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 각자의 사연
이나는 살짝 내리깔고 있던 시선을 들어 강 회장을 바라보았다.
드라마에서나 보던 상황에 뛰고 있던 심장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없습니다.”
이나에 말에 강 회장은 예상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자세를 고쳐 앉고는 조금 전과 다르게 고압적인 말투로 말했다.
“나는 말이야. 사람을 믿지 않아. 약속 같은 건 사실 아무런 의미가 없지. 더 단도직입적으로 물어보지. 얼마면 되겠나?”
“….”
강 회장의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비수가 되어 그녀의 가슴에 꽂혔다.
“자존심이 상할 거야. 하지만 자존심은 한 번 내려놓으면 아무것도 아니지. 자존심이 없이는 살지만, 밥 없이는 못 살지 않나.”
다시 긴 침묵이 이어졌다.
강 회장은 그 침묵의 뜻을 동의로 알아들었다.
“언제까지 헤어질 수 있나?”
“1년입니다.”
“너무 길어.”
“아니요. 회장님 손자가 저를 붙잡기 위해 제시한 시간이 1년입니다.”
“뭐?”
“회장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지 않으셔도, 저는 강재혁 대표님과 결혼할 생각이 눈곱만치도 없습니다. 자존심 없이는 살아도 밥 없이는 못 산다고 하셨죠? 죄송하지만, 저는 밥 없이는 살아도 자존심 없이는 못 살겠네요. 회장님께서 걱정하시는 일은 벌어지지 않을 거고요. 그건 회장님의 뜻이 아닌 제 뜻입니다. 그럼 일어나 보겠습니다.”
속사포처럼 쏟아낸 말에 그동안의 설움이 함께 쏟아져 나왔다.
마지막 말을 할 때 울컥하는 감정을 억지로 삼키며 이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랑 때문에 이런 일을 겪어야 한다면 사랑하지 않겠다고 다짐하고, 그녀는 강 회장에게서 돌아섰다.
이나가 이 답답한 공간을 빠져나가려던 그때, 뒤에서 소리가 들렸다.
털썩-
불길한 소리에 이나의 발길이 멈췄다.
그녀가 돌아보니, 강 회장이 자리에 쓰러져 있었다.
“회장님!”
놀란 이나가 쓰러진 강 회장에게 달려갔다.
“회장님, 괜찮으세요?! 회장님!”
강 회장은 얼굴이 퍼렇게 돼서 숨을 쉬지 못하고 있었다.
심장 마비였다.
이나는 본능적으로 강 회장을 바닥에 누였다. 그리고 있는 힘을 다해 그의 흉부를 압박했다.
“회장님! 정신 차리세요. 회장님!”
소란을 들었는지, 밖에 서 있던 비서가 깜짝 놀라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무슨 일입니까?”
“회장님이 쓰러지셨어요! 빨리 응급차 좀 불러 주세요!”
비서는 강 회장의 머리맡으로 달려와 그의 상태를 확인하고는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비서가 전화하는 동안, 이나는 있는 힘을 다해 강 회장의 가슴을 내리눌렀다.
“제발. 정신 차리세요. 제발.”
신고를 마친 경호원이 이나를 대신해 CPR을 이어갔다.
이나의 간절한 바람에도 강회장의 멎은 숨은 좀처럼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
이나의 신속한 조치 덕분에 강 회장은 위급한 순간을 넘겼다.
강 회장이 치료를 받는 사이, 강 회장의 비서가 이나에게 다가왔다.
“회장님의 질병 사항은 비밀입니다.”
“강재혁 대표님도 모르고 계신 건가요?”
“네.”
“회장님께서 깨어나시면 뵙고 가셨으면 좋겠습니다.”
“네, 알겠습니다.”
병실로 들어가는 비서의 뒷모습을 보며 이나는 많은 생각에 잠겼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의사가 병실을 다녀간 후, 강 회장의 비서가 이나를 불렀다.
“회장님께서 찾으십니다.”
이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병실로 들어가는 발걸음이 무겁기만 했다. 그와 마주 앉았을 때,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그녀는 알 수 없었다.
이나가 자리에 앉자 강 회장은 민망한 듯한 웃음을 지어보였다.
“이렇게 민망하기도 쉽지 않을걸세. 악역을 자처하다가 도움을 받는 꼴이라니.”
“몸은 좀 괜찮으세요?”
“무사히 눈을 떴으니 그걸로도 다행이지. 차라리 죽었으면 덜 민망할 뻔 그랬네.”
“그런 말씀 마세요. 회장님.”
“재혁이에게 아직 말하지 않았겠지?”
“네. 경황이 없어서 말할 생각도 못 했습니다.”
“않았으면 좋겠네. 호들갑 떨 게 뻔하니까.”
“….”
“부탁이야.”
“네. 알겠습니다.”
다시 어색한 침묵이 맴돌았다. 두 사람 모두 이 상황에 할 말이 딱히 떠오르지 않는 듯했다.
“저는 가보겠습니다.”
이나가 어색함을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그러자 강 회장은 한숨을 푹 쉬더니 죽을 날을 앞둔 시한부 환자처럼 자조적인 말투로 이야기했다.
“얼마 안 됐어. 이제 가겠거니 하고 있었는데, 심장이 안 좋다더군. 아들이 죽고 나서부터 악화됐는데, 그게 문제가 생긴 모양이야. 하긴, 오래 썼으니 이놈도 좀 쉬어야겠지.”
“….”
“표정을 보니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표정이구먼.”
“네.”
“동정이든 뭐든 좋아. 죽기 전에 손자는 보고 죽어야지 했는데, 살다 보니까 욕심이 생겨. 이제는 증손자는 보고 죽어야지 싶은 거야. 왜냐하면, 재혁이가 내 아들같이 느껴지거든.”
“아이가 있다고 들었어.”
“…네.”
“미안허이. 내가 그건 이해할 수 없을 거 같으니.”
“이해합니다."
“시간이 얼마 없어. 내가 이렇게 무리해서 자네를 만난 것도 그래서야. 못난 할아비의 마음을 자네가 이해해 주게.”
이나는 대답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더 이상의 대화는 없었다. 서로를 향한 동정과 애잔함이 말 없는 공기 중으로 흐르고 있었다.
***
집으로 돌아가는 길의 발걸음은 무거웠다.
‘이제는 증손자는 보고 죽어야지, 싶은 거야.’
강 회장의 말을 들으면서 이나는 찬을 떠올렸다.
찬이 만약 재혁의 아들이라면 모두에게 커다란 기쁨이 될 것만 같았다.
순간적으로 떠오른 친자 검사 생각에 이나는 질겁하며 고개를 저었다.
만약 찬이 재혁의 아들이 아니라면?
괜한 기대감으로 서로에게 상처를 주느니, 모른 척하는 것이 더 나은 선택이었다.
강 회장이 반대하지 않았다 해도 재혁은 1년만 만날 생각이었다고, 이나는 자신을 속였다.
재혁이 강 회장의 상태를 알게 된다면 어떻게 되는 걸까?
지금처럼 자신을 사랑해 줄까?
끝이 있는 만남을 하고 있었지만, 그의 사랑이 변한다고 생각하면 마음이 아려 왔다.
때마침 바람이 불었다.
그녀의 긴 머리가 유독 힘없이 흔들렸다.
쓸쓸한 중에 울리는 휴대 전화에는 재혁의 이름이 떠 있었다.
이나는 아무렇지 않은 척 전화를 받았다.
“네, 대표님.”
“집에 안 온 거 같던데.”
“어떻게 알았어요?”
“불이 꺼져 있길래.”
그러고 보니, 엄마와 찬은 저녁을 먹고 들어온다고 했었다.
“어디야?”
어딘지 묻는 재혁의 말이 어쩐지 슬프게 들렸다.
“길거리예요.”
“데리러 갈까?”
“어딘지 알구요.”
“어디든 갈 거라서 상관없어.”
“그럴래요, 그럼?”
“그래. 금방 가지.”
이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말했다.
“바다 보러 갈래요?”
조심스러운 이나의 말이 이상했는지, 재혁은 잠시 말이 없었다.
곧이어 재혁이 대답했다.
“그래 가자. 네가 원하는 곳이면 어디든.”
시원한 바람이 다시 불어왔다.
이나는 그 바람이 복잡한 자신을 위해 봄이 주는 선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
재혁은 차 키를 들고 주차장으로 향했다.
이나가 있는 곳은 차로 10분 정도 떨어진 곳이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다급하게 차 쪽으로 다가갔다.
이나의 목소리에서 평소와 다름을 느꼈다. 그것도 왠지 불길한 분위기의 다름이어서, 재혁은 마음이 급했다.
차 문을 열고 운전석에 타려는데, 그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오빠.”
익숙한 목소리에 돌아보자, 유리가 지하 주차장 기둥에 머리를 댄 채로 서 있었다.
“최유리?”
“재혁… 오빠.”
그녀는 술이 많이 취했는지 비틀거리며 재혁이 있는 쪽으로 걸어왔다.
“찾아…왔는데… 딱… 있네…”
“여기서 뭐하고 있는거지?”
유리가 다가오자 술 냄새가 훅 풍겼다.
“오빠….”
동공이 풀린 것 같은 유리의 눈은 어쩐지 슬퍼 보였다.
그녀와 만날 때도, 재혁은 유리의 저런 눈빛을 싫어했다.
불쌍한 모습으로 사랑을 구걸하는 것처럼 느껴졌으니까.
“돌아가. 택시 불러 줄….”
눈앞에서 멈출 줄 알았던 유리는, 다리에 힘이 풀린 듯 앞쪽으로 몸을 기울이더니 그대로 재혁에게 기댔다.
그녀를 밀어내려던 재혁은 유리가 삐끗하며 넘어지려 하자 본능적으로 그녀를 부축했다.
“정신 차려, 최유리!”
재혁이 억지로 그녀를 일으키며 소리쳤지만 유리는 정신을 차릴 생각이 없어 보였다.
“최유리!”
유리의 어깨가 들썩이더니 흐느끼는 소리가 들렸다.
“오빠…. 나 힘들어.”
“미치겠군.”
재혁의 목소리에 당혹감이 묻어났다.
힘으로 그녀를 세우려 했지만, 유리는 스스로 일어나려는 의지가 전혀 없었다.
세웠다가 다시 넘어지고 세웠다가 넘어지고를 반복할 때, 유리가 팔을 들더니 그의 허리에 손을 감았다.
“정말 가관이군.”
재혁은 못 참겠다는 듯 그녀를 밀어내던 손을 놓아버렸다.
그러자 유리가 완전히 재혁에게 몸을 기댔다.
유리가 그의 품에 얼굴을 파묻으며 말했다.
“조금만, 조금만 이렇게 있어 줘.”
“지금 안 일어나면 영원히 내 얼굴 못 볼 줄 알아.”
“오빠…. 재혁 오빠….”
기분 나쁜 알코올 향이 그녀의 입김을 타고 올라왔다.
“하나, 둘.”
“강현준 그놈이… 바람피웠어.”
유리의 말에 재혁은 멈칫했다.
“오빠가 미워서 그놈 만났는데… 남은 게 하나도 없다…. 오빠…. 이제 나 어떡하니….”
아주 찰나 동안 멈춰 있던 재혁의 손이 거칠게 유리를 기둥으로 밀어버렸다.
“으악.”
재혁은 경멸의 눈빛으로 유리를 보며 말했다.
“그래서 그 대용으로 날 찾아온건가?”
“그런거 아니고 너무 힘들어서.”
“너희 문제는 너희가 알아서 해.”
매몰찬 말투였다.
유리의 눈에 눈물이 빠르게 차올랐다.
재혁은 매몰차게 몸을 돌렸다.
등 뒤로 유리의 서글픈 목소리가 들렸다.
“나쁜 놈.”
말와 동시에 유리가 재혁을 향해 달려들었다.
갑작스러운 유리의 돌진에 재혁이 유리 쪽으로 몸을 돌리자, 유리의 두 손이 재혁의 양 볼을 잡더니 그대로 입을 맞추었다.
재혁이 반응하기 힘들 만큼 찰나의 순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하지만 불행은 찰나의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동료 아저씨!”
유리의 뒤쪽에서 찬의 목소리가 들렸다.
재혁은 반사적으로 유리를 밀쳤다.
“악!”
튕겨 나간 유리는 기둥에 다시 부딪혔다.
하지만 재혁은 유리를 살필 겨를이 없었다.
그의 시선에 손을 흔드는 찬과 놀란 눈을 한 이나 엄마의 모습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