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 오해
재혁과 단둘이 있는 차 안.
태연한 척 앉아 있는 유리의 속은 말이 아니었다.
복수하고자 했던 남자에게, 술에 취해 찾아가 추태를 보였다.
심지어 들키고 싶지 않은 자신의 치부를 드러내면서 말이다.
그녀를 더욱 숨 막히게 하는 것은 재혁의 침묵이었다.
그는 현준에 대해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정말 관심이 없는 것인지, 아니면 술김에 한 말이라고 치부하고 있는지 경위는 알 수 없어도 섭섭함에 화가 끓었다.
유리가 참지 못하고 재혁에게 먼저 물었다.
“누군지도 안 물어봐?”
재혁은 한 손으로 핸들을 돌리며 무심하게 말했다.
“관심 없어.”
“무슨 일인지 궁금하지도 않아?”
“어.”
짤막한 대답에 유리는 고개를 반대쪽으로 돌렸다.
‘대체 뭘 기대한 거야. 최유리.’
재혁에게 키스하는 순간, 술은 전부 깼다.
오랜만에 하는 재혁과의 키스가 준 짜릿함은, 온몸의 술기운을 날려 버리기에 충분했다.
그와의 키스로 되살아난 옛 감정이 그녀의 기분을 더욱 나락으로 밀어 넣었다.
“없던 일로 해.”
유리가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말했다.
되돌아온 대답은 유리가 예상하지 못한 것이었다.
“없던 일로 하자면 없던 일이 되나?”
묘한 뉘앙스.
유리는 은근한 기대를 담아 물었다.
“무슨 말이야?”
“내일부터 내 사무실에 찾아오지 마, 모든 업무는 서면으로 제출하고, 외부 미팅이나 행사가 있을 때만 볼 거야.”
이 대답 역시 생각지 못한 반응이었다. 반전에 반전이랄까.
“진심이야?”
“당연, 완전한 진심이야. 더불어 앞으로 내 아파트에 나타나면 넌 해고야.”
“그렇게 내가 싫니?”
“아니, 네가 싫지 않아. 나를 좋아하는 네 마음이 싫을 뿐이야.”
“….”
어느덧 유리의 집 앞에 도착했다.
차에서 내리려던 유리가 재혁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멋있는 척하지 마. 재수 없으니까.”
차에서 내리려는데 재혁이 그녀를 불렀다.
“최유리.”
“왜.”
“혹여나 해서 하는 말인데, 오늘 일로 협박할 생각 마, 이나에게는 오늘 내가 말할 거니까.”
“넌 내가 그런 여자로밖에 안 보이니?”
“어.”
쾅!
화가 난 유리는 문을 있는 힘껏 닫고 집으로 들어갔다.
재혁은 고급 오피스텔 입구로 들어가는 유리의 뒷모습을 보다가, 휴대 전화를 꺼내 들었다.
이나에게 연락이 와 있었다.
[집에 왔어요.]
[나는 잠깐 나왔어. 이따 밤에 통화 가능한가?]
[네. 알겠어요.]
[이따 연락할게.]
이나에게 답장을 마친 재혁은 차를 몰아 집으로 돌아갔다.
재혁이 떠난 후, 영인은 방금 자신이 본 모습 때문에 혼란스러웠다.
유리와 재혁이 한때 연인 사이였다는 것은 세간에 널리 알려진 사실.
그 때문에 두 사람이 썬라이즈에서 함께 근무하게 된 것도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었다.
그런데… 아파트에서 같은 차를 타고 나왔다고?
대체 지금 벌어지는 상황이 무엇인지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러니까. 정이나의 집에서 나온 강재혁의 차에서… 최유리 부대표가 내렸다고? 둘이 아직도 만나는 거야?”
얽히고설킨 복잡한 관계.
상황이 정리되는 듯하자 영인의 두 눈이 반짝였다.
“재밌게 돌아가는데?”
***
집에 들어가니, 엄마가 거실에 앉아 있었다.
아직 두 사람은 냉전 중이어서 이나는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 하고 안으로 들어가려 했다.
이나가 거실을 지나쳐 가자 엄마가 그녀를 불렀다.
“이나, 혹시 그 대표님이라는 사람 여기 살아?”
엄마의 갑작스러운 물음에 이나의 발걸음이 멈췄다.
“갑자기 왜?”
“지하 주차장에 있더라고.”
“그래? 비슷한 사람인가 보지.”
뜨끔한 이나가 대충 얼버무리고 방 안으로 들어가려는데, 뒤이어 나온 엄마의 말이 이나의 발목을 잡았다.
“그런데 웬 여자랑 같이 있던데?”
이나가 휙 몸을 돌렸다.
“여자?”
“응, 왜, 날씬하고 긴 생머리에, 좀 날카롭게 생긴 것도 같고.”
엄마의 말을 들은 이나는 여자가 누군지 단박에 알아챘다.
“회사 부대표. 둘이 서로 친해.”
유리는 재혁의 전 여자 친구였지만, 어쩐지 경계가 되는 인물은 아니었다. 엄마의 다음 말을 듣기 전까지는 말이다.
“그런데 그게… 상태가 좀.”
“왜?”
“키스 하던데?”
“?!”
이나는 뭘 하고 있었다고? 라는 말이 튀어나오려는 것을 간신히 참아 냈다.
아주 잠깐의 적막에 서로 민망해졌다.
“잘못 봤겠지. 대표님이 여기는 왜 와.”
“아니야, 얘. 나한테 인사도 했는걸? 그 대표님이라는 사람 확실해!”
“….”
“너네… 만나는 사이 맞지?”
“어.”
“그럼, 그놈이 바람피웠나?”
“아니야. 뭔가 일이 있었겠지.”
“그… 그렇지? 그렇게 나쁜 사람 아니지?”
“응. 그럴 사람 아니야.”
대답을 하는 이나의 표정이 심각해 보였다.
“그래. 그래도 남자는 다 믿으면 안 된다.”
엄마가 괜히 에두르며 말하자 이나는 괜히 심술이 났다.
“엄마처럼 당할까 봐?”
“….”
약점을 꼬집는 이나의 말에 엄마는 상처를 받았다.
하지만 잘못한 것이 있어 반박할 수는 없어서 그녀는 기분 나쁜 투로 대답하고는 방 안으로 들어갔다.
“그 사람은 좋은 사람이겠지.”
미안해진 이나는 말 없이 찬의 방으로 들어갔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비어 있는 찬의 침대가 보였다.
덜컥 마음이 내려앉아서 다급하게 불을 켜자, 문 뒤에 숨어 있던 찬이가 이나를 놀라게 하며 튀어나왔다.
“워!”
“깜짝이야. 찬아 놀랐잖아!”
“헤헤 성공!”
이나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찬이를 안아 주었다.
찬이가 이나품에 안겨 말했다.
“엄마, 나 아까 동료 아저씨 봤다?!”
찬의 말에 이나는 다시 가슴이 철렁했다.
“그래? 동료 아저씨한테 인사했어?”
“응! 아저씨가 어떤 이쁜 누나랑 있었어.”
‘엄마 말이 맞았구나.’
“아저씨 친구래.”
“뽀뽀하고 있던데! 그 누나 아저씨 여자친구야?”
“아니야.”
“엄마가 여자친구 아니면 뽀뽀하지 말라고 했잖아!”
“찬이가 잘못 본 거야. 엄마가 나중에 아저씨한테 물어볼게.”
“알았어. 엄마!”
“늦었다. 우리 찬이 이제 자야지?”
“웅.”
“엄마 뽀뽀.”
쪽-
“잘자 찬.”
“엄마두.”
찬이의 방을 나오며 이나는 휴대폰을 확인했다. 재혁에게는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연락이 오겠지 생각하며 이나는 방 안으로 들어갔다.
***
알람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이나는 깜짝 놀라 몸을 일으켰다.
6시 20분. 깜박 잠든 모양이었다.
휴대 전화를 확인하니 재혁에게 온 부재중 통화가 두 통과 문자 한통이 와있었다.
[잠들었나 봐. 잘자.]
무슨 문자를 이렇게 아련하게 보내는 걸까?
[죄송해요. 잠들었어요.]
문자를 보내자마자 답장이 왔다.
[그럴 거 같았어.]
[무슨 말 하려….]
문자를 보내던 이나의 손가락이 멈췄다.
‘물어봐서 뭐 하게?’
쿨한 척하려는 건 아니었다. 이 질문으로 관계가 껄끄러워지는 것이 싫었을 뿐이다.
[준비해서 나갈게요.]
[나도.]
이나는 문자를 확인하고는 벌떡 일어나 운동 갈 준비를 했다.
아파트 단지 밖으로 나가니 재혁이 기다리고 있었다.
“가요.”
두 사람은 평소처럼 조킹 코스를 달렸다.
이나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균형 잡힌 자세는 평소 그가 얼마나 자기 관리에 철저한 사람인지 말해주고 있었다.
그렇게 자기관리에 철저한 사람이다른 여자와 키스를?
머릿속에 잡생각들이 점점 불어나며 그녀의 머릿속을 잠식할 때, 재혁이 자리에 갑자기 멈춰 섰다.
덩달아 이나가 멈추자 재혁이 그녀를 향해 돌아섰다.
“할 말이 있어.”
“뭔데요?”
“어제 유리가 집에 찾아왔어. 그리고 갑작스럽게 키스를 당했어. 어머니께 들켜서 하는 말 아니고, 안 들켰어도 말했을 거야. 아무런 의도도 없었고, 그저 사고였어.”
그의 말에 마음이 덜컥 내려앉았다.
‘사실이었구나.’
이나가 조심스레 말했다.
“사고였다고요?”
“술에 취해 찾아왔고, 돌려보내려고 실랑이를 했어. 그러다가.”
“입을 맞춘 거고요?”
재혁은 변명하고 싶어 숨을 흡- 들이마셨다가 후 내뱉더니 인정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요.”
상관없다는 듯한 이나의 뉘앙스에 재혁은 의아하다는 듯 눈을 살짝 찡그렸다.
그 모습을 본 이나가 뒷말을 이었다.
“믿어요.”
“앞으로 이런 일 없도록 하지.”
“네.”
화를 내지 않는 이나의 모습에 찜찜함이 남았지만, 별다른 도리가 없었다.
어젯밤, 바다를 보러 가자던 이나의 말이 그의 마음에 불편하게 남아 있었다.
“혹시….”
이나는 취조실에 들어간 피해자처럼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겠다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재혁은 이나의 표정을 보고 말끝을 삼켰다.
재혁은 찜찜한 마음을 접어 두고 다시 도로를 달렸다.
분명 유리 일 말고도 다른 일이 있을 것 같았지만, 물어볼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나중에 말해 봐야겠군.’
재혁은 할아버지가 이나를 불렀으리라고는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
영인은 이른 아침부터 로비 앞을 서성였다.
“언제오는 거야?”
그는 누구를 기다리는지 연신 호텔 입구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로비 입구 너머로 날렵한 벤츠 한대가 들어오더니 안에서 유리가 내렸다.
“오케이. 왔네.”
그 모습을 본 영인은 자연스럽게 접근하기 위해 로비 구석으로 움직였다.
로비로 들어온 유리가 빠른 걸음으로 로비를 지나갈 때, 영인은 우연인 척 그녀에게 다가갔다.
“아 안녕하세요, 부대표님.”
“장영인 씨.”
“출근하시는 길이신가 보네요?”
“네. 볼일이라도 있으신가요?”
“아니요. 그냥 반가워서 인사드리러 왔습니다. 오늘 촬영이 있어서요.”
“그렇군요. 그럼 이만.”
“혹시 대표님과 매우 친하신가요?”
“그건 왜 물으시죠?”
“대표님 아드님이 있으신가 하고요. 선물이라도 좀 드릴까 해서요.”
영인의 말에, 유리의 발걸음이 멈췄다.
유리는 태연한 척 천천히 몸을 돌렸다.
“아들이요?”
“아드님이 아니신가요? 제가 잘못 알았나 보네요. 죄송합니다.”
영인은 여운을 남기고 뒤돌아섰다.
그리고 유리에게서 멀어지며 속으로 셋을 셌다.
‘하나, 둘, 셋.’
셋과 동시에 유리가 그를 불렀다.
“장영인 씨?”
‘걸려들었어.’
그는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돌아섰다.
“네?”
“저랑 얘기 좀 하실까요?”
“어떤 얘기 말씀이시죠?”
“작품에 관한 얘기라고 해 두죠.”
“네. 알겠습니다.”
“지금 같이 가죠.”
유리는 대답도 듣지 않고 곧장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영인은 의뭉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뒤를 쫓았다.
잠시 후, 두 사람은 유리의 집무실에 마주 앉았다.
유리는 돌려 말하는 것 없이 다짜고짜 그에게 물었다.
“아들 얘기는 왜 꺼낸 거죠?”
“며칠 전에, 정이나 씨가 사고를 당했습니다. 그래서,”
이나의 이름이 나오자 유리가 그의 말을 끊었다.
“정이나?”
“네, 제가 집에 데려다준 적이 있는데, 정이나 씨 집 앞에서 대표님을 만났거든요. 그때 차에 한 남자아이가 타고 있길래 드린 말씀입니다.”
이번에도 유리가 다시 말을 끊었다.
“그 아파트, 해운대 그린타운인가요?”
“네. 맞아요. 해운대 그린타운.”
유리의 표정이 눈에 띄게 굳어졌다.
그 모습을 본 영인의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