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 키스 신
모든 카메라가 두 사람을 촬영하는 가운데, 하늘에서 별 가루가 반짝이며 떨어졌다.
뿌연 연기 속에, 로맨스 판타지 속 여주인공이 입을 만한 드레스를 입은 이나가 턱시도를 멋들어지게 차려입은 재혁의 앞에 서 있었다.
재혁은 이나의 허리에 손을 올린 채로, 그윽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카리스. 당신을 사랑하오.”
“저두요.”
서로를 향한 애절한 사랑을 확인하며 입술이 가까워지는 그때.
떨어지던 별 가루들이 갑자기 빗방울로 변했다.
이나가 무슨 일이지 싶어 주변을 둘러보자, 어느 사이 재혁의 얼굴이 영인의 얼굴로 변해 있었다.
“!!”
“넌 도망 못 가, 정이나!”
끔찍한 대사와 함께 커다란 영인의 입술이 그녀의 입술을 덮쳐 왔다.
이나는 그 입술에서 벗어나려 했지만, 크고 어두운 입술은 집요하게 이나를 놓아주지 않았다.
“안돼! 안돼!”
커다란 입술에 그녀가 잠식당하려던 그때, 이나는 어김없이 잠에서 깨어났다.
“헉-헉-”
영인과의 키스 신이 예고된 다음 날부터, 이나는 며칠째 이 끔찍한 꿈에 시달리고 있었다.
“아….”
얼마나 끔찍했는지, 이나의 온몸이 식은땀으로 젖어 있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자마자 오늘 오후의 촬영 스케줄이 그녀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녀는 꿈보다 끔찍한 현실에서 도망치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오늘은 바로 영인과의 키스 신이 있는 날이었다.
***
“자, 장면 설명하겠습니다. 장소는 호텔 앞이구요. 상황은 영준이 인하에게 이별 통보를 받은 다음 날입니다. 기영의 차 안에서 인하가 내립니다. 지나가던 영준이 그 모습을 보고 분개하고요. 기영이 인하를 에스코트해서 안으로 들어갈 때, 영준이 달려가 인하의 팔을 붙잡고 강렬하게 키스하는 겁니다.”
조감독의 설명이 이어지는 동안, 이나는 집중이 안 되는지 멍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자, 다들 이해하셨죠?”
설명이 끝나자 영인이 질문했다.
“앵글은요?”
“키스 신이니까 당연히 클로즈업으로 갈 거예요.”
“클로즈업이요?”
당황한 이나가 물어보자, 조감독은 당연하다는 듯 대답했다.
“네, 아무래도 이별 전 마지막 키스 신이니까, 강렬한 한 방이 되어야 하니까요. 더 질문 없으시죠?”
이나가 개미가 기어가는 듯 작은 목소리로 질문했다.
“정말, 키스하나요?”
예상 못 한 질문이었는지 잠시 당황한 조감독은 뭘 그런 것을 물어보냐는 듯 말했다.
“연기로는 하셔야죠.”
“네.”
“그럼 10분 후에 슛 들어갑니다.”
조감독이 촬영 준비를 위해 떠나고 이나와 재혁, 그리고 영인 세 사람만 남게 되었다.
어색함이 맴도는 가운데 영인이 말했다.
“그럼 잘해 보자.”
“….”
“대답은 좀 해 주지?”
“후.”
이나는 대답 없이 깊은 한숨을 쉬고 옆쪽 간이 의자에 앉았다.
영인은 고개를 돌려 재혁에게 물었다.
“걱정되시겠네요?”
“뭐가 말입니까?”
“소문 들었습니다. 두 분, 만나신다고.”
도발적인 말에 재혁의 한쪽 눈썹이 미세하게 위로 휘어 올라갔다.
“그래서요?”
“그래서, 걱정되실 거 같네요. 연인이 다른 남자랑 키스해야 하니까.”
“일은 일일 뿐이죠.”
“가끔 아닐 때도 있더군요.”
“지금 나랑 뭐 하자는 겁니까?”
“안심하시라고 말씀드리는 겁니다. 저는 일로만 보고 있거든요. 그럼.”
영인은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돌아섰다.
등 뒤로 쏟아지는 재혁의 날카로운 시선이 그의 마음속 우월감을 돋우었다.
영인은 모르고 있었다.
지금 자신의 행동이, 억누르고 있던 재혁의 마음에 폭탄을 투하했다는 사실을….
***
촬영이 시작하기 직전, 유리가 촬영장에 도착했다.
그녀는 자신이 도착했다는 사실을 알리지 않고 조금 떨어진 곳에서 바라보았다.
“자, 슛 들어갑니다!”
차창 너머로 조감독의 외침이 들려 왔다.
“괜찮아요?”
영인과 대화한 이후부터 재혁의 행동은 뭔가 이상해 보였다.
꼭 무언가 꾸미고 있는 것처럼 보인달까?
“응. 괜찮아.”
“제8화 신 넘버 48. 테이크 원. 레디! 슛.”
조감독의 싸인 때문에 이나는 더 이상 묻지 못했다.
멈췄던 차가 움직이기 시작하자 두 사람은 금세 표정을 바꾸었다.
천천히 움직인 차가 호텔 입구에 진입하자, 그 옆으로 카메라가 따라붙었다.
차 문이 열리자 이나는 행복한 여자를 연기하며 차에서 내렸다.
재혁은 잠시 앞을 보고 앉아 있다가, 무언가 결심한 듯한 표정을 하고 이나의 뒤를 따라 내렸다.
이나가 그에게 팔짱을 꼈다.
이나는 사랑에 빠진 표정으로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가지.”
두 사람이 나란히 걸어갈 때, 영인의 외침이 들렸다.
“강인하!”
화면 안으로 들어온 영인이 거칠게 다가와 이나의 팔을 잡아당겼다.
돈이 없어 여자를 빼앗긴 남자의 울분이 영인에게서 쏟아져 나왔다.
이 키스는, 가난한 그가 연인을 빼앗은 남자에게 할 수 있는 유일한 복수였다.
몸이 돌아가는 순간, 이나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그의 다른 한쪽 손이 이나의 볼을 감싸 쥐며 입술이 다가오려는 순간.
박 감독의 컷 싸인이 들렸다.
“정이나 씨! 눈 감으면 어떡해! 다시 갑시다.”
“후.”
이나의 입에서 깊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영인은 그녀를 향해 비릿하게 웃으며 말했다.
“긴장 풀어.”
이나는 풀이 죽어서 자리에 서있었다.
“자 빨리 자리로 가주세요!”
조 감독의 싸인에 이나가 걸어가는데, 뒤에서 다가온 재혁이 그녀만 들릴 수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따 잡아당기면 믿고 따라와.”
이나가 뭐라 묻기도 전에 그가 멀어졌다.
다시 촬영이 이어졌다.
이나는 차에서 내리며 마음을 다잡았다.
“일이다. 이나야. 이건 일일 뿐이야.”
재혁이 따라 내리고 두 사람이 팔짱을 끼고 걸어가는데 영인이 화면안으로 들어왔다.
다짜고짜 다가온 그는 이나의 팔을 잡아 당겨 키스하려 했다.
그런데 그때, 재혁이 돌아간 이나의 팔을 잡아당겼다.
“?!”
그녀의 몸이 뒤로 기울며 재혁의 한쪽 팔에 안겼고, 재혁이 그대로 몸을 빙글 돌리자 목표를 잃은 영인은 그대로 앞으로 허우적거리다 멈춰 섰다.
갑작스러운 재혁의 애드리브에 배우들 뿐 아니라 스태프들당황했다.
모니터를 유심히 바라보던 박 감독이 컷 싸인을 보내려는데, 재혁이 연기를 이어나갔다.
“이 남자인가? 너의 남자 친구였던 사람이?”
“네.”
이나가 연기를 받자 보고 있던 박 감독이 조감독을 막았다.
“야! 한번 보자.”
재혁은 이나를 감싸고 있던 손을 풀고 영인을 향해 한 발 다가갔다.
“한번 확인시켜 줘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잘됐네.”
영인은 프로답게 두 사람의 연기를 받았다.
“인하는 당신을 사랑하지 않아.”
대본에는 없는 즉흥적인 대사로 두 사람은 연기하고 있었다.
“왜 그렇게 생각하지?”
“그녀가 사랑하는 건, 당신이 아닌 당신의 돈이야.”
“역겹군.”
“뭐?”
“가난이 왜 비참한 줄 아나? 가난한 사람들은 모든 걸 가난 탓으로 돌리지. 인하가 너 대신 날 택한 이유는, 도저히 눈 뜨고는 봐 줄 수 없는 너의 그 열등감 때문이야.”
“헛소리하지 마! 넌 그저 남의 여자를 빼앗아 간 비열한 놈일 뿐이야!”
이나가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었다.
“그만해! 돌아가, 장영준.”
“인하야, 정신 차려!”
“정신은 너나 차려!”
영인을 노려보던 재혁이 코웃음을 치더니 말했다.
“잘 봐. 이 여자가 누구 여자인지.”
말이 끝남과 동시에 재혁이 이나를 잡아당겨 키스했다.
“….”
이나는 지금, 이 연기가 혼란스러웠다.
연기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격렬한 키스였다.
팔과 어깨를 잡은 재혁의 손이 점점 뜨거워졌다.
내려가 있던 이나의 손이 조금씩 올라가 재혁의 등 뒤에 놓였다.
배우를 꿈꿀 때 한 번쯤 생각하던 모습이었다.
드라마의 등장인물이 되어, 카메라에 둘러싸여 정말 사랑하는 사람과 키스하는 장면.
그렇게 연기인지 진짜인지 모를 키스가 이어질 때, 박 감독의 컷 사인이 떨어졌다.
“컷!”
컷 사인이 떨어졌음에도 이나와 재혁은 키스를 멈추지 않았다.
“커…. 컷!”
박 감독이 다시 한번 컷을 외치자, 재혁의 입술이 슬그머니 이나의 입술에서 떨어졌다.
심장이 터질 듯 뛰고 있는데, 재혁이 이나에게만 들릴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기억해. 네가 누구 여자인지 말이야.”
그사이, 박 감독과 조감독은 방금 장면에 대해 이야기 나누고 있었다.
“어떠냐?”
“좋은데요? 기영 캐릭터가 더 사는 거 같구요.”
“이게. 그런데 말이야, 이러면 기영만 너무 멋있게 나오는 거 아닌가?”
“아무래도 주인공은 영준이니까 죽는 감이 없지 않아 있죠.”
“흠…. 그렇다고 버리기는 아까운데….”
“감대로 가시죠.”
“감이라….”
잠시 고민하던 박 감독은 결심했는지 자리에서 일어나 메가폰을 잡았다.
“세 사람. 방금 애드리브 좋았어요. 장면 방금처럼 한 번만 더 가 봅시다.”
“네?!”
이나가 놀라 물었고, 영인은 인상을 찡그렸다.
“기영 캐릭터가 살아서 좋네. 그런데 장영인 씨, 영준 캐릭터가 너무 죽는 거 같네. 키스하는 모습을 지켜보다가 주먹을 날리는 건 어떨까?”
영인이 재혁을 노려보며 말했다.
“네, 그렇게 해 보죠.”
“진짜 치지는 말고, 리얼한 느낌만 살리면 되니까. 자, 그럼 다시 가 봅시다. 준비하세요.”
박 감독의 말에 스태프들이 분주하게 흩어졌다.
영인 역시 자리로 돌아가며 재혁의 옆을 지나갔다.
어깨가 스칠 때, 영인이 그의 옆에 멈춰 섰다.
“제법 그럴듯한 발상이네요. 흥미로웠습니다.”
“장영인 씨도 잘 따라서 오는 걸 보니 배우긴 하군요.”
잘 따라온다는 말에 영인의 표정이 굳어졌다.
“연기할 때는 진심으로 하는 편인데, 괜찮으시겠어요?”
“그러시던지 진심을 다한다고 문제가 생기지는 않을 거 같은데 말이죠.”
“….”
“자, 슛 들어갑니다!!”
멀리서 들리는 조감독의 외침에 영인은 말없이 돌아섰다.
이나와 재혁은 다시 차에 올랐다.
문이 닫히자마자 이나가 재혁에게 말했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런 거예요?”
“프로잖아. 조금 더 좋은 작품을 위해 그런 것뿐이야.”
“아까 한 말은 뭐고?”
“내가 한 말이 아니라 기영이 한 말이고 집중해.”
“….”
“혹시 진짜로 착각한거야?”
“아니거든요.”
“그런데 얼굴은 왜 빨개지지?”
“내가요? 전혀요.”
다급하게 고개를 돌리는 이나가 귀여워, 재혁은 하마터면 그녀의 얼굴에 손을 뻗을 뻔했다.
그사이 조감독의 슛 사인이 떨어졌다.
“제8화 신 넘버 48. 테이크 투. 레디! 슛.”
아까와 같이 차가 호텔 앞에 멈춰 서자 이나와 재혁이 내렸다.
두 사람이 팔짱을 끼고 호텔 안으로 들어갈 때, 뒤에서 달려오는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이나와 재혁이 달려오는 영인을 향해 뒤돌아서는데, 영인이 다짜고짜 재혁을 향해 주먹을 휘둘렀다.
영인의 주먹이 재혁의 턱 끝을 스치고 지나갔다.
갑작스러운 영인의 행동에 모두가 놀랐지만, 컷 사인은 떨어지지 않았다.
두 남자의 시선이 허공에 부딪혔다.
한 여자를 사이에 둔, 두 수컷의 기 싸움.
영인이 입을 열었다.
“이 여자는 내 여자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