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 친자 확인
모니터 속, 불꽃처럼 타오르는 영인의 눈빛을 보며 박 감독이 말했다.
“야. 이건 어떠냐?”
“글쎄요. 새롭긴 한데요?”
“와, 눈빛에 불붙겠다. 오늘 연기 다 왜 이래? 누가 보면 진짜인 줄 알겠어?”
“어? 장영인 씨 왜 저러죠?”
“뭐…. 뭐야. 진짜 싸우는 거야?”
“어어? 주먹을 왜 휘두를까?! 어어! 막내야!! 말려라. 말려!”
영인이 재혁을 향해 주먹을 휘두르는 통에 촬영장은 아수라장이 되어 버렸다.
“그만해요! 그만!”
당황한 이나의 외침이 울려 퍼졌고, 먼 곳에서 유리가 그 모습을 보고 있었다.
***
“아!”
재혁의 앓는 소리가 나지막하게 울리자, 이나가 그의 손등을 찰싹 때렸다.
“엄살 부리지 말아요.”
“진짜 아파.”
“그러게, 누가 싸우래요?”
“난 안 싸웠어. 피하기만 했지. 내가 때렸으면 장영인은 살아 있지도 못하겠지.”
“허세도 부리지 말아요. 이렇게 입술 다 터져 놓고는.”
“조감독이 내 팔을 안 잡았으면 한 대도 안 맞았을 거야.”
“지금 그런 말이 나와요?”
이나가 조금 흥분해서 말했다.
그녀의 눈빛을 본 재혁은 그녀가 정말 사랑스럽다는 듯 웃을 수밖에 없었다.
이나는 진심으로 그를 걱정하고 있었다.
“걱정하지 마. 안 죽어.”
“누가 죽을 걱정 해요? 내일도 촬영인데, 얼굴에 상처 났으니까 그렇지. 장영인 그놈은 왜 하필 얼굴을 때려서…. 속상해.”
이나는 면봉에 소독약을 묻혀 그의 왼쪽 입술에 난 상처를 두드렸다.
주황빛 석양이 사선으로 비쳐, 두 사람의 그림자가 길게 드리웠다.
재혁은 자신의 얼굴 속으로 빨려 들어올 듯 가까이 서 있는 이나의 두 눈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눈가에 맺힌 습기 때문인지, 그녀의 두 눈은 유난히 반짝이고 있었다.
“속눈썹이 기네.”
“이제 알았어요?”
이나가 무심하게 대답했다.
“눈동자가 유난히 크고. 색은 연갈색이구나. 피부는 눈처럼 하얘. 한 번도 햇빛을 보지 않은 사람 같아.”
“….”
재혁이 치료를 하고 있던 이나의 손을 슬며시 잡았다.
눈빛을 통해 사랑의 언어들이 쏟아져 왔다.
들리지도 보이지도 않지만 느낄 수 있는 말들이었다.
무안함에 이나가 그의 손길을 뿌리치려 했다.
“아직, 치료 안 끝났어요.”
하지만 이나의 손에는 아무런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그의 시선을 애써 외면하려 했지만, 자석에 이끌린 듯 그녀의 시선은 재혁의 시선에 맞닿았다.
그 눈빛과 마주한 순간, 이나는 늪에 빠진 것처럼 움직일 수가 없었다.
마른침이 무겁게 목 뒤로 넘어갔다.
재혁의 욕망이 이나의 마음에 스며들었다.
“몸은 어떻게 이렇게 작고 예쁜지. 손에서 놓을 수가 없어.”
재혁은 치료를 위해 허리를 굽히고 있던 이나를 당겨 무릎 위에 앉혔다.
엇 하는 순간에 그녀는 재혁의 품에 안겨 있었다.
“밖에 비서들 있어요.”
하지만 그렇다고 벗어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이나의 몸을 번쩍 들더니 마주 보는 자세로 그녀를 무릎 위에 올렸다.
“엄맛!”
재혁은 인형을 다루듯 이나의 몸을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는 남자였다.
“그리고 어쩜 이렇게 이쁜지. 매일 봐도 질리지 않아.”
“대…. 대표님.”
재혁의 손끝이 이나의 치마허리에 걸렸다.
“내가 매일 이런 거만 원한다고 생각하겠지?”
“….”
“근데 맞아. 넌 나를 매번 참을 수 없게 해.”
“제발 정신 좀….”
“내 어깨 위에 팔꿈치를 올려.”
명령조의 말이었다.
이나가 팔을 어깨 위에 올리자, 그는 얼굴을 이나의 가슴에 파묻었다.
그녀는 찬을 품에 안듯 그의 머리를 두 팔로 안아 주었다.
“쓰읍…. 후….”
점점 거칠어지는 그의 숨결이, 뜨거운 바람이 되어 그녀의 가슴을 적셔 왔다.
몸이 뜨거워지며, 부풀어 오른 재혁의 몸이 아래에서 느껴졌다.
“도저히 참을 수가 없군.”
“….”
스스로 자제하지 못하고 본능에 무너져 버린 그 눈빛에, 이나 역시 무너져 버렸다.
이나는 고개를 숙여 그의 입술을 들이마셨다.
허리춤을 맴돌던 그의 손가락이 지퍼 사이로 파고들었다.
몸이 붕 떴고, 빙글 돌더니 어느덧 재혁이 그녀의 몸 위에 올라와 있었다.
회사에서 벌어지는 아슬아슬한 일탈의 쾌감이 온몸에 젖어 들고 있었다.
***
그날 영인의 돌발 행동은 배역에 몰입하는 배우들이 가끔 보이는 이상 행동쯤으로 여겨졌다.
드라마에는 이나와 재혁의 키스 장면이 방영되었고, 결과는 대박이었다.
그 장면을 기점으로 치솟기 시작한 시청률이 10화에 이르러서는 5%대까지 치솟았다.
동시간대 최고 시청률은 물론, 근래에 방영된 드라마 중에서도 최고 시청률이어서 언론의 관심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그중 언론의 관심을 받은 것은 두 주인공이 아닌 재혁과 이나였다.
두 사람은 배역의 이름인 인하의 인과 기영의 기자를 따서 인기 커플로 불리었다.
이제 후반기로 접어든 드라마 촬영.
드라마의 인기를 증명이라도 하듯, 호텔 입구는 새벽부터 두 사람을 기다리는 팬들로 북새통을 이루었다.
“홍보 하나는 확실하게 성공한 거 같네.”
집무실에서 입구를 내려다보며 유리가 혼잣말했다.
유리는 예상보다 큰 성공이 마냥 달갑지만은 않았다.
이나의 존재감이 점점 커질수록, 유리가 느끼는 질투심의 크기 역시 커지고 있었다.
때마침 재혁의 차가 나타나자, 입구를 지키던 팬들이 구름처럼 재혁의 차를 감쌌다.
그 모습이 마치 바닥에 떨어진 사탕으로 몰려드는 개미들 같다고 유리는 생각했다.
이런 일이 일상이 된 경호원들이 호텔 입구에 펜스를 치기 시작했다.
멈춘 차 안에서 재혁이 나오자, 사람들의 함성에 12층인 집무실 유리창까지 작은 진동이 느껴졌다.
차에서 내린 재혁은 갑작스러운 인기가 어색하지 않은 듯 자연스럽게 호텔 안으로 들어갔다.
유리는 그의 그런 여유가 탐이 났다.
모두가 갖고 싶어 하지만, 아무나 가질 수 없는 남자.
그녀가 선택한 현준과는 차원이 다른 남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이나와 재혁의 키스 장면을 계속해서 돌려 보았다.
보면 볼수록 그녀의 질투심은 커져만 갔다.
그가 자신과 입을 맞출 때, 저런 표정을 지은 적이 단 한 번도 없었으니까.
그녀는 며칠 동안 재혁을 되찾기 위한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그리고 이제 곧 그 계획을 실행할 수 있게 되었다.
사라지는 재혁을 바라보며 유리가 혼잣말을 했다.
“이제 다시 돌아와야지. 오빠.”
***
강 회장이 공항을 빠져나왔다.
마중 나오는 사람 하나 없는 은밀한 방문이었다.
오늘은 그의 생일이었고, 저녁에는 서울에서 축하 파티가 있었지만 그런 것은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부산에 다시 방문한 것은 다름 아닌 찬을 보기 위함이었다.
강 회장은 어젯밤 보았던 친자검사 결과표를 떠올렸다.
찬이가 재혁의 아들일 확률 99.99%.
그는 충격에 한동안 말을 잃고 앉아 있었다.
손주도 이 사실을 알고 있었을까?
그간 재혁이 보인 행동으로 봐서는 모르고 있는 것이 분명해 보였다.
만약 알고 있었다면 숨기지 않았을 테니까.
그는 은밀히 사람을 불러 재혁과 이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보게 했다. 더불어 이나의 모든 것을 알아오라고 지시했다.
취미, 취향, 집안사정 알아낼 수 있는 것이면 무엇이든.
계속 손자의 뒤를 캐는 것 같아 찜찜했지만, 이것저것 따질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었다.
강 회장은 날이 밝자마자 만사를 제쳐 두고 부산으로 날아왔다.
어떤 아이인지 실제 두 눈으로 확인해 보고 싶었다.
자신과 죽은 아들과 사랑하는 손주의 피를 이어받은 아이를 말이다….
차에 올라타자마자 강 회장이 나지막이 말했다.
“출발해.”
강 회장을 태운 차가 공항을 빠르게 빠져나갔다.
그의 옆자리에는 찬에게 주기 위해 사 온 커다란 선물 바구니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
“후원 때문에 오셨다고요?”
“네. 복지 사업에 관심이 많으셔서요.”
책상 위로 내민 액수에 어린이집 원장은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회장님께서 시설을 좀 둘러보고 싶으시다는데, 가능하겠습니까?”
“네! 물론입니다! 이쪽으로.”
함께 대동한 비서 옆에 아무 말 없이 앉아 있던 강 회장은 원장을 따라 나갔다.
“이렇게 한 선생님당 다섯 아이를 돌보고 있구요. 나이별로….”
원장 선생님의 말은 강회장의 귀에 한마디도 들어가지 않았다.
그의 두 눈은 빠르게 움직이며 찬의 모습을 찾고 있었다.
그리고, 한 아이가 그의 눈에 들어왔다.
멈칫.
“그래서 총 세 개 반으로 운영 중이구요. 시간대별로 하면 원생은….”
강 회장이 자리에 멈추자, 원장 선생님은 의아해하며 말을 멈췄다.
떨리는 눈빛에, 강 회장은 금방이라도 주저앉을 듯 위태롭게 서 있었다.
“저…. 괜찮으세요?”
원장 선생님이 걱정스레 묻는데, 찬이가 문밖으로 나왔다.
“원장님!”
찬은 반갑게 원장님을 부르고는 옆을 돌아보았다.
백발이 성성한, 꼭 산타클로스처럼 생긴 할아버지가 자신을 바라보자 찬이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물었다.
“할아버지, 누구예요?”
찬의 순수한 눈망울에 강 회장은 마음속에서 무언가가 울컥했다.
그 눈빛은 그의 손자 재혁의 어렸을 때와 너무나 닮아 있었다.
강 회장이 찬이 앞에 눈높이를 맞추며 허리를 굽혔다.
“너. 이름이 뭐냐?”
“찬이요! 정찬!”
“찬…. 참 똘똘하게 생겼구나.”
“그런 얘기 많이 들어요!”
“그런 얘기를 많이 듣는다고? 이 녀석, 지 아빠 닮아서 당차기까지 하구나! 허허.”
“우리 아빠 없는데.”
찬의 말에 강 회장은 아차 싶었다.
“아빠가 없어…?”
“네! 우리 아빠는 하늘나라 갔어요!”
“….”
찬의 해맑음이 강 회장의 마음을 더욱 무겁게 했다.
이 어린 것이, 아빠 없이 자라느라 얼마나 힘들었을까….
한편으로는 모난 곳 없이 씩씩하게 자란 찬이가 대견스럽고 고마웠다.
강 회장은 찬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찬이가 씩씩하구나.”
“네! 그런데 할아버지는 누구세요? 아까 물어봤는데, 왜 대답 안 해 줘요?”
찬이가 무례하게 구는 것 같자 원장 선생님이 찬이를 말리려 했다.
“찬아, 어른들께는 공손하게 대해야 한다고 했죠?”
그러자 강 회장이 괜찮다는 듯 손짓했다.
그 모습을 본 비서가 원장 선생님에게 말했다.
“괜찮습니다. 회장님께서는 아이들을 특별히 좋아하십니다.”
강 회장은 잠시 고민하다가 슬픈 눈을 하고 말했다.
“나는 말이다. 산타 할아버지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