.

환대까지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감사하는 마음은 표현할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나에게서 돌아온 것은 차가운 냉대였다.

엄마는 찬과 함께 병원 문 앞까지 두 사람을 배웅했다.

이나는 정신이 없어서 엄마가 찬을 데리고 나가는 것을 그냥 두었다. 이곳에 영인이 있었는데도 말이다.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엄마가 인사하자, 박 감독이 마주 고개 숙였다.

“고생 많으시겠네요.”

“아니요. 괜찮습니다. 먼 길 오셨는데, 살펴 가세요.”

인사를 한 후 박 감독의 시선이 찬에게 향했다.

묻고 싶은 게 많은 표정이었지만, 그는 목 언저리까지 올라온 질문을 끝내 삼켰다.

여배우에게 사생아가 있다는 것은 치명적인 일.

이나가 아이를 숨기려는지 아닌지도 확실하지 않은 상황에 무언가를 물어보기가 어려웠다.

“그럼.”

하고 돌아서는데, 찬이가 큰 소리로 인사했다.

“방문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꼭, 놀이동산 안내원 같은 하이톤의 목소리였다.

인사를 받은 박 감독은 씨익 웃으며 찬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래~ 고맙다. 엄마 잘 보살펴 드리고.”

“네!”

그 순간 영인의 머릿속에 어떤 생각이 스쳐 갔다.

그는 찬에게 다가가 물었다.

“이름이 뭐야?”

“찬이요! 정찬.”

“찬이구나. 몇 살?”

“여섯 살입니다!”

여섯 살….

공교롭게도 아이의 나이는 이나와 헤어지던 시점과 맞물려 있었다.

다시금 그날 새벽에 찾아왔던 이나의 말이 떠올랐다.

‘아이 가졌어….’

영인은 짧은 순간 생각을 굳히고 찬에게 다가갔다.

“아저씨는 엄마 친구야. 아저씨가 찬이 한번 안아 봐도 될까?”

“네!”

영인은 무릎을 굽혀 한 손으로는 찬이를 안고, 다른 한 손은 찬의 뒤통수를 감쌌다.

“찬아, 엄마 잘 지켜 줘야 한다?”

“네!”

찬의 뒤통수를 토닥이던 영인은 일어나며 찬의 머리카락 몇 가닥을 잡아당겼다.

“아야!”

찬이가 뒤통수를 만지며 소리치자 이나의 엄마가 찬에게 물었다.

“찬이, 왜?”

“할머니, 나 따가워.”

영인은 머리카락을 뽑은 손을 재빠르게 주머니에 넣었다. 그리고 이나의 엄마에게 인사하며 뒤돌아 병원을 나갔다.

“실례 많았습니다.”

어리둥절하게 영인을 보던 박 감독이 그의 뒤를 따라 나갔다.

이나의 엄마는 얼떨결에 인사를 받고 찬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

재혁의 수술 시간이 다가왔다.

이나는 움직이면 안 된다는 의사의 말에도 불구하고 수술실로 가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결국, 누구도 이나의 고집을 꺾을 수 없었다.

그녀가 휠체어를 타고 재혁의 수술실 앞에 도착했을 때, 재혁이 누워 있는 병상이 복도로 들어오고 있었다.

인공호흡기를 입에 단 채 누워 있는 재혁의 모습을 보니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재혁 씨.”

이나는 두 손으로 입을 막고 재혁에게 다가갔다.

그녀가 다가오자, 병상을 옮기던 간호조무사들이 자리에 멈춰 섰다.

이나는 손을 뻗어 재혁의 손을 잡았다.

생기가 빠져나간 손은 너무나도 차가웠다.

“인사하셨으면 비켜 주세요.”

간호조무사의 말이 야속했지만, 수술 시간을 더 이상 지체시킬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재혁 씨, 꼭 일어나요. ‘꼭’이야.”

목소리가 닿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으로 이나가 말했다.

재혁의 병상은 야속하게도 그녀에게서 빠르게 멀어졌다.

멀어지는 병상을 보며, 이나는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했다.

‘하나님, 제발 깨어나게만 해 주세요. 그럼 무슨 일이든 다 할게요.’

수술실의 문이 굳게 닫히고, 수술 중이라는 빨간 글씨에 불이 들어왔다.

그때, 누군가 이나에게 다가왔다.

“괜찮을 게야.”

목소리를 들은 이나는 놀란 마음에 소리가 난 곳을 돌아보았다.

그곳에는 강 회장이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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