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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 멀어지는 마음 (61/72)

61. 멀어지는 마음

여름조차 끝나 가는 이 시점에, 어린이집에서 산타 할아버지 행사를했을 리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린이집에 산타 할아버지가 왔었어? 빨간 모자 쓴?”

“아니! 그냥 할아버지인데 이름이 산타 할아버지래.”

“아…. 그래? 찬이만 받은 거야?”

“응!”

누군가 찾아왔었나 싶어 몇 가지를 더 물어보다가 별다른 소득이 없어 그만두었다.

나중에 원장 선생님께 물어봐야겠다고 생각하고 택시를 잡아 집으로 향했다.

집으로 가는 길, 이나가 찬에게 말했다.

“찬아, 엄마가 늦어서 미안해~”

찬은 장난감에 정신이 팔렸으면서도 꼬박꼬박 대답은 잘했다.

“괜찮아. 엄마는 바쁘니까.”

찬의 말이 이나의 가슴을 찔렀다.

“그치. 엄마가 바빠서 그래. 찬이가 이해해 줘서 고마워~”

“그런데 엄마, 오늘 해찬이랑 싸웠어.”

“해찬이랑? 왜?”

“내가 드라마에 나오는 사람이 우리 엄마라고 하니까, 거짓말하지 말라고 했어.”

“그래? 해찬이가 왜 그랬을까?”

“엄마가 결혼을 안 해서 아들 없다 그랬어. 그래서 내가 엄마 아들 맞다니까, 엄마는 결혼 안 한 사람이라서 아니래.”

“….”

찬이 겪은 일에 이나는 당황했다.

그녀가 유명해지면서 찬에게 피해가 가기 시작한 것이다.

찬의 존재를 숨기려고 한 적은 없었다. 다만 인터뷰 같은 것을 아직 한 적이 없어서, 찬의 존재에 대해 밝힐 기회가 없었을 뿐이다.

이나는 애써 침착하며 찬에게 말했다.

“우리 찬이 속상했겠네.”

“응! 그랬더니 해찬이가 아빠는 어디 있느냐고 했어!”

“….”

울컥하는 마음에 하마터면 눈물이 쏟아질 뻔했다.

“그래서?”

“없다고 했어. 나는 엄마랑만 산다고 하니까 거짓말하지 말라길래, 해찬이 때렸어.”

찬의 말에 놀란 이나가 물었다.

“찬이가 때렸어?”

“응. 너무 속상했어.”

이나는 찬의 머리를 감싸 안았다.

벅차오르는 눈물을 애써 삼키며 찬에게 말했다.

“잘했어! 찬아. 앞으로 그런 얘기 하는 친구 있으면 찬이가 혼내 줘. 찬이는 엄마 아들이니까. 알았지?”

“응. 알았어. 그런데 엄마. 아빠는 하늘나라에 있는 거지?”

“응….”

“언제 볼 수 있어?”

“그게…. 찬이가 나중에 하늘나라 가면?”

“그럼, 지금은 못 보는 거야?”

“응.”

“그렇구나.”

찬은 이나의 말뜻을 알아들었는지, 아이 같지 않은 무거운 말투로 말끝을 흐렸다.

“아빠 보고 싶어?”

이나가 물으니 찬이가 대답했다.

“아니, 한 번도 안 봐서 안 보고 싶어. 그래도 있으면 좋을 거 같아.”

먹먹한 무언가가 이나의 마음을 내리눌렀다.

***

“찬, 잘 자렴~”

“응, 엄마도!”

방문을 닫자마자 이나의 입가에 머물던 미소가 옅어졌다.

그녀는 씁쓸함인지 외로움인지 모를 감정을 느끼며 거실 소파에 걸터앉았다.

찬의 말은 이나에게 큰 충격이었다.

갑작스러운 삶의 변화에, 이나 자신조차 정신이 없는 요즘이었다.

갑자기 재혁의 비서가 된 것만으로도 버거운데, 드라마에 출연해 배우의 꿈까지 이루었다.

모든 것이 다 이루어진 이때, 그녀는 가장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정이나, 행복하니?’

머릿속에 떠오른 질문에 이나는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이 모든 행복해 보이는 조건들은, 마치 시한폭탄처럼 시간이 지나면 그녀의 인생을 폭발시키고 사라져 버릴 것만 같았다.

끝이 있는 행복은 사실 불행이라는 것을 그녀는 재혁을 만나기 전에는 미처 알지 못했다.

그리고 그 폭탄의 타이머는 1년이었고, 마지막은 부지런하게 다가오고 있었다.

강 회장의 말이 떠올랐다.

‘헤어져 주게.’

어차피 헤어질 거, 1년을 기다릴 필요가 있을까? 대체 뭐 때문에 여기에 머물고 있는 거지? 어차피 사라져 버릴 행복인데….

전화가 울렸다. 재혁이었다.

그와는 텔레파시로 연결된 것이 분명했다.

그녀가 불안에 빠져 있을 때면 항상 그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

“네.”

“자?”

“아니요. 잘 갔다 왔어요?”

“응. 집 앞이야.”

“먼 길 갔다가 오느라 고생했어요.”

“잠깐 문 앞에 나오면 안 되나?”

“찬이가 자요.”

“보고 싶어. 잠깐 나와.”

그도 불안을 느끼고 있는 걸까? 요즘 들어 애교가 많아진 재혁이었다.

“알았어요.”

이나는 못 이기는 척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열었다.

열리는 문틈 사이로 그녀의 남자가 보였다.

“….”

그를 보는 것만으로도 이나는 설렘으로 심장이 요동쳤다.

그녀로 하여금 도저히 평온을 유지할 수 없게 만드는 남자였다.

“내일 보면 되는데.”

이나가 일부러 귀찮은 척하며 말하는데, 재혁이 빠르게 그녀의 입술을 훔쳤다.

아주 짧은 시간 그의 입술이 붙었다 떨어지자, 입술 위에 감촉이 아쉬움으로 남았다.

“잘 자.”

“네.”

재혁은 바로 뒤돌아 집으로 들어갔다.

그의 모든 움직임에서 아쉬움이 묻어났지만, 이나는 잡지 않았다.

그녀는 재혁이 집 안에 들어가는 모습을 보고 안으로 들어갔다.

***

다음 날 아침, 출근길.

이나가 재혁에게 물었다.

“어제는 별일 없으셨어요?”

재혁은 생각하는 듯 잠시 천장을 보더니, 고개를 가로저으며 대답했다.

“별일 있었지.”

“무슨 일이요?”

“최유리랑 강현준이 파혼했어.”

아무렇지 않게 뱉은 재혁의 말이 이나가 깜짝 놀라 소리쳤다.

“네?! 갑자기 왜….”

“강현준이 바람을 피웠다더군.”

이나의 마음은 불안을 예감하는 듯 울렁거렸다.

귓가에 엄마가 예전에 했던 말들이 맴돌며 이상한 이미지를 만들어 냈다.

‘어떤 여자랑 키스하고 있었어.’

지하 주차장에서 재혁과 유리가 키스하는 모습을….

“….”

“정이나!”

“네?”

재혁의 목소리에 이나는 상념에서 빠져나왔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골똘히 하길래 말도 못 들어?”

“죄송해요. 무슨 말씀 하셨어요?”

“이나야말로 무슨 일 있었던 거 아니야?”

“아니에요.”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닌 거 같은데?”

“피곤해서 그래요.”

“이제 그 대사는 식상하지 않나? 그 말을 할 때마다 일이 터졌던 건 알고?”

“워낙…. 일이 많았으니까.”

이나가 말끝을 흐릴 때쯤 호텔에 도착했다.

이나는 몰려드는 팬들을 바라보며 서둘러 화제를 돌렸다.

“익숙하지 않아요. 이런 거.”

“이제 익숙해져야지. 이나의 꿈이었으니까.”

“….”

경호원들이 사람들을 통제하는 사이, 이나와 재혁은 서둘러 호텔 안으로 들어갔다.

계속해서 늘어나는 팬들 때문에 회사 직원들의 피로도가 커지고 있었다.

회사 홍보를 위해 시작한 일이었지만, 일에 방해가 된다는 의견들이 나왔다.

재혁 역시 그 심각함을 인지하고 대책을 찾는 중이었다.

입구로 들어오려는 팬들을 겨우겨우 막아 내고 로비 안쪽으로 들어왔을 때, 한 남자가 두 사람에게 다가왔다.

“대표님, 정이나 양.”

엄마의 남자 친구, 만재였다.

그는 주방 서버 옷을 입고 있었다.

취업했다더니, 호텔 레스토랑에 취직한 모양이었다.

그를 보자마자 이나의 표정이 굳었다.

재혁도 이미 그의 존재를 알고 있었지만, 두 사람을 만나게 하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어쩐 일이세요?”

이나가 차갑게 얘기하자 만재가 우물쭈물하며 말했다.

“저, 부탁 좀 드리려고 그러는데….”

“무슨….”

할 때, 재혁이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었다.

“말씀하시죠.”

“저… 이번 달 월급은 생활비 때문에 갚기가 힘들 거 같습니다. 한 달만 이자를 유예해 주시면….”

“그렇게 하세요.”

“감사합니다.”

만재가 90도로 허리를 굽혀 인사하자 재혁이 그에게 물었다.

“일은 할 만하십니까?”

“네! 아주 좋습니다.”

“다행입니다.”

“정말, 정말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그렇게 인사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래도 감사합니다.”

만재는 한참 동안 재혁에게 인사를 했다.

그가 허리를 굽힐수록 재혁은 곤란했다.

이나에게 만재와의 관계를 말하지 않았기에, 그가 빨리 돌아갔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그가 돌아가고, 아니나 다를까, 날카로운 목소리로 이나가 질문했다.

“이자? 무슨 말씀이시죠?”

머리가 지끈 아파 왔다. 언젠가 말해야겠지 생각했지만, 최악의 형태로 이나가 알게 되었다.

“올라가서 얘기하지. 보는 사람이 많으니까.”

***

“그러니까. 대표님께서 그 사람 빚을 다 갚아 줬다는 말이네요? 깡패들한테서 집하고 가게까지 구입하면서?!”

“아니야. 유예 기간을 준 거지.”

“그게 그 말이잖아요!”

“어떻게 그 말인가? 돈을 벌어서 나한테 갚아야 하는데… 미안해. 말하려고 했어.”

이나의 표정을 본 재혁이 먼저 꼬리를 내렸다.

“‘말하려고 했어’가 아니라 말했어야죠!”

“타이밍이 안 맞았어. 바빴잖아.”

“아무리 바빠도! 아무리 정신이 없어도 그런 일이 있었으면 나한테 말했어야죠!”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정말 너무 기가 막혀요. 내가 얼마나 쉬워 보였으면! 내가 얼마나 무능해 보였으면! 상의도 없이 마음대로 그런 짓을 해요? 돈으로 날 사려고 한 거예요? 돈이면 내가 당신한테서 못 빠져나갈 거 같았어요?!”

“그런 거 아니야.”

“아니긴! 아니었으면 그러지 말았어야지! 내가 아무리 힘들어 보이고 흔들려도, 마음대로 그러지 말았어야지! 지금 내가 얼마나 비참한 줄 알기나 해요?”

“이나. 좀 침착해.”

“뭘 침착해요. 지금! 내가 창녀예요? 돈으로 사게?”

“그건 말이 너무 심하잖아.”

“그럼 대표님이 한 짓은 안 심하고? 말해요. 얼만지.”

“이나야.”

“당장 말하라고!”

“사억 팔천이야.”

“사… 얼마요?”

“부담 주기 싫어서 그랬어. 찬이까지 건드는 거 보고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고. 의논하고 일을 하기에는 그날 밤에 놈들을 따라가서 진행된 거라서 이미 어쩔 수가 없었어.”

“그…. 하….”

너무나 큰 금액에 이나는 아랫입술을 깨물고 한숨을 내쉬었다.

“돈 자랑하려고 한 거 아니고, 이걸로 널 어떻게 해 보겠다는 것도 아니야. 정말 찬이를 건든 거에 너무 화났고, 만재라는 사람을 어머니께 사과시키고 싶었던 거야.”

“그럼…. 저 사람도 결국 돈 때문에 사과한 거네.”

“그걸 그렇게까지 말할 필요는 없잖아.”

“돈은. 어떻게든 갚겠습니다.”

“받을 거야. 준 거 아니라고 말했어. 분명.”

“아니요. 제가 갚을 테니까. 그렇게 아세요. 그리고…. 어쨌든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나의 감사 인사에서 재혁은 거리감을 느꼈다.

“꼭 그렇게 해야겠나?”

“네. 아무리 연인 사이라도 공유할 수 없는 부분이 있어요. 대표님은 지금 그걸 넘어오셨어요.”

“헤어지자는 말이야?”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생각할 시간을 가졌으면 합니다.”

“….”

“나가 보겠습니다. 대표님.”

이나는 재혁에게 90도로 인사하고 돌아섰다.

재혁은 그녀가 나가는 모습을 멀뚱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의 방문을 나오자, 비서들이 다급하게 시선을 돌리는 모습이 보였다.

이나는 그들을 애써 무시하고 안쪽 비서팀장 자리에 가서 앉았다.

“후….”

이나가 한숨을 푹 내쉬는데 전화기가 울렸다.

“네. 비서실입니다.”

“정이나 씨입니까?”

“네, 그런데요.”

“SG 엔터테인먼트입니다.”

이나의 두 눈이 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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