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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 유리의 마음 (60/72)

60. 유리의 마음

유리의 폭탄 선언에, 파티장의 분위기는 겨울 왕국처럼 시시각각 얼어붙었다.

유리의 말의 의미를 아직 채 깨닫기도 전에, 현준이 믿기지 않는다는 말투로 말했다.

“하…. 하하. 갑자기 그게 무슨 말이야?”

현준이 다시 손을 잡자, 유리가 까칠하게 손을 뿌리쳤다.

그녀는 강 회장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좋은 자리 망쳐서 죄송하지만, 다 모이셨으니 말씀드리는 거예요. 파혼하겠습니다.”

“유리야!”

현준이 외쳤고.

“어머어머, 이게 무슨 일이니?”

윤 여사가 물었고.

“현준이 너! 이 자식 무슨 사고 쳤어!”

정수가 호통을 쳤다.

잠자코 이야기를 듣던 강 회장이 유리에게 물었다.

“이유가 있는 모양이구나.”

유리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품에서 꺼낸 사진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

“아….”

사진을 본 순간, 그것이 의미하는 바를 모두가 알 수 있었다.

“이놈이!”

흥분한 정수가 현준에게 달려드는 것을 윤 여사가 말리고 나섰다.

“여보 참아요! 아버님 앞이잖아! 여보!”

현준은 유리를 향해 돌아서 다급하게 해명하려 했다.

“유리야…. 내 말 좀 들어 봐. 뭔가 오해가 있는 거 같은데, 그날.”

툭-

유리가 사진 한 장을 더 던졌다.

모텔에서 나오는 현준과 보라의 사진이었다.

“!!”

정수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앞에 놓인 스파게티 그릇을 집어 들고 현준에게 몸을 날렸다.

“이! 못난 놈!”

“아빠!”

스파게티를 뒤집어쓴 현준은 정수가 죽이겠다며 나이프를 들고 쫓아오자 파티장 구석으로 달아났고, 윤 여사는 화들짝 놀라서 정수를 말렸다.

한순간에 아수라장이 된 파티장.

유리가 강 회장을 바라보며 말했다.

“할아버님, 단둘이 얘기하고 싶어요.”

“그래….”

***

강 회장과 유리는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았다.

어색한 분위기 속에, 강 회장이 먼저 입을 열었다.

“미안하다. 모든 것이 내 불찰이다.”

“….”

“네가 원하는 대로 다 할 테니, 말하거라.”

“정말 제가 원하는 대로 하실 건가요?”

“그래. 뭐든 말해. 전적으로 우리 잘못이야.”

“그럼, 재혁 오빠 다시 만나게 허락해 주세요.”

예상하지 못한 대답에 강 회장은 당황했다.

쉽게 대답하지 못하고 잠시 생각하다가 멋쩍은 웃음으로 답했다.

“허허. 재혁이랑 다시 만나겠다고?”

“네.”

“재혁이랑 얘기는 된 거고?”

“아니요. 그래서 말씀드리는 거예요. 할아버지가 도와주세요.”

“허허. 참.”

평생 협상을 하며 살아온 강 회장조차 당황할 만한 말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유리가 농담을 할 리도 없으니, 강 회장은 더욱 어찌할 바를 알 수 없었다.

“무리인가요?”

“조금 무리 같구나. 달리 원하는 건 없고?”

“네. 제 의견이 관철되지 않으면 가만히 있지 않을 생각입니다.”

“가만히 있지 않는다고?”

“네. 제가 가지고 있는 썬라이즈 지분을 해외에 넘기겠어요.”

“….”

유리는 썬라이즈의 2대 주주였기에 절대 가볍게 들을 수 있는 말이 아니었다.

“그리고, TS의 모든 투자도 철회할 겁니다.”

“일을 크게 만드는구나.”

“저에게는 큰일입니다. 할아버지.”

다소 굳어진 강 회장의 표정에도 유리는 물러섬 없이 대답했다.

잠깐의 기 싸움이 있었지만, 강 회장은 알고 있었다.

결국 잘못한 쪽은 현준이고, 자신은 유리의 말을 들어주어야 한다는 사실을 말이다.

“정이나랑 헤어지게만 해 주세요. 나머지는 알아서 할게요.”

“생각해 보마.”

“네. 하지만 오래 기다리지는 않을 거예요.”

“그래. 무슨 말인지 잘 알았다.”

유리가 방에서 나갔다.

홀로 남은 강 회장은 두 눈을 감고 소파에 머리를 기댔다.

머릿속에 수많은 생각이 오고 갔다.

돌고 돌아 유리가 재혁이와 만나겠단다.

처음부터 그는 재혁이와 유리가 결혼하기를 바라고 있었다.

자신이 세상을 떠나면 정수가 회장 자리를 노릴 테고, 그때 TS라는 거산은 재혁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 줄 터였다.

유리와 현준이 만난다고 했을 때 가장 걱정되었던 것은 재혁의 미래였다.

그런데 이렇게 원래대로 돌아오다니.

생각하는 동안 가슴의 통증이 시큰하게 심장을 조여 왔다.

그는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었다. 그에게 주어진 시간이 그리 길지 않다는 사실을 말이다.

언제까지나 손주의 바람막이가 되어 줄 수 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이제는 새로운 바람막이가 필요한 때였다.

“….”

문득 오전에 보고 왔던 찬이 떠올랐다.

귀엽고 사랑스러운 아이.

유리가 찬의 존재를 알고도 재혁이와 다시 만나겠다고 할까?

그냥 숨겨야 하나?

그럼… 그 아이는?

“하아. 인생이란 참으로 어려운 것이로구나.”

그의 입에서 깊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환갑이 넘은 이후 세상 모든 일이 어렵지 않게 느껴졌는데, 이번 일만은 강 회장에게도 너무 어려운 일이었다.

***

“유리야!! 유리야!!”

다급한 현준의 외침을 무시하고 유리는 차에 올랐다.

“출발하세요.”

유리의 말에 차가 출발하자, 현준은 차창을 두드리며 한참을 따라왔다.

그러다 지친 현준은 망연자실하게 서서 유리의 이름을 불렀다.

“유리야!!”

백미러에 비친 현준의 모습이 아득하게 멀어졌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재혁이 유리에게 말했다.

“서울에 있다 와. 하루 휴가 주지.”

“내가 알아서 해. 그리고 내 휴가 결정권자는 오빠 아니야.”

“그래.”

재혁은 더 묻지 않고 고개를 돌렸다.

이미 상황을 알고 있어서 놀라지 않은 것일까?

재혁은 남 일이라는 듯 평온하기만 했다.

“너무 평온한 거 아니야?”

“그럼 내가 슬퍼야 하나?”

“놀라기라도 해야지.”

“알고 있었으니까.”

“폭탄 선언이었어.”

“그래, 무례한 방법이었지. 나였으면 둘이 해결했을 거야.”

“왜 항상 그렇게 기계적인데?”

“딱히 바꿀 이유가 없으니까.”

재혁은 ‘너한테만 이래’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나왔지만, 유리를 배려해서 하지 않았다.

마음이 상한 유리가 고개를 돌렸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재혁의 눈치를 살폈다.

“정이나랑은 잘 지내?”

“응.”

“요즘 둘 다 잘나가던데.”

“응.”

“좀 길게 대답할 순 없니?”

“응. 그냥 조용히 가자.”

“오빠.”

“왜.”

“혹시 정이나랑 헤어지게 되면, 나랑 다시 만날 생각 있어?”

“그게 뭔 헛소리지?”

“헤어질 수도 있잖아.”

“아니, 헤어져도 너랑 만날 생각 없고, 애초에 우린 안 헤어져.”

“사람 일은 모르는 거야.”

“아는 일도 있어. 이 두 가지는 확실히 알지. 다시 말해 줄까?”

“됐어.”

유리가 다시 휙 고개를 돌렸다.

엔진 소리만 들리는 가운데, 차가 고속도로로 진입했다.

차창 밖을 바라보던 유리가 들릴 듯 말 듯 한 목소리로 혼잣말을 했다.

“그래도, 그 다음은 내 차례야.”

그 말을 들은 재혁이 기사에게 말했다.

“멈춰.”

“네?”

“차 세우라고.”

“여기 고속도로인데요?”

기사가 반문했지만, 룸 미러로 보이는 재혁의 눈빛에 움찔하고는 갓길에 차를 세웠다.

재혁이 차 문을 열면서 말했다.

“먼저 가. 불편해서 못 가겠으니까.”

“왜 이래? 그냥 타. 가만히 있을 테니까.”

“늦었어. 이미 불편해졌거든.”

재혁은 고민 없이 차에서 내렸다.

“오빠! 재혁 오빠! 알았으니까 타라고!”

차에서 내린 유리가 재혁을 향해 소리쳤다.

하지만 그는 거침없이 뒤돌아 고속도로 반대쪽을 향해 뚜벅뚜벅 멀어졌다.

그의 뒷모습을 보며 유리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손을 뻗으면 사라지는 신기루처럼 재혁은 손에 잡힐 듯 잡히지 않았다.

재혁이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그를 향한 유리의 욕망은 더욱더 커져만 갔다.

***

한편, 업무를 마친 이나는 주머니에 휴대 전화를 쑤셔 넣고 재빠르게 촬영장으로 향했다.

7시가 거의 다 되어서 도착한 통에 시작부터 박 감독의 투덜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드라마 회의를 시작했다.

회의는 생각보다 길어졌다.

이나가 계속 벽에 걸린 시계를 힐끔거리자, 박 감독이 짜증 난다는 투로 말했다.

“정이나 씨, 바빠? 왜 자꾸 시계를 봐?”

“죄송합니다.”

“집중 좀 해요. 네?”

“네….”

이나가 고개를 숙이자마자 휴대 전화 소리가 울렸다.

“아씨, 누구야!”

이나는 주머니에서 울리는 소리에 깜짝 놀라 휴대 전화를 꺼내 확인했다.

바로 끊으려던 그녀는 어린이집에서 걸려 온 전화인 것을 확인하고는 죄송하다는 듯 말했다.

“죄송합니다…. 전화 좀.”

“아씨, 흐름 깨게!”

박 감독의 짜증 어린 말을 들으며 이나는 복도로 나갔다.

“네, 여보세요?”

“아, 찬이 어머니시죠?”

“네.”

“언제 오시나 해서요.”

이나는 시간을 확인하며 말했다.

“어. 찬이 할머니가 가시기로 했는데요?”

“아직 안 오셨는데요. 저희도 퇴근을 해야 해서. 빨리 좀 오시면 좋겠는데요.”

“네. 알겠습니다.”

전화를 끊고 그녀는 투덜대며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화를 받을 수 없어.”

엄마가 전화를 받지 않자 짜증이 물밀듯 올라왔다.

엄마에게 문자를 보내기 위해 문자함을 여는데, 아래쪽에 보내지 않은 쪽지 표시가 있었다.

뭐지? 싶어 눌러 보니, 아까 엄마에게 보낸 문자가 전송이 안 된 상태였다.

“아….”

그녀는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 고민했다.

어떡하지?

고민하던 이나는 하는 수 없이 촬영장 안으로 들어가 박 감독에게 양해를 구했다.

박 감독은 배우를 잘못 뽑았다며 이나를 향해 길길이 날뛰었고, 이나는 죄송하다며 촬영장을 빠져나왔다.

***

이나는 택시를 타고 어린이집으로 향했다.

가는 길에 그녀를 알아본 시민들 때문에 몇 번의 사인을 해 준 뒤였다.

유명해지는 게 꼭 좋지만은 않다는 것을 실감하며 어린이집 앞에서 내렸다.

헐레벌떡 불 꺼진 어린이집 복도를 뛰어가니, 한 방 안에 불이 켜져 있었다.

그녀가 나타나자, 찬이 환하게 웃으며 이나를 불렀다.

“엄마다!”

이나가 달려드는 찬을 안으며 선생님에게 죄송하다고 말했다.

어린이집 선생님은 괜찮다고 말했지만, 피곤함에 지친 표정이었다.

이나는 몇 번이나 거듭 죄송하다고 허리를 숙이고 어린이집을 나왔다.

짐을 챙겨 나오는 찬의 품에 커다란 선물 바구니가 들려 있었다.

“어린이집에서 준 거야?”

하고 물으니 찬이 대답했다.

“싼타 할아버지가 줬어!”

“산타 할아버지?”

“응!”

이나가 의아하다는 듯 찬을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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