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 전속 계약
“SG 엔터테인먼트요?”
놀란 이나의 말에 비서들의 시선이 집중됐다.
이나는 아차 싶어 목소리를 줄였다.
“네. 정이나 씨 맞으시죠?”
“네, 그런데요.”
“아, 다름이 아니라, 전속 계약 관련해서 연락드렸습니다.”
“네.”
“혹시 계약한 회사 있으신가요?”
“아니요. 아직은….”
“아, 저희 대표님께서 만나 뵙고 싶으시다고 하셔서요. 혹시 가능하실지요?”
“….”
이나가 말이 없자 저쪽에서 한 번 더 물었다.
“전속 계약에 때문에 그러는데요.”
‘전속 계약’ 네 글자에 마른침이 꿀꺽 넘어갔다.
SG는 엔터테인먼트 업계에서 가장 규모가 큰 회사였다.
“안 되시나요?”
멍했던 정신이 퍼뜩 돌아왔다. 마다 할 이유가 없었다.
“아니요. 가능합니다.”
“아, 그럼 오늘 부산에 방문하셨는데, 오늘은 시간 어떠신지요?”
“오늘이요?”
이나는 화면 위 일정표로 시선을 돌렸다.
“두 시 전에는 가능합니다.”
“감사합니다. 그럼 오후 한 시에 대표님과 방문하겠습니다.”
“네. 알겠습니다.”
“그럼 이따 뵙겠습니다.”
전화가 끊기고도 한참 동안 멍한 기분이었다. 마치 꿈을 꾸는 기분으로 앉아 있는데, 지영이 그녀에게 슬그머니 다가왔다.
“팀장님, 혹시 SG 엔터에서 전화 받으신 거예요?”
“어? 어….”
“혹시 계약 미팅?”
“그런 거… 같네.”
“어머! 대박! 축하드려요!”
지영이 소리치자, 눈치를 보던 비서들이 일제히 축하 인사를 건넸다.
“축하드려요. 팀장님.”
이나는 아직 정신이 돌아오지 않은 표정으로 인사를 받았다.
“아. 그게 아직 계약한 것도 아니고. 그게….”
“팀장님! 슈퍼스타 되시면 제가 코디해 드린 거 잊으시면 안 돼요!”
“아니, 그게….”
“아, 정말! 오늘은 어떤 옷을 추천하지~”
휘파람을 불며 백룸으로 들어가는 지영을 보며 이나는 현실이 믿기지 않았다.
SG 엔터에서 연락이 왔다고?!
***
SG 엔터에서 온 연락 때문에 잠시 묻혀 있었지만, 이나와 재혁의 냉전은 오전 내내 비서실을 긴장에 빠트렸다.
재혁이 방에서 나올 때마다 부는 냉랭한 공기에 비서들은 두 사람의 눈치를 봐야만 했다.
“저, 잠시 나갔다 오겠습니다.”
“그래요.”
사무실에 맴도는 긴장감은 이나가 나간 후에나 풀렸다.
“으, 오싹해. 이래서 어디 일하겠어? 평소에 모른 척하는 것도 힘들어 죽겠는데….”
“그러게 말이야. 두 분 사이에 무슨 일 있었나?”
“신경 쓰지 마. 원래 사랑싸움은 칼로 물 베기니까.”
철컥-
방문이 열리자, 비서들이 화들짝 놀라 자리로 돌아갔다.
재혁은 이나에게 묻지 못한 말을 다른 비서들에게 물었다.
“정이나 씨 어디 가는 거지?”
서로 눈치를 보던 비서 중 한 명이 우물쭈물하며 대답했다.
“저…. SG 엔터테인먼트에서 연락을 받으셨다고….”
“….”
예상하지 못한 대답에 재혁이 미간을 좁혔다.
***
한편, 이나가 사전에 얘기한 덕분에 SG 엔터 대표는 호텔 안으로 들어와 있었다.
호텔 레스토랑 입구에 도착하니, 안쪽에 젊은 느낌으로 차려입은 남자가 반갑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아! 이렇게 만나 뵙다니 정말 영광입니다. 정이나 씨!”
“안녕하세요.”
그는 두 팔 벌려 과장된 동작으로 이나를 맞이했는데, 이러한 부분은 드라마 이 대표와 닮은 구석이 있었다.
“아 정이나 씨! 정말 반갑습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역시 배우라 그런가 실물이 훨씬 낫네요. 아, 드라마 잘 보고 있습니다. 그, 뭐라 그러죠? 인기 커플? 내가 인기 커플 팬입니다. 열성 팬.”
“말씀만으로도 감사합니다.”
“하하하. 좋아요. 좋아. 우리 뭐라도 좀 먹으면서 얘기할까?”
“그게, 아직 개장을 안 해서요.”
“아, 그러시구먼. 그럼, 바로 본론으로 들어갑시다. 아마 전화로 대강 들으셨겠지만, 이나 씨랑 전속 계약을 하고 싶어서 연락드렸습니다.”
“네. 조금 의외였어요. 갑자기 연락해 주셔서….”
“이쪽에 있는 사람들은 감이라는 게 있어요. 일종의 레이더 같은 건데, 아시다시피 내가 그게 좀 특출난 편입니다. 내가 정이나 씨에게서 슈퍼스타의 자질을 봤어요. 그것도 전 세계로 뻗어 나가는 월드스타의 자질 말입니다. 아하하하. 그 가능성이 나를 과감하게 만들더군요. 하하하.”
“네.”
“조건을 말씀 안 드려서 반응이 미적지근하시구먼. 조건은 원하는 대로 맞춰 줄 수 있습니다. 황인혜급으로.”
“….”
“황인혜급이라는 게 감이 안 오시나 본데, 이 정도면 업계에서 최고 대우입니다?”
“네, 그게 문제가 아니라 사실….”
“사실?”
“제가 여기 직원이라서요.”
“그거야 사표를 내시면 해결될 일이실 텐데.”
“위약금이 좀 있어서요.”
“위약금이요? 회사에요? 허 참, 이상한 회사네요. 위약금 문제만 해결되면 나올 수 있습니까? 얼만데요?”
“1억…. 아 그렇다고 무조건 나간다는 건 아니구요….”
“1억이요?”
대표는 고민이 되는 듯 턱 끝을 매만지며 생각에 빠졌다.
그리 긴 시간이 흐르지 않아, 그는 결정한 듯 테이블을 내려치며 말했다.
“1억 정도는 우리가 해결해 드리죠!”
***
이나는 그가 앉아 있던 빈자리를 보며 생각에 빠졌다.
‘1억 정도는 우리가 해결해 드리죠!’
테이블 위, 금빛으로 빛나는 명함이 유독 반짝거리며 그녀를 유혹했다.
이나는 손을 뻗어 명함을 들어 보았다.
“SG…. 엔터테인먼트….”
꿈에서만 그리던 일이 그녀에게 갑작스럽게 찾아왔다.
거부하기에는 너무나 큰 행운.
오히려 너무 큰 행운이어서 선뜻 손 내밀 수 없는 일이었다.
그 때, 전화가 왔다.
촬영장에서 그녀를 찾는 전화였다.
그녀는 명함을 품 안에 넣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문득 SG 대표가 문을 나서며 했던 말이 머리에 스쳤다.
‘혹시…. 명성 그룹과는 무슨 관계입니까?’
이나는 재혁과의 관계 때문에 한 질문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강 회장이 SG 엔터에 투자를 약속하면서 이나와 계약을 맺으라고 압박한 사실을 그녀는 알 방법이 없었으니까.
촬영장에 도착하자 무거운 분위기가 느껴졌다.
한창 촬영 준비로 바쁘게 뛰어다녀야 할 스태프들은 전부 앉아서 쉬고 있거나 잡담 중이었고, 연출팀과 배우들이 모여서 무언가 의논하는 것 같았다.
이나가 연출팀 쪽으로 다가가는데, 박 감독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소리쳤다.
“김 작가 이게 미쳤나! 작품이 장난이야?! 어?!”
“에헤! 김 작가 잘못 아니라니까. 참아, 어? 박 감독!”
언제 왔는지, 이 대표가 일어나 박 감독을 말렸다.
“저번에도 갑자기 대본 바꾸더니, 뭐? 이번에는 인하를 죽이라고?! 그 윗사람이라는 사람이 누구야! 어?! 말해 봐! 내가 한번 만나 보게!”
“왜 이래, 또. 알 만한 사람이. 이 바닥이 원래 이런 거 알잖아~ 위에서 시키면 어쩔 수 없는 거.”
“아니, 이건 해도 해도 너무하니까 하는 말 아니야! 나도 참을 만큼 참았다고!”
“자자. 보는 눈도 많으니까 나랑 가서 얘기하자, 어?”
“에이씨, 더러운 세상! 퉤!”
박 감독이 화를 못 참고 돌아서는데, 눈앞에 선 이나가 보였다.
“무슨 말씀이세요? 인하가 죽는다니요?”
박 감독은 미안한 마음에 이나의 눈을 피하고는 그대로 그녀를 지나쳐 촬영장을 빠져나갔다.
“야, 박 감독! 아이씨. 저 성질머리 하고는, 야야 정리 좀 해라. 정이나 씨. 나랑 나중에 얘기해요. 야! 박 감독!”
이 대표마저 자리를 떠나자, 이나는 연출팀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조감독은 역시 민망한 것인지 미안한 것인지 모를 표정을 하고서 이나의 시선을 피했다.
“무슨 일이에요?”
“그게…. 대본이 바뀌었어요.”
“어떻게요?”
“그게….”
조감독이 쉽게 대답을 하지 못하고 망설이자, 이나가 테이블 위에 올려 둔 대본을 집어 들고 읽기 시작했다.
[#35 늦은 밤의 도로 - 밤/ 절벽, 해안도로]
어두운 도로 위를 위태롭게 달리는 한 대의 차. 카메라 다가가면 운전석에 앉은 기영과 인하의 모습이 보인다.
감정이 격해져 싸우는 중인 듯, 서로를 향해 소리치는 모습이 보이지만, 빠른 박자로 흘러나오는 바이올린 소리에 두 사람의 대화는 희미하게만 들릴 뿐이다.
때마침 반대편에 보이는 차량의 불빛. 왠지 다가오는 모습이 불길하고, 카메라는 다시 운전석을 비춘다.
기영 : 그래서 감히 날 버리고 그놈에게 다시 돌아가겠다는 건가?
인하 : 그래요. 어차피 난 당신을 사랑한 적 없어요.
기영 : 헛소리.
인하 : 마음대로 생각해요. 우린 이미 끝났으니까.
기영 : 우리 끝은 내가 정해! 네가 나와 헤어질 수 있는 건 내가 너를 버렸을 때뿐이야. 알겠어?
인하 : 제발 정신 좀 차려요. 기영 씨! 우리는 이미 끝났다구요!
기영 : 끝났다고?
인하 : 그래요! 난 당신을 사랑하지 않아!
때마침 얼굴에 비치는 트럭의 불빛. 기영이 굳은 표정으로 말한다.
기영 : 그래? 그럼 내가 갖지 못한다면, 차라리 파괴하겠어.
인하 : 뭐라구요?!
굳은 표정의 기영. 인하가 말리기 전에 핸들을 휙! 꺾어 버리면, 동시에 카메라 앞으로 다가오는 트럭의 모습과 함께
꽝-
대본을 다 읽은 이나는 어이가 없는 표정으로 조감독을 바라보았다.
“이게 뭐죠?”
“그게…. 김 작가님이 갑자기 바꾸는 바람에….”
“그럼 인하, 기영은 이대로 하차인가요?”
“그대로 가면 아무래도…. 그렇겠죠?”
아직 4화나 남은 상황. 두 사람이 하차하기에는 이른 타이밍이었다.
이나가 말이 없자, 조감독은 그녀를 안심시키려는 듯 말했다.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박 감독님이 항의하러 갔으니까 아마 잘될 겁니다.”
이나는 생각에 잠긴 듯한 표정으로 물었다.
“혹시, 아까 말한 윗분이라는 게 누구죠?”
“글쎄요…. 그건 잘….”
지금, 이 순간 이나의 머릿속에는 한 사람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녀를 손아귀에 넣고 통제하고 싶어 하는 사람.
그녀가 인기를 얻자 불안해했던 사람.
그와 동시에 이 모든 일을 할 수 있는 사람.
강재혁.
‘나를 하차시키려고 하는구나…. 영원히 비서로 두고 싶어서.’
이나의 마음에 오해의 씨앗이 싹을 틔웠다.
“알겠어요.”
이나는 차갑게 말하고 돌아섰다.
“이나 씨!”
이나는 뒤에서 들려오는 조감독의 말을 무시하고 촬영장을 빠져나갔다.
로비 중간쯤에서 멈춰, 품 안의 명함을 꺼내 보았다.
“….”
여러 감정이 교차하는 가운데 앞을 바라보았다.
마침 엘리베이터가 열리고, 그 안에서 재혁이 내리고 있었다.
그도 촬영장에 오는 모양이었다.
“….”
이나는 그를 못 본 체하며 옆을 지나갔다.
재혁 역시 마찬가지였다.
두 사람의 걸음이 다시 한번 엇갈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