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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 폭탄 선언 (54/72)

54. 폭탄 선언

“만재 씨랑 같이 살려고.”

“엄마!”

두 손을 다소곳이 잡고 서로를 바라보는 모습에, 이나는 기가 차서 소리쳤다.

“이 사람 실수는 같이 살아가면서 갚아 갈게. 먼저 아파트 네 지분부터 갚아 줄 테니까.”

“뭘 믿고! 한 번 거짓말했던 사람이 또 안 그런다는 보장 있어?”

“이나 양, 그건 오해십니다. 거짓말한 게 아니라, 그놈들 피해서 잠깐 도망을.”

“끼어들지 말아요!”

“….”

만재에게 소리친 후, 이나가 엄마에게 계속 따졌다.

“그래, 돈이 다가 아닐 수도 있지. 아니, 문제야. 한두 푼도 아니고, 평생 모아 온 돈 다 날린 건데. 그리고 이건 신뢰 문제야, 엄마. 사람 안 변해!”

“그래. 사람 안 변해. 봐 봐, 그 상황에서도 이렇게 찾아왔잖아.”

“엄마 말대로 우리가 날린 돈은 갚는다고 쳐! 근데 당장 저 사람 빚은 어떡할 건데?!”

“그건 걱정하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어떤 남자가… 헙!”

신이 나서 무언가 설명하던 만재는 놀라서 입을 막았다.

“남자요?”

“그게….”

만재가 얼버무리자, 엄마가 대신 대답했다.

“당장은 안 갚아도 된대. 유예받았데.”

“그 깡패놈들한테?”

“아니, 어떤 사람이 그 채권을 가져갔나 봐.”

“….”

“아무튼, 이 사람 부산에 취업도 했고, 우리 둘이 부산에 방 얻어 살 거야. 나도 갖고 있던 돈이랑 대출 좀 받아서 작은 가게 하나 차리고.”

“안 돼! 절대 안 돼! 난 반대야.”

“너는 내가 허락받으려고 말하는지 아니? 그런 줄 알라는 거야. 이제 호칭도 바꿔. 만재 씨가 뭐야.”

“이 나이에 아빠라고 부르라는 거야?!”

“못 할 거 뭐 있어?! 우리 결혼하면 너한테는 아빠지!”

반대가 통하지 않자, 이나는 태도를 바꿔서 엄마를 설득하려 했다.

“엄마, 제발 다시 생각해 봐. 가족을 생각해야지.”

“이미 결정했고, 지금 방 보러 가. 도움 일절 필요 없고, 찬이는 예전처럼 봐 줄 테니까 그런 줄 알고 있어.”

“….”

“그럼 일어난다. 만재 씨, 가요.”

“아! 네! 그럼 이나 양~ 나중에 봐요! 아, 가끔 볼 수도 있겠네. 저, 썬라이즈 호텔에서 일하게 됐습니다.”

“?!”

수많은 의문만 남겨둔 채로 엄마와 만재가 집을 나갔다.

“엄마!”

이나가 뒤늦게 엄마를 불러 봤지만, 되돌아온 것은 복도를 울리는 메아리뿐이었다.

순식간에 몰아친 폭풍에 이나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이대로 엄마를 보낼 수 없다는 생각에 전화를 걸었다.

“전원이 꺼져 있어….”

엄마의 전화기가 꺼져 있었다.

***

출근하는 차 안에서 이나는 골똘히 생각에 빠져 있었다.

어제부터 너무 정신이 없어서 깨닫지 못했지만, 수상한 점이 한두 개가 아니었다.

먼저, 만재가 이나의 집을 찾아왔다는 것.

엄마가 시장 사람들에게 떠벌리고 다니지도 않았을 텐데, 어떻게 알고 온 걸까?

빚에 대한 부분도 그렇다.

야반도주를 해야 할 만큼 빚에 허덕이고 있던 상황에 누군가 채권을 가져갔다는 것도 이상하고, 넘어간 가게와 아파트를 다음에 다시 살 수 있다는 말도 이상했다.

그래서 처음에는 만재의 말이 모두 거짓말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가 썬라이즈에서 근무하게 되었다는 말을 듣자, 한 가지 가능성이 이나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무슨 일 이야?”

때마침 재혁이 이나에게 말을 걸었다.

생각에 빠져 있던 이나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재혁을 바라보았다.

만약 재혁이 그의 채권을 가져간 것이라면?

그래서 빚도 유예해 주고, 취업까지 시켜 준 것이라면?

“왜 그런 눈으로 봐?”

재혁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하고 이나에게 물었다.

“대표님.”

“응.”

“혹시.”

“혹시?”

“….”

“뭔데 그렇게 뜸 들여?”

“아니에요.”

“사람 궁금하게 하게.”

“혹시. 엄마.”

“엄마?”

“아니에요.”

“어제 무슨 일이라도 있었어?”

“아닙니다.”

“세상에서 제일 나쁜 것이 말을 하다 마는 거야.”

“정말 아닙니다. 그냥 불러 봤어요.”

“그래, 알았어.”

이나는 애써 의심을 거두었다.

이나가 고개를 돌리는 순간, 재혁의 입가에는 아주 작은 미소가 피었다 사라졌다.

***

재혁의 첫 촬영이 다가왔다.

촬영은 어느덧 중반부로 접어들고 있었다.

첫 방영이 얼마 남지 않아서 촬영장에는 묘한 긴장감이 맴돌았다.

“야! 사고 날 일 있어! 정신 안 차려?!”

박 감독을 비롯한 스태프들 모두 예민한 가운데, 재혁이 촬영장에 도착했다.

재혁은 이나가 맡은 배역인 인하와 만나는 장면으로 처음 등장한다.

드라마에서 맡은 역할도 호텔 사장이었고, 현실에서도 호텔 사장이었기에 재혁은 차림새에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평소 그의 모습은 대한민국 엘리트의 전형이라고 할 만큼 완벽했다. 박 감독 역시 그의 평소 이미지를 좋아해서 재혁에 대한 기대가 잔뜩 부풀어 있었다.

촬영장 구석에, 메이크업을 받는 이나의 모습이 보였다.

처음의 어색했던 모습과는 달리 이제는 제법 여유를 갖춘 모습이었다.

그녀를 빤히 바라보는 시선을 느꼈는지 이나가 슬쩍 시선을 돌려 재혁을 향해 미소를 지어 보였다.

“….”

멀쩡하던 재혁의 심장이 쿵쾅거리며 뛰기 시작했다.

찬이와 엄마가 부산에 오고, 촬영이 시작되자 두 사람만의 시간이 부쩍 줄어 있었다.

그래서인지 재혁은 이나만 보면 심장이 두근두근 뛰곤 했다.

그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이나는 무심하게 눈을 감고 메이크업을 받았다.

그 모습을 보며 재혁은 드라마 배역을 맡길 잘했고 생각했다.

할아버지가 재혁의 영상을 소장하기를 원하듯, 그 역시 이나와의 추억을 평생 소장할 생각이었다.

***

“5화 신 넘버 19. 테이크 원. 레디! 슛.”

프레임 안으로 재혁이 들어오자, 박 감독이 감탄을 내뱉었다.

“그림은 끝내주네. 이거, 오히려 남주 그림이 죽겠는데?”

뒤쪽에 앉아 있던 영인은 그 말을 듣고 인상을 살짝 구겼다.

스태프들의 감탄 아닌 감탄 속에 촬영은 계속되었다.

로비를 걸어가던 재혁과 이나가 우연히 부딪쳐 넘어지는 장면이 이어졌고, 두 사람은 실제 그 인물이 된 것처럼 연기했다.

유리와 이 대표가 촬영장에 나타난 건 그때였다.

조용히 나타난 유리는 멀찍이 서서 두 사람의 촬영 모습을 지켜보았다.

때마침 두 사람의 손이 맞닿고 눈이 마주치고 있었다.

“….”

유리의 두 눈은 질투심으로 불타올랐다.

“컷! 좋습니다. 강 대표님, 연기 기가 막히네요. 한 방에 딱 끝내시네.”

박 감독의 기분 좋은 컷 소리가 나고, 시선을 돌리던 유리는 영인과 눈이 마주쳤다.

영인이 가볍게 고개를 숙여 유리를 알은 채 했다.

유리는 영인의 인사에 고개를 끄덕여 가볍게 답하고 박 감독에게 다가갔다.

“아, 박 감독, 그림 좋아~”

이 대표는 특유의 높은 톤으로 시선을 끌었다.

재혁과 이나 역시 모니터링을 위해 박 감독 쪽으로 다가왔다.

“대표님 연기 정말 좋으시네요.”

“고맙습니다.”

재혁까지 다가오자, 박 감독이 유리에게 물었다.

“부대표님은 어쩐 일로 오셨습니까?”

“첫 방 전에 격려 목적으로 왔어요. 보니까 잘되고 있는 거 같네요.”

“대표님과 정이나 씨가 생각보다 잘해 줘서 순조롭습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눌 때, 이 대표가 대본 하나를 박 감독에게 내밀었다.

“김 작가가 다음 화 수정 좀 하면 좋겠다고 전달해 주던데?”

“아, 정말. 빨리빨리 좀 달라니까. 꼭 촬영 직전에 이런다니까.”

가볍게 대본을 넘기던 박 감독은 의외라는 표정으로 말했다.

“키스 신이 생겼네?”

“넣으라고 할 때는 그렇게 안 넣더니. 누구? 황인혜랑 장영인 씨?”

“뭐야. 인하랑 영준?”

“그래? 6화에서? 괜찮지?”

“키스 신은 나쁘지 않긴 한데. 김 작가랑 통화를 좀 해 봐야겠는데?”

박 감독은 바로 김 작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 김 작가. 키스 신 말인데.”

이야기를 들으며 이나의 표정이 굳어졌다.

갑자기 생긴 키스 신이, 하필 영인과의 장면이라니….

드라마 전개상 영인과의 러브 라인은 이미 깨져 있었다.

근데 왜 하필?

영인은 얘기를 듣자마자 유리를 바라보았다.

유리는 눈을 살짝 내리깐 채 어떤 표정 변화도 없었다.

이런 압박을 넣을 수 있는 사람은 재혁과 유리밖에 없었다.

재혁이 이런 일을 벌일 리는 없었으니, 이건 유리가 만든 일일 것이 분명했다.

“그래. 알았어. 그렇게 하자고.”

김 작가와의 전화 통화를 끝내고 온 박 감독이 원래 서 있던 자리로 돌아왔다.

“들어 보니까 나름 괜찮은 전개 같네. 대본대로 가죠.”

“….”

다음 주, 영인과 이나의 키스 신이 예고되었다.

***

“일이니까요.”

“….”

이나는 자신이 왜 변명을 하고 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오히려 제일 불편한 사람은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인데 말이다.

재혁은 별다른 말 없이 앉아 있었다.

“나도 싫어요. 그런데 어쩔 수 없잖아요.”

“….”

“나랑 얘기 안 할 거예요?”

“아니, 해.”

“그런데 왜 삐져 있는 거예요?”

“안 삐졌어.”

“삐졌는데?”

“안 삐졌다고.”

“아니긴 뭐가 아니야. 삐졌는데.”

“안 삐졌다고.”

“그래요? 알았어요.”

이나가 돌아앉자, 차 안은 정적에 휩싸였다.

“아무래도 드라마를 엎어 버려야겠군.”

혼잣말하듯 내뱉은 재혁의 말에 이나가 화들짝 놀라 재혁을 향해 돌아앉았다.

재혁이라면 그렇게 하고도 남을 사람이었다.

“뭐라구요?!”

“대표한테 전화해서 당장 고치라고 해야겠어.”

“대표님!”

이나가 전화기를 꺼내 드는 재혁의 손을 잡았다.

“이건 좀 아닌 거 같아요.”

“왜? 키스 신이 하고 싶어?”

재혁이 퉁명스럽게 말하자 이나가 물었다.

“많이 속상해요?”

“속상하지는 않아. 열 받아 죽을 거 같을 뿐이지.”

“입술은 안 닿을게.”

“그게 가능하겠어?”

“비닐이라도 붙이지. 뭐.”

“….”

“정말로. 조심할게. 내가 제일 싫어요. 대표님이 날 위로해 줘야 하는 거 아니에요?”

“그러니까 취소시켜 버린다고.”

“누구의 압력 때문에 작품이 계속 바뀌어 버린다면 열심히 일하는 스태프들은 얼마나 힘 빠지겠어요.”

“….”

이나가 기습적으로 재혁의 입에 입을 맞추었다.

분노로 경직되어 있던 재혁의 몸이 느슨하게 풀어졌다.

이나가 입술을 떼자, 아쉬운 듯 재혁의 고개가 따라갔다.

이나는 그런 그가 귀여운 듯 웃으며 말했다.

“이제 됐어요?”

“아니. 더 열 받네. 이나의 입술은 내 것인데 말이야.”

“대표님은 언제든지 할 수 있잖아요.”

“우리 마지막으로 키스했던 게 언제였는지 생각나?”

재혁의 말에 이나는 며칠간 그와 했던 스킨십을 떠올렸다.

아무리 머리를 굴려 봐도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

“이런데 화가 나겠어? 안 나겠어?”

“미안해요.”

“또 미안하다고 하는군.”

“하지만 바빴어….”

이나가 말을 맺기 전에 재혁이 그녀의 입술을 머금었다.

변명은 입술로 하라는 듯한 강렬한 키스였다.

점점 농염해지는 두 사람의 키스에, 운전기사는 선글라스를 쓰고 음악을 크게 틀었다.

입술을 뗀 재혁이 이나에게 말했다.

“오늘 밤은 자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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