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3. 재혁의 상처 (63/72)

63. 재혁의 상처

결국, 촬영은 바뀐 대본으로 진행되었다.

차량 준비와 장소를 섭외하는 데 며칠이 소요되었고, 그사이 재혁과 이나는 계속 냉전 상태였다.

두 사람의 냉전이 길어지자 비서실 사람들은 일분일초가 가시방석 같았다.

더군다나, 미루어진 촬영 때문에 두 사람은 계속 사무실에 앉아 있었기에 상황은 더욱 심했다.

물속에 잠긴 듯한 답답함 속에서 며칠이 지나고, 드디어 촬영 날이 다가왔다.

재혁과 이나는 같은 차를 타고 촬영장으로 향했다.

이번 촬영 장소는 태종대를 올라가는 해안 도로였다.

요 며칠은 출퇴근도 따로 하고 있어서, 촬영장으로 향하는 차 안은 어색하기만 했다.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기 전에도 느끼지 못했던 어색함이었다.

같은 자리에 있지만 떨어져 있는 고립감이 재혁의 마음을 답답하게 했다.

결국, 참지 못한 재혁이 입을 열었다.

“언제까지 이럴 거지?”

재혁은 이나가 오해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그의 말이, 이나에게는 화 풀라는 강요로 느껴졌다.

이나가 말이 없자 재혁의 미간이 좁아졌다.

“아예 말도 안 할 생각인가.”

“네.”

“….”

차마 이런 대답은 예상하지 못해서 재혁은 충격을 받았다.

잠깐 멍한 표정으로 있다가, 이내 화가 치밀었다.

그는 대꾸 없이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다가 치미는 화를 참지 못하고 이나의 태도를 비꼬았다.

“정말 대단한 자존심이야.”

이나가 재혁을 째려보았다.

“저한테 한 말이에요?”

“그럼, 여기 이나 말고 누가 더 있나?”

“사람이 왜 그래요?”

이나가 쏘아붙이자 재혁은 더 말하기 싫다는 뜻으로 어깨를 으쓱하고 고개를 돌렸다.

그 모습을 본 이나 역시 반대로 고개를 돌렸다.

깊어질 대로 깊어진 감정의 골이 두 사람의 사이를 갈라 놓고 있었다.

촬영장에는 스태프들이 분주하게 뛰어다니고 있었다.

자칫하면 큰 사고가 날 수도 있는 장면이어서, 스태프들은 안전에 관련된 문제를 체크하고 또 체크했다.

박 감독은 회의 내내 재혁에게 신신당부했다.

“차가 보이면 그쪽으로 꺾는 시늉만 하면 되는 겁니다. 장면 만든다고 절대로 핸들을 꺾으시면 안 돼요. 알았죠?”

재혁에게 당부한 걸로는 모자랐는지, 그는 연출팀을 불러 차량의 상태와 촬영 각도 등을 끊임없이 점검했다.

“자, 촬영 준비하겠습니다.”

조감독의 사인에 재혁과 이나가 차에 올랐다.

조명이 켜지자, 확성기에서 박 감독의 목소리가 들렸다.

“먼저 그림만 딸 거니까, 사운드 없이 갑니다. 레디.”

재혁이 운전대 위에 손을 올렸다.

문득 이나와의 감정싸움으로 미처 신경 쓰지 못하고 있던 도로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산 너머로 이어지는 해안 도로의 깎아지른 듯한 절벽 아래로, 시꺼먼 파도가 넘실거리고 있었다.

어딘가 불길해 보이는 도로의 모습이 잊고 있던 재혁의 기억을 끄집어냈다.

뒤집힌 차 안에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는 엄마와 엄마를 향해 뛰어가는 아버지의 뒷모습….

그리고… 그런 아빠를 부르는, 무기력한 어린 자신의 모습.

‘아빠!’

번뜩-

“뭐 해요?”

“어?”

“큐 사인 떨어졌어요.”

이나의 말에 정신을 차리니, 앞쪽에서 다급하게 손짓하는 조감독의 모습이 보였다.

“컷!”

신경질적인 박 감독의 목소리가 들렸다.

“출발 안 하고 뭐 합니까!”

재혁이 미안하다는 듯 손을 들자, 박 감독이 혀를 쯧 차고는 다시 큐 사인을 보냈다.

“자 레디. 액션!”

큐 사인과 함께 재혁의 차가 출발했다.

그때, 비 한 방울이 박 감독의 얼굴에 떨어졌다.

“어?”

갑자기 굵은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촬영장 구석에서 대기 중이던 영인은 비가 내리자 밖으로 나와 보았다.

비 내리는 해안 도로의 모습은 왠지 모르게 불안해 보였다.

***

굵은 빗방울이 보닛을 두드리며 소리를 냈다.

이나는 내심 컷 사인을 기다리며 차창 밖을 힐끔거렸다.

하지만 컷 사인은 떨어지지 않았고 촬영은 계속되었다.

이미 실제로 싸운 연인 사이였기에 두 사람 사이는 연기가 필요하지 않을 정도로 냉랭했다.

이나는 재혁의 모습을 바라보지 않았다.

그 때문에 재혁의 상태가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운전대를 잡은 재혁의 두 손은 흥건하게 젖어 있었다.

귓가로 계속해서 이명이 들려왔다.

멀리서 들려오는 소방차 소리.

요란한 사람들의 외침과

‘불 꺼, 빨리 불!’

그 사이로 들리는 처절한 어린 자신의 울음소리가….

‘아빠! 아빠아!’

끼이익-

재혁이 운전하는 차가 비틀거리며 중앙선을 넘었다가 제자리로 돌아왔다.

“무슨…!”

깜짝 놀란 이나는 입에서 튀어나오던 말을 삼켰다.

이 장면은 끝단으로 치닫는 감정을 연기하는 장면이었다.

이나는 그가 연기를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녀의 생각과는 다르게 재혁은 자꾸만 희미해지는 정신을 차리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하지만 귓가를 울리는 이명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고, 시야가 점점 흐릿해졌다.

“….”

얼마 전, 이나의 품에서 기절했을 때처럼 온몸에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그럴수록 빗속을 달리는 차는 위태롭게 비틀거렸다.

속도가 점점 빨라지기 시작하자 박 감독이 조금 불안한 듯 말했다.

“너무 몰입하는 거 아닌가?”

그는 지금이라도 컷 사인을 내야하는지 고민했다.

화면에 비친 장면은 금방이라도 사고가 날 듯 위태로워 보였다.

하지만 그 위태로움이 주는 유혹에 그는 차마 NG 사인을 내지 못했다.

우연히 내리는 비와 재혁의 광적인 연기가 어우러져, 예상보다 좋은 장면이 연출되고 있었다.

“아씨…. 설마 무슨 일 있겠어?”

그는 결국 올리려던 손을 내리고 화면에 집중했다.

***

재혁의 차가 위태롭게 코너를 돌자, 앞쪽에서 다가오는 트럭 불빛이 보이기 시작했다.

끼이익-

급격하게 꺾은 핸들 때문에 차가 빗물에 미끄러져 비틀거렸다.

“악!”

손잡이에 몸을 의지해 버티던 이나가 차 문에 부딪혔다.

재혁은 연기에 집중한 것인지, 이나는 상관이 없는 것처럼 거칠게 운전할 뿐이었다.

“그만해요!”

이나가 소리쳤다.

하지만 재혁은 귓가에 울리는 이명 때문에 이나의 말을 듣지 못했다.

‘아빠…. 아빠…. 아빠…. 아빠….’

두 눈이 뒤집힐 듯 충혈된 재혁이 웅얼거리며 말했다.

“닥쳐.”

이나는 재혁의 말을 연기로 받아들여야 하는지, 진짜로 받아들여야 하는지 혼란스러웠다.

그녀가 재혁을 보려고 하는데, 차가 코너를 꺾으며 다시 한번 흔들렸다.

“멈춰요! 그만하라고!”

“닥쳐…. 닥치라고….”

“재혁 씨!”

“이제 제발 그만해!”

재혁의 외침을 이나는 자신에 대한 집착과 광기라고 생각했다.

반대쪽 코너를 돌아온 트럭의 불빛이 두 사람의 얼굴에 드리웠다.

“빠앙!!”

놀란 이나가 다시 한번 소리쳤다.

“재혁 씨!”

그녀는 재혁의 얼굴을 보았다.

충혈된 붉은 눈 위에 서린 그의 광기를….

문득 그의 모습이 무섭게 느껴졌다.

끼이익-

정신이 흐릿한 가운데 재혁이 본능적으로 브레이크를 밟았지만, 비 때문에 차가 미끄러졌다.

거대한 트럭의 옆면이 이나의 눈앞까지 다가왔다.

그리고

쾅!

요란한 굉음과 함께 재혁의 차가 트럭의 옆면에 부딪히며 빙글 돌았다.

그 순간 재혁은 있는 힘껏 핸들을 꺾었고, 빗길을 돌며 미끄러져 내려갔다.

롤러코스터를 타는 듯한 어지러움에 이나는 정신을 놓을 것만 같았다.

그렇게 십여미터를 미끄러져 내려간 재혁의 차는 안쪽 절벽에 부딪히며 뒤집혔다.

재혁과 부딪친 트럭은 아래로 미끄러져 가다가 가까스로 멈춰 섰다.

“헉!”

사고가 나자마자 촬영장에 있던 모든 스태프들이 사고 현장으로 달려 나갔다.

한바탕 쏟아진 소나기였는지 비가 그치고 있었다.

젖은 땅 위, 차에서 쏟아진 기름이 빗물을 타고 아래로 아래로 흘러내렸다.

“아….”

먼저 정신을 차린 건 이나였다.

눈을 떠 보았지만, 시야가 흐릿했다.

모든 것이 거꾸로 있는 듯 뒤집혀 있었고, 그녀의 몸은 안전벨트에 의지해 허공에 떠 있었다.

몸을 움직여 보려고 하자 온몸의 근육들이 비명을 질렀다.

“아….”

그녀는 꼼짝도 하지 못하고 신음을 냈다.

“재혁… 씨….”

그의 이름을 불러 보았지만, 아무런 대답이 들리지 않았다. 위급한 순간, 덜컥 겁났다.

이나는 있는 힘을 다해 고개를 돌려 재혁을 바라보았다.

희미하게 재혁의 모습이 보였다.

뚝-뚝-

재혁의 이마에서 흐른 핏방울이 바닥을 향해 한 방울씩 떨어져 내렸다.

“재혁 씨…. 일어나 봐요.”

이나가 울먹이며 그를 불렀지만,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비가 그쳐 고요한 가운데, 먼 데서 파도 소리만 들려왔다.

그녀가 꺼져 가는 정신을 놓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을 때, 불길한 소리가 들렸다.

타닥- 그리고 화르르.

그녀의 시야에 이글거리는 불꽃이 보였다.

찌그러진 배터리에서 발생한 불꽃이 흐르는 기름에 불을 댕긴 것이다.

사고의 충격으로 그녀의 정신은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아…. 아….”

그녀는 자신을 지탱하고 있는 벨트를 풀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몸은 말을 듣지 않았고, 찌그러진 벨트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조금씩 커지던 불꽃이 갑자기 화르르 타오르며 앞창을 덮쳤다.

“재혁 씨…. 재혁 씨….”

이나는 애타게 재혁의 이름을 불렀다.

불꽃은 보닛을 넘어 그녀와 재혁을 삼키려 다가오고 있었다.

재혁의 신음이 들린 건 그때였다.

“엄마….”

“재혁 씨…. 정신 차려요….”

멀리서 스태프들이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불났어! 야, 소화기!”

“재혁….”

감기는 두 눈으로 날름거리는 불꽃이 보였다.

그리고, 그 순간 차창 안으로 누군가의 손이 쑥- 들어왔다.

***

언젠가 재혁과 나누었던 대화가 떠올랐다.

‘요즘 행복해 보이는군?’

‘그래요? 왜 그렇지?’

‘글쎄. 드라마 해서?’

‘흠, 없지는 않죠?’

‘다른 이유가 또 있나?’

그때, 이나의 눈에 재혁의 모습이 보였다.

그를 보는 것만으로도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이나가 대답했다.

‘돈 많이 벌어서?’

‘그래? 그럼 돈 많이 벌게 해 줘야겠네.’

‘그러다 도망가면 어쩌려고?’

‘슬프겠지. 그래도 나는 이나가 웃는 게 좋아.’

그녀를 부르는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나야! 정신이 들어?! 이나야!”

익숙한 목소리에 이나는 힘겹게 눈을 떴다.

새하얀 불빛에 그녀는 눈을 찡그렸다.

잠시 후, 빛에 적응이 되자 주변이 보이기 시작했다.

흰색 천장에 파란 시트의 침대. 병원인 것 같았다.

“엄마!”

울상인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찬과 엄마의 모습이 보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