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 명품 같은 남자
이나와 찬이 그리고 엄마 세 사람은 티브이 앞에 모여 앉았다. 오늘은 대망의 첫방이 있는 날이었다.
이나는 긴장한 듯 표정이 굳어 있었다. 광고가 끝나고 오프닝 화면에 이나가 나오자 찬이가 소리쳤다.
“엄마다!”
“어머 완전 연예인이네. 연예인이야.”
화면 속 자신의 모습에 이나는 가슴이 벅차올랐다. 이 모든 것이 사라지는 꿈처럼 느껴졌다.
그때 재혁에게 문자가 왔다.
[데뷔 축하해, 정이나 배우.]
배우라는 재혁의 말이 왜 이리도 감격스러운 걸까. 눈물이 차올라 시야가 흐려졌다.
그녀는 눈물을 닦고는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재혁에게 답장했다.
[고마워요.]
***
“컷!”
박 감독의 짜증 섞인 컷 소리에 촬영장 분위기는 또다시 얼어붙었다.
“정이나 씨! 스케이트 타러 왔어? 왜 이렇게 얼어 있어?! 어?”
“죄송합니다.”
“악녀잖아! 악녀! 연기를 이딴 식으로 하니까 반응이 그런 거 아니야!”
“죄송합니다.”
“아씨, 못 해 먹겠네.”
박 감독은 들고 있던 대본을 책상에 탁! 하고 치더니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죄송합니다. 10분만 쉬었다 하겠습니다.”
이나는 모든 것이 자신의 잘못 같아 고개를 숙였다.
그들이 받아든 성적표는 시청률 1.5%. 황인혜라는 당대의 슈퍼스타를 캐스팅했음에도 처참하기 이를 때 없는 성적표였다.
게시판에 달린 댓글 중 가장 많은 분량을 차지하는 것은 이나에 대한 악플이었다.
박 감독이 우려한 대로 악플들은 대부분 배역과 이나의 이미지가 맞지 않는다는 내용이었다.
돌아서는 조감독이 이나를 향해 괜찮다며 손짓해 주었지만, 이나는 주눅 들 대로 주눅 들어 있었다.
모두가 자신을 향해 눈총을 보내는 기분이었다.
겉으로는 괜찮다고 하지만, 속으로는 연기를 못한다고 흉보고 있을 것이다.
“정이나. 주눅 들지 마. 처음에는 그런 거야.”
홀로 걸어가는 이나에게 영인이 다가왔다.
이나는 대꾸 없이 그를 지나쳐 촬영장 구석에 홀로 앉았다.
영인은 그녀를 따라갈까 하다가, 오히려 역효과만 날 것 같아서 혼자 두기로 했다.
“그러니까 네가 말하는 거는… 그러니까 네가 말하는 거는! 그러니까… 네가….”
홀로 주절대며 대사를 외우던 이나의 눈에 습기가 차올랐다.
이나는 누가 볼세라 재빠르게 눈물을 닦았다.
“그러니까 네가 말하는 거는….”
때마침 촬영장으로 들어오던 재혁은 구석에 앉아 있는 이나를 발견했다.
촬영이 없는 날, 이나를 응원하기 위해 잠시 들른 참이었다.
그는 멀리서 이나를 바라보다가 그녀의 자존심을 지켜 주기 위해 발걸음을 돌렸다.
이나에게는 참 가혹한 날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
“어제 정이나 나온 거 봤어요? 그러니까 네가 말하는 거는 그게 아니라는 거지!”
“오호호호.”
지영이 이나를 따라 하자, 화장을 고치던 김 대리가 박장대소했다.
“그만해. 화장 다 망가져.”
“뱁새가 참새 따라가려니까 가랑이가 찢어지지, 자기가 무슨 연기를 한다고, 어구.”
“왜. 그래도 연기는 잘하는 거 같던데?”
“대사만 잘 외우면 연기 잘하는 거야? 악녀 역할인데 너~무 순해 보이잖아. 눈도 동글동글해서. 딱 계약직처럼 생겨서.”
“그런가? 나는 괜찮던데.”
“어머, 김 대리님. 지금 편드는 거야? 그렇게 안 봤는데, 아부하는 스타일이구나? 하긴, 빨리 승진하려면 아부가 최고지.”
“지영 씨, 무슨 말을 그렇게 해? 내가 보기에는 괜찮다고 한 건데?”
“뭐, 그렇게 보신다면 할 말은 없는데, 너무 뻔하지 않아? 생각해 봐. 성공하고 싶은 가난한 여자가 그런 옷을 입겠어?”
“왜?”
“명품을 입어야지! 명품을~ 원래 없는 것들이 더 허세를 부리는 거라니까?”
온몸에 명품을 덕지덕지 두른 지영의 모습이 김 대리의 눈에 들어왔다.
“그… 그래.”
김 대리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대답하고는 화장실을 나갔다.
거울을 보고 화장을 고치던 지영은 밖으로 나간 김 대리의 뒤로 혼잣말을 했다.
“주제에 안목 있는 척은.”
화장을 다 고친 지영이 콧바람을 불며 화장실을 나서는데, 문 앞에 서있는 재혁의 모습이 보였다.
지영은 너무 놀란 나머지 “엄맛!”하고 소리 질렀다.
재혁은 화가 난 표정으로 지영을 노려보고 있었다.
지영은 찔리는 마음에 그에게 인사하고 지나가려 했다.
“안녕하세요.”
그녀가 재혁의 옆을 지나가려 할 때, 재혁이 그녀의 앞을 막았다.
지영은 자신도 모르게 침을 꼴깍 삼켰다.
“어쩐 일이세요?”
“장지영 씨, 화장실에서 한 얘기 다시 해 봐요.”
“….”
이나와 재혁이 사귀고 있는 것은 이미 본사에서 두 눈으로 목격까지 한 사실.
이나의 뒷이야기를 하다가 걸렸다는 생각을 하니 정신이 아찔했다.
“대… 대표님, 그게 아니라.”
“김 대리와 했던 얘기, 다시 해 보라는 겁니다.”
“제가 욕하고 싶어서 한 게 아니라요….”
날카롭게 쏟아지는 재혁의 눈빛에 지영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김 대리 이년이.’
속으로 방금 한 얘기를 일러바쳤을 김 대리를 욕하며 개미가 기어가는 듯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팀장님 연기가 어색하다고….”
“말고.”
“그… 참새가 뱁새….”
“말고. 그리고 뱁새가 황새 따라가다 가랑이 찢어진다 입니다.”
“네…. 그럼 가난한 여자일수록 명품에 집착한다고….”
“….”
“그게… 팀장님께서 그렇다는 게 아니라.”
할 때 재혁이 그녀의 말을 끊었다.
“장지영 씨, 명품에 관심 많습니까?”
“네? 조금.”
“그럼, 일 좀 하나 같이 합시다.”
***
재혁의 갑작스러운 호출에 이나가 호텔 앞으로 뛰어왔다.
호텔 입구에는 재혁의 차가 대기 중이었다.
이나는 급하게 차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무슨 일이세요?!”
차에 올라탄 이나는 앞좌석에 앉아 있는 지영을 보고 깜짝 놀랐다.
지영은 어색하게 인사했다.
“팀장님, 안녕하세요.”
“장지영 씨가 왜?”
재혁은 이나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 운전 기사에게 말했다.
“센텀시티로 가지.”
재혁의 입에서 부산시 최대 백화점 이름이 나오자, 이나가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저 대표님, 필요한 게 있으시면 제가 가서 구매해 오겠습니다.”
“내가 필요한 게 아닙니다. 정이나 씨가 필요한 거지. 오늘은 장지영 씨가 코디해 줄 겁니다.”
“네? 코디요?”
이나가 놀라 지영을 다시 돌아보자.
지영은 알 수 없는 표정을 하고 고개를 숙였다.
영문도 모르는 채 차가 백화점을 향해 출발했다.
재혁의 차가 VIP 주차 공간에 멈춰 서자 입구에서 백화점 관계자들이 헐레벌떡 뛰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VVIP를 뛰어넘는, 몇 안 되는 RVIP의 갑작스러운 등장에 백화점도 난리가 난 모양이었다.
“오랜만에 뵙겠습니다. 대표님.”
재혁이 내리자, 때마침 도착한 VIP팀 팀장이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재혁은 이런 상황이 익숙한 듯 가볍게 고개 숙여 인사하고는 매장 안으로 들어갔다.
이나와 지영은 헐레벌떡 재혁의 뒤를 쫓아갔다.
매장에 들어선 재혁은 명품관으로 진입했다.
그의 걷는 속도가 워낙 빨라서, 이나는 힘겹게 따라붙으며 말했다.
“여기는 왜 오신 거예요?”
“정이나 씨 줄 명품 사러.”
“제 옷이요? 됐어요. 왜 갑자기.”
“가난한 여자일수록 명품에 집착하는 법이니까.”
재혁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하며 성큼성큼 걸어 한 브랜드 삽에 들어갔다.
이나는 브랜드 간판을 보고 입구에 멈칫했다. 이나가 평소에 엄두조차 내지 못할 곳이었다.
매장 안에 들어온 재혁은 한 발 떨어져서 벽에 걸린 옷들을 살펴보았다.
이나는 다소곳하게 인사하는 명품 샵 직원을 지나쳐 재혁에게 다가갔다.
“대표님, 무슨 말씀인지는 알겠는데, 직접 살 필요는 없어요. 제작진한테 얘기해서.”
“아니. 소품으로는 부족해. 이나가 실제로 그렇게 살아야지. 장지영 씨?”
재혁의 부름에, 지영이 쪼르르 앞으로 달려 나왔다.
재혁은 안쪽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더니 카드를 꺼냈다.
한도 무제한 블랙카드였다.
“시작해요. 가격은 상관하지 말고.”
“넵! 대표님!”
사명감 넘치는 지영의 대답이 들리자마자 이나의 패션쇼가 시작되었다.
지영은 평소 사고 싶었지만 사지 못했던 옷을 이나에게 입혀 보며 대리 만족을 하는 것 같았다.
“이번에는 이거랑 이 스커트랑. 흠, 구두는 저쪽 매장 가서 사면 되고.”
입사 후 처음으로 업무에 푹 빠져 있는 지영을 보며 이나가 손사래를 쳤다.
“이거면 됐어요. 지영 씨.”
그러나 재혁은 왼쪽 끝에서부터 오른쪽 끝까지를 가리키며 직원에게 말했다.
“여기 이쪽부터 저쪽까지. 저 여자 앞으로 갖다 줘요.”
“!!”
***
“3,840만 원입니다.”
“네?!”
직원의 말에 이나는 두 눈이 휘둥그레져서 소리쳤다.
“뭐가 그렇게 비싸요?”
이나가 포장된 쇼핑백을 뒤집으려는데 재혁이 이나의 손을 막고 카드를 내밀었다.
“할부해 드릴까요?”
직원의 말에 재혁은 뭘 그런 걸 묻냐는 듯 인상을 구겼다.
“블랙카드 고객에게도 그런 걸 묻습니까?”
“아닙니다.”
이나가 말릴 틈도 없이 순식간에 결제가 끝났다.
재혁은 카드를 받아 들고 매장을 나갔다.
직원들은 허리 숙여 인사를 하며 세 사람의 뒤를 배웅했다.
“대표님, 이거 들고 가셔야죠!”
이나가 쇼핑백을 들고 쩔쩔매자, 지영이 창피하다는 듯 이나에게 다가와 말했다.
“이런 건 다 배달해 주는 거예요. 빨리 나오세요.”
재혁의 차원이 다른 씀씀이에 이나는 아연실색했다. 자신의 1년 치 연봉에 가까운 돈을 일시불로 긁어 버리다니.
이제는 끝났다고 생각한 순간, 지영의 두 눈이 다시 반짝였다.
“대표님. 아르메닝은 꼭 들르셔야 해요. 여기가 여자들의 진짜 워너비거든요.”
“업무 능력이 탁월하군요. 장지영 씨. 마음에 듭니다. 갑시다.”
“네? 저거면 충분해요! 대표님! 대표님!!”
두 사람은 처음으로 하나가 되어 다른 명품 매장으로 들어갔다.
***
모든 쇼핑이 끝났을 때, 이나는 다양한 명품들로 꾸며져 있었다.
자칫 잘못하면 허세 가득한 옷차림이 될 수도 있었지만, 지영이 숨겨두었던 코디 능력과이나 특유의 고풍스러운 분위기가 더해져 고급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냈다.
그 모습을 본 재혁은 흡족한 표정으로 말했다.
“잘 어울리네.”
재혁의 말에 이나가 불편한 듯 말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아닌 거 같아요.”
“정이나 씨 개인에게 사주는 거 아닙니다. 썬라이즈가 드라마에 투자하는 겁니다. 나중에 반납하세요.”
할 말을 없게 만드는 재혁의 말에 이나는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재혁이 이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말했다.
“품위 없는 사람은 명품을 걸쳐 봤자 돼지 목에 진주 목걸이일 뿐입니다. 명품이 빛나기 위해서는 사람이 명품이어야 하죠.”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건데요?”
“그 옷, 잘 어울립니다.”
“….”
“이제 갑시다. 촬영 시간 다 됐겠군요.”
쿨하게 돌아서는 재혁이 멋있게 느껴져 이나는 자존심이 상했다.
그때 뒤에서 완전 반한 목소리로 지영이 말했다.
“팀장님, 정말 땡잡으셨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