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 엇갈린 길
공교로운 상황이었다.
누가 보아도 오해할만할 상황을 이나의 엄마에게 들켜버렸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분노보다 급한 것은 이나 엄마의 오해를 푸는 것이었다.
재혁이 엄마를 향해 다급하게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십니까.”
엄마는 당황한 듯 횡설수설하며 말했다.
“아, 그게 찬이가 빵빵이 보자고 하도 졸라 대서 내려왔는데…. 그게… 미안해요. 가자, 찬아.”
“어머님!”
재혁의 외침에도 그녀는 찬의 손을 잡고 서둘러 사라졌다.
변명이라도 해야 할 것 같아서 그들을 붙잡으려던 재혁은 끝내 내민 손을 거둬들였다.
대체 이 상황에서 어떤 변명을 한단 말인가.
멀어져 가는 그들의 뒷모습을 보며 망연자실해 있는데, 옆에서 풀썩 소리가 났다.
술에 취한 유리가 쓰러져 있었다.
한숨이 절로 새어 나왔다.
때마침 이나에게 문자가 왔다.
[늦어요?]
시계를 보니 벌써 10분이나 지나 있었다.
[지금 출발해.]
[아직 출발 안 했으면 오지 마요. 택시 타고 들어갈게요.]
[아니야, 금방 가.]
[피곤해서 그래요. 그냥 집에 있어요.]
더 말해 봤자, 이나 성격에 이미 택시를 잡고 있을 것 같았다.
재혁은 하는 수 없이 발걸음을 돌렸다.
[그래, 알았어. 조심해서 들어와.]
답장한 후, 재혁은 이나와의 달콤한 데이트를 망친 주범을 노려보았다.
유리는 취해서 쓰러진 사람치고 다소곳하게 누워 있었다.
그녀는 언제나 이런 식이었다.
동정을 유발해 일을 해결하는 그녀의 태도는 언제나 재혁의 짜증을 유발했다.
그녀와 헤어진 후 이제는 벗어났다고 생각했는데 유리는 찰거머리처럼 들러붙어 그를 놓아주지 않고 있었다.
그녀의 얄팍한 수작에 재혁은 짜증이 난 목소리로 말했다.
“일어나. 안 통하니까.”
순간 유리의 눈썹이 파르르 떨렸지만, 그녀는 일어나지 않았다.
“셋 셀 때까지 일어나, 하나. 둘. 셋.”
“….”
재혁은 가차 없이 셋을 세고 돌아섰다.
멀어지는 발걸음 소리에도 유리는 일어나지 않았다.
저벅- 저벅-
재혁의 발걸음 소리가 조금씩 멀어져 이제 주차장 밖으로 향할 때, 뒤에서 유리의 목소리가 들렸다.
“집에 데려다줘.”
그녀는 당당한 목소리로 요구했다.
재혁이 몸을 돌려 유리를 바라보았다.
유리는 언제 누워있었냐는 듯 자리에서 일어나 있었다.
“이게 웬 쇼지?”
위협적인 재혁의 말에도 유리는 아랑곳 않고 제 할 말만 했다.
“운전 못 해. 오는 길에 휴대 전화하고 지갑도 잃어버렸어. 집에 못 가.”
“네가 알아서 해.”
재혁이 차갑게 말하고 돌아서자 유리는 최후의 수단을 꺼냈다.
“안 데려다주면 할아버님께 전화할 거야.”
그녀의 말이 효과가 있었는지, 재혁이 멈춰 서서 그녀를 돌아보았다.
재혁의 얼굴은 일그러질 대로 일그러져 있었다.
“최유리.”
“할아버님께 전화해서 데려다 달라고 할 거야.”
“정말, 형편없군.”
“내가 많은 거 바라? 집까지 태워만 달라고.”
“….”
재혁은 한참을 서서 유리를 노려보다가 그녀에게 다가갔다.
막상 그가 다가오자, 유리는 눈길을 피하고 싶었다.
유난히 그의 앞에서 작아지고 약해지는 자신이 싫었다.
하지만 자존심이 상해서 그녀는 악착같이 그와 시선을 마주쳤다.
무슨 말을 하려는 듯 유리를 노려보며 걸어온 재혁은 그대로 그녀를 지나쳐 차에 올라탔다.
“타.”
재혁의 싸늘한 말에 유리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조금의 비틀거림도 없이 걸어가 차에 올라탔다.
***
[그래, 알았어. 조심해서 들어와.]
이나는 재혁의 마지막 답장을 받고 택시를 잡기 위해 도로로 나갔다.
마음속 내심 그가 와 줬으면 하던 기대를 느끼며 그녀는 씁쓸하게 웃었다.
“차라리 잘됐어.”
그녀는 스스로 달래듯 혼잣말을 했다.
오늘 같은 날, 재혁과 함께 바다를 간다면 완전히 무너져 버릴 것만 같았으니 차라리 잘 된 것일지도 모른다.
도로는 텅 비어 택시가 잡히지 않았다.
조금 큰 길로 내려가자 싶어서, 길을 따라 걸어가기 시작했다.
힘이 없어서인지 유난히 터벅터벅 발걸음을 옮기는데, 지나가던 스포츠카 한 대가 10미터쯤 아래에 멈춰 섰다.
이나가 별생각 없이 걸어가는데, 창문이 열리더니 차창 너머 운전석에서 영인이 그녀를 불렀다.
“이나야.”
익숙한 목소리에 이나는 인상을 찡그렸다.
이 넓은 부산 한복판에서, 하필 이 시간에 영인과 마주치다니.
이나는 별로 상대하고 싶지 않아서 건성으로 대답했다.
“자주 뵙네요. 장영인씨”
“어디 가?”
“집이요.”
“타. 같은 방향인데.”
그의 옆좌석에는 노랑머리의 여자 친구가 앉아 있었다.
그냥 타라고 했어도 안 탔겠지만, 여자 친구까지 있는 상황에서 차에 타라고 하는 영인의 정신 상태가 의심스러웠다.
이나는 감정이 섞이지 않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괜찮습니다. 택시 불렀습니다. 조심히 가세요.”
이나가 다시 언덕을 내려가자, 영인이 도로를 따라 그녀를 쫓아왔다.
“그러지 말고 타.”
이나는 영인의 말을 무시하며 걸음을 빨리했다.
“정이나.”
“….”
“이나야.”
“….”
보다 못한 그의 여자 친구가 영인을 말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냥 가자.”
여자친구의 짜증 섞인 말에도 영인은 포기하지 않고 계속 이나를 불렀다.
“이나야. 정이나.”
참다못한 이나가 자리에 서서 영인을 노려보았다.
옆에 앉은 여자 친구는 얼굴을 한껏 찌푸린 채였고, 영인은 재밌다는 듯 장난기 많은 얼굴로 웃고 있었다.
“언제까지 따라올 건데요?”
“네가 탈 때까지.”
“택시 불렀다구요.”
“그럼 택시도 따라가고.”
영인의 막무가내인 성격을 알아서인지 옆에 앉은 그의 여자친구가 한껏 짜증이 오른 목소리로 이나에게 말했다.
“그냥 타요.”
때마침 언덕 위에서 차가 내려왔고, 2차선 도로인 탓에 오도 가지도 못하고 클랙슨을 울려 댔다.
민폐를 끼치는 상황에도 영인은 태연해 보였다.
다시 울리는 클랙슨 소리에 이나는 자리에 우뚝 서더니 차 뒷좌석에 올라탔다.
그녀가 차에 타자, 영인은 ‘진작에 그럴 것이지’라는 듯한 미소를 지으며 차를 출발시켰다.
어두운 산비탈을 내려가 큰길로 접어드는 동안, 이나는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백미러로 보이는 영인의 얼굴은 장난기가 가득해 보였고, 옆에 앉은 그의 여자 친구는 잔뜩 화가나 있었다.
“허. 어이없어.”
그녀는 생각할수록 기분이 나쁜지 영인을 노려보았다.
“왜?”
“오빠. 나 옆에 있잖아.”
“무슨 말이야?”
“저 여자는 왜 태워?”
“저 여자? 말조심해.”
“지금 저 여자 편드는 거야?”
“야. 그만해. 이따 얘기해.”
“뭘 이따 얘기해. 맨날 저 여자 얘기만 하더니, 이제는 차를 태우니?”
자신을 두고 하는 말다툼에, 이나는 기가 막혔다.
억지로 차에 탄 것도 화가 나는데 갑자기 말다툼이라니.
이나가 영인에게 말했다.
“차 세워요.”
그러나 영인은 이나의 말을 못 들은 척 계속 차를 몰았다.
그러자 영인의 여자 친구가 고개를 휙 돌리더니, 도끼눈을 하고 이나를 노려보았다.
“이봐요. 일부러 우리 기다린 거 아니에요?”
“뭐라고요?”
이나가 어이없다는 듯 대답하자, 갑자기 잘 달리던 차가 끼익 소리를 내며 도롯가에 멈춰 섰다.
갑작스러운 급정거에 두 사람이 놀랐는데, 영인은 화가 난 듯 여자 친구가 메고 있던 안전띠를 풀더니 몸을 일으켜 보조석 문을 열었다.
“야. 내려.”
“뭐?”
“내리라고!”
영인의 행동에 여자 친구는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내뱉고는 차에서 내렸다.
쾅- 문이 닫히자마자 영인은 차를 출발시켰다.
너무나 급작스러운 상황에 이나는 내릴 타이밍을 놓쳐 버렸다.
몸을 돌려 홀로 남겨진 그의 여자 친구를 바라보다가, 영인이 앉아 있는 앞좌석을 두드리며 말했다.
“지금 뭐 하는 거야?”
“….”
“야! 장영인!”
“….”
“장영인!”
“왜!”
“차 세워!”
“싫어!”
“차 세우라고!”
“다 왔잖아! 집 앞에서 내려 줄게!”
“너 대체 나한테 왜 이러는거니?”
“야! 뭐라고 해도 차 안 세울 거니까 소리 좀 지르지 마!”
영인의 호통에, 이나의 머릿속에는 그 옛날 영인의 모습이 떠올랐다.
은근히 사람을 무시하며 제멋대로만 하려던 그 모습. 그러다 마음대로 되지 않으면 화를 내며 강압적으로 굴던 그 모습까지 말이다.
이나는 더 이상 말을 섞고 싶지 않아서 고개를 돌렸다.
닫힌 그녀의 마음이 무거운 침묵을 만들어 내자, 영인은 자신이 실수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조금은 기죽은 목소리로 이나의 기색을 살피며 말했다.
“여자 친구랑은 잘 화해할 거야. 그리고, 화낸 거는 미안한데, 너도 내 프라이버시에 끼어드는 건 좀 그렇잖아.”
“….”
“야. 대답 좀 해 주면 안 돼?”
“….”
“하, 정말.”
집에 도착하는 5분의 시간이 이나에게는 5시간보다 길게 느껴졌다.
차가 아파트 입구에 멈춰 서자마자이나가 총알처럼 튀어나왔다.
그녀는 있는 힘껏 문을 쾅- 닫고는 아파트를 향해 빠르게 걸어갔다.
“이나야!”
뒤에서 영인이 따라오는 소리에 이나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그녀가 입구에 막 들어가려 할 때, 영인이 그녀의 어깨를 잡아끌었다.
“그런 게 아니라.”
탁-
이나는 그의 손을 거칠게 뿌리치며 소리쳤다.
“놔!”
이나가 다시 안으로 들어가려 하자, 영인이 다시 그녀를 잡았다.
“놓으라고!”
갑작스러운 소란에, 입구를 지키던 경비원이 경비실 창문으로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시선을 의식했는지, 영인은 다시 그녀를 잡지 않고 한발 물러났다.
“미안. 내가 흥분한 거는 인정하는데, 잘못은 걔가 먼저.”
“너 정말 나한테 왜 그래? 대체 뭘 원해서 이러는 거야?”
“야, 내가 원하긴 뭘 원해. 그냥.”
“제발 부탁이니까, 더 이상 내 인생에 발 들여 놓지 마. 드라마고 뭐고 안 해 버릴 거니까.”
“….”
이나는 몸을 휙 돌려 아파트 입구로 사라졌다.
“xx.”
영인은 훅- 하고 올라오는 분노에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차에 올라탔다.
“제깟 게 언제부터 잘났다고.”
분이 풀리지 않아 욕을 내뱉으며 핸들을 내리쳤다.
그러자 상황을 지켜보던 경비원이 다가왔다.
“무슨 일 있습니까?”
“나와. 차 빼게.”
애꿎은 사람에게 화를 내며 그는 차를 돌렸다.
“정이나, 배우 만들어 줬더니 지가 뭐라도 되는 줄 아나 보지?”
영인이 후문을 지날 때, 차 한 대가 도로로 나왔다.
아직 화가 덜 풀려 인상을 찡그리고 앞을 노려보는데, 후문에서 나오는 차의 모습이 익숙해 보였다.
“어? 저거 강재혁 대표 차 아닌가?”
그는 자세히 보기 위해 허리를 펴고 몸을 앞으로 내밀었다.
분명 이전에 봤던 재혁의 차였다.
혼잣말하며 생각하는 사이, 도로를 나온 재혁의 차는 코너를 돌고 있었다.
영인은 고민할 새도 없이 액셀러레이터를 밟아 그 차의 뒤를 쫓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