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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 파혼 (59/72)

59. 파혼

찬이 기대에 찬 얼굴로 물었다.

“산타 할아버지요?”

“그래.”

강 회장이 허리를 펴고 일어나 손을 내밀자, 뒤쪽에 서 있던 비서가 커다란 선물 바구니를 가져왔다.

강 회장은 선물 바구니를 찬에게 내밀었다.

“자, 찬이가 뭘 좋아하는지를 이 산타 할아버지가 몰라서 다 가지고 왔는데, 마음에 드느냐?”

찬의 몸통보다 더 큰 바구니에는 온갖 장난감들이 들어 있었다.

찬은 그 속에 들어 있는 잠수함 장난감을 보고 자리에서 방방 뛰며 좋아하다가 금세 시무룩해졌다.

“우와….”

“왜, 마음에 안 들든?”

“그게 아니라, 엄마가 갑자기 큰 선물을 주면 나쁜 사람이라고 했어요.”

“그래? 왜 그렇게 말씀하셨지?”

“왜냐면요~ 찬이 데려가려고 그런 거니까 절대 받지 말라고 했어요.”

“….”

강 회장은 마음을 들킨 것 같아 민망하게 웃었다.

지금, 이 순간, 아무도 그의 진의를 의심하지 않았는데도 말이다.

“산타 할아버지는 찬이 데려가는 거 아니니까. 그냥 받아도 돼요.”

“진짜요?!”

“그럼~ 맛있는 거는 친구들하고 나눠 먹고. 알았지?”

“네! 산타 할아버지 감사합니다!”

“허허, 기특하구나. 들어가 보거라.”

“네! 할아버지 메리 크리스마스!”

크리스마스가 한참 지난 늦은 여름날, 자신이 산타라는 말을 믿는 찬의 순진함에 강 회장은 마음이 더욱 무거워졌다.

강 회장은 안으로 들어가 친구들에게 선물을 자랑하는 찬의 모습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저, 회장님?”

원장 선생님이 슬그머니 말을 걸자, 강 회장은 이제는 다 됐다는 듯 몸을 돌렸다.

“더 안 보시나요?”

“이제 다 됐습니다.”

그는 쓸쓸하게 뒤돌아 찬이의 유치원을 나갔다.

***

“수고하셨습니다!”

촬영이 끝나자, 이나가 스태프들에게 인사하며 촬영장을 걸어 나갔다.

오늘도 찬이의 유치원 하원이 문제였다.

그동안 워킹맘의 삶을 무리 없이 살아왔던 이나였지만 막판으로 치달은 촬영 스케줄은 그녀로 하여금 일상생활이 불가능하게 만들고 있었다.

이번 주의 밀린 업무도 처리해야 해서 이나는 마음이 바빴다.

“어딜 그렇게 급하게 가?”

이나가 빠른 걸음으로 걸어갈 때, 인혜가 다가왔다.

“아. 선배님, 아직 안 가셨어요?”

“얘기할 게 좀 있어서. 이나 씨는 바로 퇴근?”

“아니요. 다시 사무실 올라가서 처리할 일이 좀 있어서요.”

“대단하네, 남들은 하나도 제대로 못 해서 쩔쩔매는데. 이나 씨는 참 운도 좋아? 능력 있는 남자 친구도 있고 말이야.”

비꼬는 말에 이나가 잠시 말이 없자, 인혜는 손사래를 치며 웃었다.

“뭘 그런 거 가지고 정색해~ 농담이야, 농담. 조크.”

“네.”

촬영장을 빠져나가는데, 입구에서 대기하고 있던 팬들이 두 사람에게 달려왔다.

드라마의 인기가 높아지면서, 촬영장 근처는 언제나 배우들을 기다리는 팬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사인 좀 해 주세요!”

팬들이 다가오자 인혜는 귀찮은 듯 손을 내밀었다.

그러나 팬이 내민 종이와 팬은 인혜의 손을 지나쳐 이나에게 향했다.

“아…. 네….”

이나에게는 네다섯 명의 팬들이 몰려들었고, 인혜에게는 고작 한 명의 팬이 수줍게 종이를 내밀 뿐이었다.

이나는 인혜의 눈치를 보며 팬들에게 사인해 주었다.

인혜는 자존심이 상했다.

고작 첫 작품인 배우, 그것도 백으로 들어와 인기를 얻은 이나에게 천하의 박인혜가 밀린 것이다.

그녀는 신경질적으로 앞에 놓인 종이에 사인하고는 이나를 지나쳐 호텔을 빠져나갔다.

“사진도 찍어 주세요~!”

이나는 팬들이 들이민 휴대 전화 화면을 보며 어색하게 웃었다.

그녀는 싸인을 하면서도 계속 마음이 급했다.

빨리 올라가 처리해야 될 일들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사진도 찍어 주세요.”

계속되는 팬들의 요청을 이나는 거절하지 못하고 일일이 들어 주었다.

***

사무실로 올라가니, 재혁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오늘 대표님 어디 가셨어요?”

이나의 물음에 김대리가 당황한 표정으로 말했다.

“강 회장님 생신 파티 때문에 오후에 서울 올라가셨는데요.”

“아….”

이나는 거듭되는 촬영으로 비서 임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고 있었다.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강 회장의 생일까지 놓치다니. 자책이 몰려오는데, 김대리가 말했다.

“선물 잘 준비했으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하셨어요.”

“그렇군요. 고마워요.”

재혁의 배려가 느껴졌다.

이제는 조금 더 재혁에게 신경 써야겠다고 생각하며 컴퓨터를 켜는데, 박 감독에게서 전화가 왔다.

이나는 시간을 빼앗길 거 같아 받지 말까 고민하다가 전화를 받았다.

“네, 감독님.”

“어! 이나 씨! 대본 수정 사항 있네. 촬영장에 들를 수 있어?”

이나는 힐끗 시간을 확인했다.

5시…. 업무만 처리하고 출발해도 찬이를 데리러 가기에는 늦은 시간이었다.

그녀는 한숨을 푹 쉬며 대답했다.

“네. 7시쯤 내려갈게요.”

“좀 빨리 안 되나? 연출팀 회의도 있는데.”

“6시 반까지 내려갈게요.”

“그래, 그럼 부탁해.”

뚝-

전화가 끊겼다.

밀려오는 스트레스에 이마를 쥐고 있다가, 일단 엄마에게 문자를 보냈다.

[엄마, 나 오늘 너무 늦게 끝날 거 같네. 찬이 좀 부탁해.]

급한 마음에 전송 버튼을 누르자마자 휴대 전화를 내려놓고 마우스를 잡았다.

그녀에게 주어진 시간은 한 시간 반.

이나는 모니터에 온 신경을 집중했다.

이나의 휴대 전화 화면에는 전송 실패 메시지가 떠 있었다.

***

한편, 재혁은 유리와 함께 인천 공항에 도착했다.

그날 사건 이후, 얼굴을 보는 것조차 처음이어서 인천에 도착할 때까지 두 사람 사이에는 한마디의 말도 오가지 않았다.

본사에서 대기시킨 차를 타고 명성 호텔로 향하는 동안에도 마찬가지였다.

재혁의 어떠한 냉대에도 항상 먼저 말을 걸던 유리는, 지난번 재혁의 태도에 상처받았는지 몸을 돌려 차창 밖을 내다볼 뿐이었다.

서울 시내로 진입하자 차가 밀렸다.

서울역부터 광화문까지, 5분도 안 걸릴 길을 30분에 걸쳐서 도착했다.

차에서 내리자마자 재혁은 유리를 기다리지 않고 성큼 파티장으로 걸어갔다.

뒤늦게 내린 유리는 멀어지는 재혁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그가 문 안으로 들어가고 나서야 따라 들어갔다.

화려한 파티장에 강 회장의 일가만이 앉아 있었다.

이번 생일만큼은 간단하게 식사를 하고 싶다는 강 회장의 의견을 반영한 자리였다.

강 회장을 비롯해 현준과 작은아버지 정수, 그리고 작은어머니 안 여사까지 네 명.

빈자리는 2개였고, 그 자리는 강 회장의 손자 재혁과 현준의 파트너인 유리의 자리였다.

재혁이 문을 열고 들어오자, 강 회장이 멀찍이 물었다.

“유리는?”

“올 겁니다.”

무심하게 대답한 재혁이 자리에 앉을 때쯤 유리가 도착했다.

유리는 입구에 서서 강 회장의 가족들에게 허리 숙여 인사했다.

재혁이 자리에 앉자, 정수가 재혁에게 말했다.

“일찍 도착하라니까.”

“차가 많이 밀리네요.”

“서울 시내 밀리는 거 하루 이틀이야? 그거까지 생각해서 와야지. 어른들 기다리시는데.”

“내년 생신 때는 주의하도록 하죠.”

재혁과 정수가 은근히 신경전을 벌이자, 강 회장이 중간에 끼어들었다.

“먼 길 왔는데 너무 뭐라 하지 말아.”

그리고 유리를 향해서는 인자한 미소를 지었다.

“유리, 어서 오거라.”

“할아버님 생신 축하드려요.”

“그래. 오느라 고생 많았지?”

“전 앉아만 있었는걸요.”

“그게 고생이지.”

듣고 있던 현준이 은근슬쩍 끼어들며 유리의 손을 잡았다.

그러자 유리는 손을 빼며 다른 사람들 모르게 현준에게 차가운 눈빛을 보냈다.

“?!”

아무리 큰 잘못을 했어도 좀처럼 볼 수 없는 얼음처럼 차가운 눈빛이었다.

그녀의 눈빛에 현준은 오싹한 불안감을 느꼈다.

‘무슨 일이지?’

그 사이 음식이 나왔다.

명성 그룹이 자랑하는 최고의 쉐프들이 솜씨를 발휘한 요리가 도착하자, 넓은 파티장은 식욕을 자극하는 맛있는 냄새들로 가득 찼다.

음식이 나오자, 정수가 먼저 준비한 선물을 꺼냈다.

“아버님 생신 축하드립니다. 오래오래 건강하세요.”

그가 준비한 것은 금띠를 두른 작은 쿠키 상자였다.

“엔젤롭 쉐프가 만든 쿠키입니다.”

“허. 그래?”

“네. 아버님 드리려고 작년에 주문해서 벨기에에서 받아 왔습니다.”

“고맙구나. 오랜만이군.”

강 회장은 상자를 열어 정갈하게 놓인 쿠키 하나를 입에 넣었다.

“아주 맛있구나. 고마워.”

그다음은 정수의 부인, 윤 여사가 술병 하나를 내밀었다.

“아버님, 큰 건 준비 못 했고, 아르 드 브릭이에요.”

“허허. 다들 돈 주고도 못 구하는 걸 가져왔구나. 고맙다. 이건 식사하면서 한잔하자꾸나.”

“네, 아버님.”

다음은 재혁의 차례였다.

재혁은 테이블 위에 USB 하나를 올려놓았다.

“저희 드라마에서 잘린 장면들 원본이에요.”

“오호!”

“NG 장면들도 넣어 뒀어요.”

여태까지 힘이 없어 보이던 강 회장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그는 UBS를 들고 크리스마스 선물을 받은 어린아이처럼 좋아했다.

“그리고 이건, 특별 제작 포스터.”

“오오! 그래그래.”

이나와 재혁이 안고 있는 장면이 찍힌 포스터였다.

강 회장이 빼앗듯이 가져가자, 재혁이 살짝 얼굴을 찡그리며 말했다.

“제발, 생일 선물은 알아서 할 테니까 이런 거 좀 시키지 마세요.”

“선물은 받고 싶은 걸 받아야지.”

수천만 원을 호가하는 술도, 돈으로도 못 구하는 쿠키도 손주가 준 포스터 앞에 찬밥 신세가 되자, 정수와 윤 여사의 표정이 굳었다.

이제는 현준의 차례였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현준은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말했다.

“저는 특별히 드릴 선물은 없고요. 전해 드릴 선물 같은 소식이 있습니다.”

현준의 말에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로 쏠렸다.

그는 유리의 손을 잡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유리는 말없이 앉아 현준을 올려다보았다.

그는 그윽한 눈빛으로 유리를 보다가,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저희, 약혼 말고 결혼하고 싶습니다.”

그의 말에 제일 먼저 반응한 사람은 정수였다.

“그래, 그것 참 좋은 소식이다. 안 그렇습니까. 아버님! 하하하.”

강 회장 역시 좋은 소식이라는 말을 하려 했다.

그때, 유리가 현준의 손을 놓았다.

모두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하는데, 유리가 강 회장을 보며 말했다.

“할아버님, 저희 헤어질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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