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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 만재 (53/72)

53. 만재

“그러니까 지금 장영인 씨 말은, 정이나 씨 집도 해운대 그린타운이란 말인 거죠?”

유리의 눈빛에는 깊은 분노가 담겨 있었다.

“네. 그렇습니다. 뭐, 문제라도 있나요?”

“아니요. 아무 문제 없어요.”

아무 문제 없다는 말과 다르게 유리는 좀처럼 화를 감추지 못했다.

“혹시. 대표님하고 그 비서님하고.”

영인이 은근히 떠보는 말투로 묻자 유리가 예민하게 반응했다.

“아니요.”

“네. 그렇군요.”

“그럼 그 아이는 누구 아드님이셨으려나요.”

한 번 더 유리의 표정에 균열이 일었다.

‘아들이라고?’

유리는 재혁이 이나에게 목매는 이유를 도저히 찾을 수 없었다. 외모가 조금 이쁘장하지만 그것 빼면 아무것도 없는 여자였다.

하지만 아들이 있다는 말 한마디에 모든 것이 설명되었다.

유리의 반응을 보며, 영인은 자기 생각이 틀리지 않았다고 확신했다.

유리와 재혁의 관계는 완전히 끝난 거 같지 않았다.

정확히 어떤 상황인지는 몰라도, 이나와 재혁의 사이를 틀어지게 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은 확실해 보였다.

잠시 생각에 빠져 있던 유리는 영인의 시선을 느끼고는 표정을 태연하게 바꾸었다.

누군가의 앞에서 감정을 드러내다니. 평소답지 않은 실수였다.

“알았습니다. 시간 내 주셔서 감사합니다. 바쁘실 텐데 가 보시죠.”

유리는 아랫사람 대하듯 묻고 싶은 말만 묻고 영인을 내보냈다.

영인은 아무렇지 않게 유리에게 인사하고 그녀의 방을 빠져나왔다.

“네, 그럼 도움이 되셨기를 바랍니다.”

묘한 뉘앙스의 말에, 유리의 표정이 다시 한번 일그러졌다.

그는 알 수 있었다.

곧 유리에게서 다시 연락이 올 것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

며칠이 바쁘게 지나갔다.

매일같이 촬영이 있었고, 비서팀의 인원이 확충되었다.

새로 들어온 사람 중 놀랄 만한 사람이 있었다. 그녀는 바로 장지영이었다.

이나가 공고를 올리고 며칠이 지나지 않아 본사 박 과장에게 연락이 왔다.

“네, 비서실입니다.”

“혹시 정이나 씨 계십니까?”

“네, 전데요.”

“아! 이나 씨. 나야, 박 과장.”

본사에서 일할 때, 그나마 이나를 공평하게 대해 준 사람이어서 이나는 별다른 악감정 없이 전화를 받았다.

“박 과장님? 오랜만이네요.”

“그르게. 몇 달 안 됐는데 되게 오래된 느낌이네. 이나 씨도 잘 지내? 팀장님도 잘 지내시고?”

“네. 뭐. 그런데 어쩐 일이세요?”

“아… 그게….”

말끝을 흐린 박 과장은 우물쭈물하다가 어렵게 말을 꺼냈다. 이나가 올린 비서 채용 공고를 보고 전화를 걸었다는 말이었다.

“장지영 씨가 실수를 했어. 계약서를 똑바로 확인 못 해서 숫자 0 한 개를 빼먹었거든. 그래서 그게 좀 문제가 됐네….”

“그래서 지영 씨를 이쪽에서 채용해 달라는 말씀인가요?”

“응…. 회사에서 나가긴 했는데… 문제가 좀 있거든.”

“무슨 문제죠?”

지영이 잘못 쓴 계약서의 최종 결정권자는 바로 강현준 본부장이었다.

모든 결정의 책임은 최종 결정권자가 지는 것이 관례였지만, 부회장의 지시로 징계에서 현준의 이름이 빠졌다.

“사람 딱하잖아.”

결국, 일을 못해서 잘린 사람을 받아 달라는 내용.

“그렇게는 안 되고, 지원은 가능하다고 말해 주세요. 대신 같은 다른 사람들과 같은 조건으로 선발할게요.”

“에이, 그러지 말고, 좀 부탁해.”

“아니요. 차별할 생각도 없지만, 특혜를 줄 생각도 없어서요. 그럼 전화 끊을게요.”

“이나 씨! 이나 씨!”

전화를 끊은 후, 이나는 박 과장과의 통화 내용을 재혁에게 보고했다.

그랬더니 재혁은 재밌겠다면서 지영을 부르라고 했다.

“부르자고, 계약직으로.”

그렇게 지영은 대표 비서실의 유일한 계약 직원으로 채용되었다.

이나는 지영이 오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평소 그녀가 보였던 모습을 볼 때, 이나의 아래에서 계약직 직원으로 일하지 않을 것 같았다.

비서실 인원의 첫 출근 날. 

이나의 예상과 다르게 지영은 제시간에 나타났다.

그녀는 이나를 보자마자 민망한지 시선을 피했다.

간단한 소개가 끝나고 업무에 들어갔을 때, 지영이 이나에게 은밀하게 찾아왔다.

“저, 팀장님, 얘기 좀 하죠.”

재혁이 이나에게 비서실 팀장이라는 직함을 주어, 팀장으로 불리고 있었다.

지영과 함께 복도에 나가자, 지영은 어쩔 수 없어 그랬다는 듯 자존심을 세우며 말했다.

“정이나 씨. 내가 여기 있을 사람이 아닌 건 알죠? 상황이 이래서 잠깐 있는 거니까, 계약직이라고 너무 무시하고 그러지 말아요.”

“무시당할까 봐 무서워요?”

“전혀요. 무서운 게 아니라, 서로 아는 사이니까 조심하자고 하는 말이에요.”

이나가 지영을 빤히 바라보자, 무안해진 지영이 다시 시선을 피했다.

이나가 사무적인 말투로 말했다.

“장지영 씨.”

“왜요.”

“나는 정당한 사유 아니면 지영 씨에게 뭐라고 할 생각 없어요. 그런데 이건 좀 아닌 거 같네요? 존중받고 싶은 마음은 알겠는데, 위아래는 정확하게 지켜 주길 바라요. 지켜보죠.”

지영은 자존심이 상했는지 얼굴이 새빨개져서 복도에 한참 동안 서 있었다.

이 일이 있고 난 뒤, 지영은 이나를 피해 다녔다.

이나 역시 딱히 부딪치고 싶은 마음은 없어서 업무 지시만 내릴 뿐, 지영을 따로 괴롭히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그사이 있었던 또 하나의 변화는, 엄마가 완전히 부산에 살게 된 것이었다.

이틀 전 일이었다.

그날도 야간 촬영을 마치고, 늦은 시간에 집에 들어왔다.

“나 왔어.”

집에 들어가자마자 이나의 눈에 보인 것은 무릎을 꿇고 있는 남자였다.

모르는 남자가 집에 있어서 처음에는 놀랐던 이나는, 소파에 앉아 있는 엄마를 보고 남자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이나는 표정을 굳히고 거실로 들어갔다.

“누구야?”

알면서도 묻는 물음에, 팔짱을 끼고 있던 엄마는 고개를 돌리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만재는 이나가 들어오자 구세주라도 만난 듯 화색이 돌며 이나에게 말했다.

“정이나 양? 납니다. 이만재. 엄마 남자 친구.”

“누가 남자 친구야!”

엄마의 호통에, 만재는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숙였다.

이나는 엄마 옆에 앉았다.

가까이서 보니, 그는 누구에게 얻어맞은 듯 얼굴 여기저기에 새파란 멍이 들어 있었다.

“여기는 어떻게 알고 왔어요?”

이나가 차갑게 묻자, 만재는 주저하며 대답했다.

“영자 씨가 곤란에 처했다는 말을 듣고, 여기저기 수소문해서.”

“거짓말하지 마. 그럼 내가 곤란해지기 전에 숨지 말았어야지!”

“그건, 그때, 사정이 있어서.”

“사정? 사정?! 지금 너 때문에 집이고 가게고 싹 날아갔는데, 사정?”

“그건 정말 미안해요…. 내가 할 말이 없어요.”

“어떻게 하실 건데요?”

옆에서 듣고 있던 이나가 물었다.

감정적으로 대응하기보다는 우리의 재산을 되찾아 오는 것이 급선무였으니까.

“당장은 돌려줄 방법이 없어요, 내가. 그런데 알아보니까. 깡패 놈들이 경매에 넘긴 집을 어떤 사람이 샀다 그러더라고요. 어떻게든 되찾아야겠다는 생각으로 그 사람을 찾아갔는데, 자기는 투자 때문에 산 거고, 정당한 대가만 지불받으면 나한테 판다 그랬어요. 내가 평생 일해서 갚을게요. 영자씨! 나 한 번만 믿어 줘요!.”

“뭐? 당신이 뭐 해서 벌 건데? 시 쓴다고 베짱이처럼 노는 백수가 뭐 해서 벌 거냐고!”

“나, 부산에 취업했어요. 정말이에요. 비록 많이는 못 벌지만… 평생 당신 옆에 있고 싶습니다, 영자 씨. 사랑합니다….”

눈가에 글썽이던 눈물이 만재의 볼을 타고 주룩 흘러내렸다.

엄마를 향한 난데없는 고백에 이나는 어이가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하는 고백에 혹하는 여자는 이 세상에 없을 것이다.

“엄마, 더 이상 들어 볼 가치도 없어. 빨리 경찰….”

엄마에게 시선을 돌린 이나는 할 말을 잃어버렸다.

입을 틀어막은 엄마의 두 손 위로 굵은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만재 씨….”

“영자씨.”

“사랑해요.”

“나두요. 영자씨.”

감격에 겨운 시선으로 서로를 바라보던 두 사람은 와락 껴안더니 해후의 눈물을 쏟아 냈다.

“엉엉. 미안해. 엉엉.”

“처음부터 말하지. 그러게 왜 도망갔어요. 엉엉.”

“다시는 안 그럴게요. 다시는.”

두 사람의 울음소리가 너무 컸는지, 방 안에서 찬이가 눈을 비비며 나왔다.

“할머니 왜 울어?”

눈앞에서 펼쳐진 어처구니없는 세기의 사랑 앞에 황당해하고 있던 이나는 찬의 목소리를 듣고 아차 싶었다.

그녀는 일단 찬을 데리고 대피해야겠다 싶어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 찬아. 할머니 오랜만에 친구 만나셔서 그래. 이리 와, 우리 찬이. 엄마랑 밖에서 아이스크림 먹고 오자.”

이나는 찬이를 안고 서둘러 집을 나갔다.

집을 나온 이나는 길 건너 카페로 들어가 찬에게 아이스크림을 사 주고 창가에 앉았다.

늦은 밤, 아파트 단지 앞 도로에는 차가 많지 않았다.

한산한 도로를 바라보며, 이나는 엄마가 흘린 눈물에 대해 생각했다

결국, 사기를 당해 집도 가게도 모조리 날린 상황.

하지만 엄마는 그를 용서해 버렸다.

화가 났지만, 한편으로는 엄마의 마음이 이해가 됐다.

얼마나 사람이 고팠으면, 얼마나 사랑이 고팠으면 싶었다.

그렇다고 자신마저 깨끗하게 용서할 생각은 없었다.

“하….”

이래저래 머리가 복잡해 깊은 한숨을 쉬는데, 가게 앞에 익숙한 차가 멈춰 섰다.

재혁이었다.

“어? 동료 아저씨 빠빵이다!”

재혁을 먼저 발견한 찬이가 의자에 앉아 손을 흔들었다.

곧이어 차에서 내린 재혁은 찬이가 손을 흔드는 것을 보고는 웃으며 함께 손을 흔들었다.

재혁은 차를 먼저 보내고 가게 안으로 들어왔다.

“동료 아저씨!”

찬이가 의자에서 내려가 재혁에게 달려가 안겼다.

재혁은 달려오는 찬이를 번쩍 안아 공중에 들고는 비행기를 태우듯 자리에서 한 바퀴를 돌았다.

찬은 재밌는지 웃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이나가 재혁을 말렸다.

“다쳐요.”

이나의 말에 재혁은 도는 것을 멈추고 찬이를 품에 안았다.

“찬이 잘 지냈니?”

“네!”

재혁이 이나에게 물었다.

“여기서 뭐 하고 있었어?”

“좀 복잡해요.”

“무슨 일이길래?”

심각한 이나의 표정에 재혁이 찬이를 내려놓으며 다시 물었다.

주저하던 이나는, 재혁에게까지 숨길 필요 없다는 생각이 들어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이야기를 들은 재혁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했다.

“잘됐군.”

“뭐가요? 결국, 집이랑 가게는 못 찾을 거 같다고요.”

“돈은 잃었지만, 어머님 마음은 편해지셨으니 된 거 아닌야?”

“그거야… 대표님처럼 돈 많은 사람이나 할 수 있는 이야기고요.”

“내가 보기에는 이나도 마음이 편해 보이는데?”

“….”

“잘된 거야. 돈은 금방 벌면 되니까. 그 사람이 정말 믿을 수 있는 사람이면 좋겠군.”

재혁의 말에 이나는 만재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는 정말 믿을 수 있는 사람일까? 아직은 잘 모르겠다….

***

그리고 다음 날 아침. 엄마의 폭탄 선언에 집안이 발칵 뒤집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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