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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 화해 (56/72)

56. 화해

“아. 모르겠네. 대체 모르겠어. 정이나, 뭐가 문제지? 연기는 나름 괜찮은데.”

고개를 갸웃하는 박 감독의 말에 조감독이 맞장구를 쳤다.

“이미지가 좀 순하긴 하죠?”

“뭔가, 조금만 바뀌면 확 터질 거 같긴 한데 말이야.”

“메이크업을 좀 강하게 해 보면 어떨까요?”

“그래, 그것도 해 보고. 의상팀한테 좀 쎈 이미지로 옷 좀 챙겨 보라고 해.”

“네, 알겠습니다.”

두 사람의 대화가 한창일 때, 이나와 재혁이 촬영장에 나타났다.

이나는 지영의 스타일로 꾸며 낸 화려한 옷차림이 어색해 자꾸 주변이 신경 쓰였다.

‘부담스러워.’

촬영장을 가로지르며 이나를 향한 스태프들의 웅성거림이 들렸다.

“우와. 대박. 완전 딴사람처럼 보인다.”

“그르게? 저거 아르메인 아니야?”

촬영장 구석에 앉아 있던 영인은180도 바뀐 이나의 모습에 눈을 떼지 못했다.

“….”

이나는 스태프들 한 명 한 명에게 공손히 인사하며 들어오다가 영인과 눈이 마주쳤다.

이나의 얼굴에서 미소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영인은 얼굴을 붉히며 재빠르게 이나의 시선을 피했다.

마음이 울렁거렸다. 마치, 짝사랑하는 여자를 본 것처럼 말이다.

슬며시 다시 바라본 이나는 눈이 부시게 아름다웠다. 

“정이나 아니야?”

박 감독이 이나를 발견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평소와 달라진 이나의 모습이 그에게 어떤 영감을 불러일으킨 듯 보였다.

박 감독은 뭐에 홀린 듯 이나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정이나 씨. 대표님도 오셨네요.”

“안녕하십니까.”

“이나 씨, 오늘 의상이… 꽤 값이 나가 보이네요?”

박 감독이 말끝을 흐리자 이나는 덜컥 겁이 났다.

역시 안 어울리는구나 싶어 재빠르게 변명을 늘어놓으려 했다.

“그게, 이렇게 입고 촬영할 거는 아니구요. 제가 조금.”

“아니, 느낌이 아주 좋은데? 뭐랄까. 진짜 나쁜 년? 같아 보여. 일부러 준비한 거야?”

“네.”

“오늘 이렇게 입고 촬영해 봅시다.”

“이렇게요?”

“준비 중이니까 대본 좀 보고 있어요. 어제처럼 굳어 있지 말고.”

“네. 감사합니다.”

그녀는 가볍게 감사의 말을 하고 구석 빈 의자에 앉았다.

“자자, 슛 들어갑니다. 장영인 배우님 준비해 주세요~.”

조감독의 콜 사인에 영인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시선은 여전히 이나에게 고정된 채였다.

이나는 그의 부담스러운 시선을 애써 무시하며 고개를 돌렸다.

“어때?”

재혁이 물었다.

“네?”

“긴장되나?”

“조금요.”

“자.”

재혁이 손을 내밀었다.

뭐예요? 라는 듯한 이나의 표정에 재혁은 빨리 받으라는 듯 손짓했다.

이나가 손을 펴자, 그 위에 막대 사탕 하나가 올려졌다.

“긴장 풀라고.”

“웬 사탕? 무슨 요술 상자예요?”

“맞아. 원하는 게 있으면 말만 해.”

평소답지 않은 재혁의 농담에, 이나는 피식 미소를 지었다.

사탕을 입에 넣자 새콤달콤한 맛이 입 안 가득 퍼져 나갔다.

딸기 맛 사탕이었다.

그녀를 생각하는 그의 마음이 입 안에 퍼져 마음을 따뜻하게 했다.

긴장이 풀어지며, 바짝 굳어 있던 어깨에 바람이 빠졌다.

조금은 편안한 마음으로 앉아 있는데, 새끼손가락 쪽에 재혁의 손이 느껴졌다.

돌아보니 재혁은 모른 척 딴청을 부리며 슬금슬금 이나의 손을 잡으려 했다.

이나가 가만히 있으니, 조금씩 다가오던 그의 손이 쑥- 이나의 손가락 사이로 들어왔다.

“사람들이 보면 어쩌려구요.”

이나가 다급하게 손을 빼려 하자, 재혁은 이나의 손을 꽉 잡더니 옆에 놓여 있던 담요를 들어 의자 사이에 놓아 손을 가렸다.

“이러면 됐지?”

당연히 됐을 리가 없다.

목소리를 높이면 누가 볼 수도 있다는 생각에 이나는 소리 없이 손을 빼려 했다.

하지만 재혁은 그녀를 놔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담요 안, 이나가 손가락을 빼려 꼼지락대면 재혁이 빠져나간 손가락을 다시 휘감았다.

아무도 모르는 밀고 당기기를 벌이고 있을 때, 멀리서 박 감독의 목소리가 들렸다.

“컷! 자, 바로 다음 신 갑시다.”

컷 사인이 나자 조감독이 이나에게 달려왔다.

“바로 들어갈게요. 준비해 주세요.”

“네?!”

재혁과의 손가락 숨바꼭질에 정신이 팔렸던 이나는 조감독의 목소리에 깜짝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나의 격한 반응에 오히려 놀란 쪽은 조감독이었다

“뭐 문제 있으세요?”

“아니요. 없습니다. 준비하죠.”

재혁은 모른 척 딴청을 부리다가 이나 대신 대답했다.

재혁의 대답에 조감독은 고개를 갸웃하며 돌아갔다.

이나는 재혁을 새침하게 노려보고 촬영장으로 걸어갔다.

촬영장에는 영인이 그녀를 바라보며 서 있었다.

이나가 다가오자, 긴장을 풀어 주려는 듯 말을 건넸다.

“오늘 좀 다르네?”

이나는 대꾸하지 않았지만, 영인은 별 상관없어 보였다.

“자, 신 넘버 21. 레디. 액션!”

슛 사인에 이나가 카메라 프레임 안으로 들어왔다.

그녀는 화가 난 표정으로 복도를 걸어갔다.

그 옆을 트랙 위의 카메라가 따라갈 때, 뒤에서 달려오는 영인의 모습이 카메라에 잡혔다.

“인하야!”

달려온 영인이 이나의 팔을 낚아채자, 이나는 신경질적으로 그의 손길을 뿌리쳤다.

“놔!”

“대체 왜 그래?”

“몰라.”

“그냥 물어본 거일 수도 있잖아.”

그때, 이나가 카메라를 향해 휙! 돌아섰다.

“이 옷을 어디서 샀는지 물어보는 게 그냥 물어보는 거니?”

어제와 같은 연기였지만, 그녀의 모습은 조금 더 표독스러워 보였다.

나비를 꿈꾸는 나방처럼 그녀의 눈빛에는 더 나은 삶에 대한 강렬한 욕망이 엿보였다.

모니터로 그 모습을 확인하던 박 감독이 나지막하게 감탄사를 내뱉었다.

“좋아…. 이거였어!”

이나의 연기가 이어졌다.

“무시하는 거야! 알어? 네가 무슨 돈이 있어서 이런 옷을 살 수 있느냐고 무시하는 거라고!”

“그래도.”

“됐어. 너나 가서 실실거려. 나는 이런 삶 질려 버렸으니까.”

이나가 휙 돌아 걸어가자 카메라가 멀어지는 그녀의 뒷모습을 한 화면으로 계속 잡았다.

이나가 복도 끝으로 사라지자마자 박 감독의 만족스러운 컷 사인이 떨어졌다.

“카트! 아, 좋아. 정이나 씨, 아주 좋았어. 이렇게 할 수 있는데 여태까지 왜 그랬던 거야?”

“감사합니다.”

“역시 옷이 날개네, 훨씬 표독스러워졌어. 옷, 정이나 씨 아이디어야?”

이나의 말에 멈칫한 이나는 촬영장 입구 쪽에서 구경하고 있던 지영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박 감독의 물음에 대답했다.

“아니요. 제 동료 아이디어예요.”

이나는 어쩐지 지영의 눈빛이 흔들렸다고 생각했다.

***

촬영이 끝나자, 지영이 이나에게 다가왔다.

“저, 팀장님, 잠깐 얘기 좀 해요.”

이나가 괜찮냐며 재혁을 돌아보자, 재혁이 갔다 오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사람이 별로 없는 계단 복도로 향했다.

어두운 복도에 도착해 마주 서자, 지영은 막상 우물쭈물 말을 꺼내지 못했다.

“뭐 할 말 있어요?”

이나의 질문에 지영은 한숨을 푹 내쉬고 입을 열었다.

“죄송해요.”

갑작스러운 사과에 이나가 의아하다는 듯 보자, 그녀는 자존심이 상하는지 고개를 푹 숙이며 말을 이었다.

“본사에서 심술부렸던 거, 죄송하다고요.”

“갑자기 왜 사과하죠?”

“솔직히, 며칠 일해 보니까 제가 좀 심했던 거 같았어요.”

“그래요? 다른 사람들 말로는 지영 씨가 계속 내 얘기 했다던데요?”

“누가 그래요?”

“누구한테 말했는데요?”

“솔직히, 자존심 상하잖아요. 내가 선배였는데…. 이렇게 되어 버렸으니까.”

“그건 사과 안 할 거예요?”

“그것도… 죄송해요.”

“앞으로 안 할 거고?”

“많이는 안 했어요!”

버럭버럭했던 지영은, 이나가 어깨를 으쓱하자 다시 고개를 숙였다.

“죄송해요. 앞으로는 안 그럴게요.”

“진심으로?”

“네. 진심으로.”

“좋아요. 사과 받아 줄게요. 나도 하고 싶은 말 있는데.”

“뭔데요?”

“오늘, 지영 씨 덕분에 무사히 촬영 잘했어요. 고마워요.”

“아까 동료라고 한 거는.”

“나도 진심이에요.”

“….”

이나의 진심 어린 말에 지영의 눈시울이 붉어지더니 굵은 눈물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흑흑. 사실 부러워서 그랬어요. 다들 팀장님을 좋아하니까, 그게 부러워서….”

“왜 울어요. 울지 마요.”

이나는 두 팔로 지영을 안아 등을 토닥여 주었다.

두 사람 사이 오래도록 쌓여 있던 불화의 눈이 녹고 있었다.

***

커다란 TV 화면에서 이나의 모습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어두운 방 안, 화면을 응시하고 있는 사람은 강 회장이었다.

“이 옷을 어디서 샀는지 물어보는 게 그냥 물어보는 거니?”

실제 악녀처럼 느껴지는 이나의 연기를 보며 강 회장의 얼굴에는 아쉬움이 스치고 지나갔다.

‘회장님! 회장님!’

심장 마비로 쓰러졌던 날. 이나의 신속한 대응이 아니었다면 그토록 바라던 손주의 TV 출연조차 보지 못하고 세상을 등졌을지도 모른다.

그날 병원에서 대화를 나누며 침울하게 앉아 있던 이나의 얼굴이 떠올랐다.

“제 어미와 쏙 빼닮은 여자를 골랐어….”

강 회장의 허탈한 말이 허공으로 흩어졌다.

그토록 반대했던 아들의 결혼, 하지만 아들은 결국 결혼했고, 살아생전 누구보다 행복하게 살았다.

아들이 죽고 나서 끝까지 두 사람을 인정해 주지 못했던 자신이 한심스러웠다.

강 회장은 그때의 실수를 다시 반복하는 건 아닌지 두려움에 빠져 있었다.

화면 속 이나가 복도 저편으로 멀어지고 있었다.

강 회장은 손에 들고 있던 사진을 다시 한번 바라보았다.

어둠 속 희미하게 보이는 사진은 바로 찬의 사진이었다.

이나를 본 후, 아쉬운 마음에 이나의 뒷조사를 했다. 

찬의 사진을 처음 받아 든 강 회장은 다시 한번 심장 마비가 올 뻔했다.

강 회장이 뒤쪽에 겹쳐 있던 사진을 옆으로 밀어내자, 두 장의 사진이 나란히 보였다.

하나는 찬의 사진, 그리고 다른 하나는 어릴 적 재혁의 사진이었다.

사진 속, 너무나 닮아 있는 두 아이를 보며 강 회장은 심경이 복잡해졌다.

모른 척하기에, 찬이라는 아이는 재혁을 너무나 닮아 있었다.

그는 고민했다.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는 걸까?

하지만 만에 하나라도, 그 아이가 재혁의 아들이라면?

길고 긴 고민의 시간이 지났고, 강 회장은 전화기를 들었다.

“네, 회장님.”

“친자 검사 진행해 봐. 재혁이랑 정이나 몰래.”

“네. 알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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