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 돌덩이
“매니저요?”
놀라 소리친 것은 영인이 아닌 이나였다.
“그래, 매니저.”
“언제부터요?”
“지금부터.”
“제가 대표님 비서인데, 대표님이 제 매니저라뇨?”
“안 되는 이유라도 있나?”
티격태격하는 두 사람을 보던 영인은 두 손을 펼치며 물러났다.
“고용 관계 잘 해결하시길 바랍니다.”
영인의 뒷모습을 힐끔 바라본 이나가 재혁을 쏘아보며 말했다.
“농담이시죠?”
“농담이었는데, 나쁘지 않은 거 같네.”
“나빠요! 아주.”
“어차피 매니저는 있어야 하잖아?”
“아니요. 필요 없습니다.”
“필요 할거 같은데.”
“없다구요!”
때마침 분장팀에서 이나를 불렀다.
이나는 재혁을 쏘아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홀로 남은 재혁은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혼잣말을 했다.
“틱틱대는 게 너무 귀여워. 계속 괴롭히고 싶단 말이지.”
***
“컷!”
박 감독의 컷 소리에 촬영이 끝났다.
이나는 공손하게 스태프들에게 인사하고 재혁이 앉아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재혁은 이나가 다가오는 동안 그녀를 빤히 쳐다보았다.
“왜요….”
이나가 무안한 듯 묻자 재혁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했다.
“이럴 줄 알았어.”
“뭐가요?”
“잘할 거면서 괜히 겁먹은 척했군.”
“아니에요. 엄청나게 긴장해서 떨었다구요.”
“거짓말, 10년은 연기한 베테랑 배우 같았다고.”
“….”
모두가 의외라는 듯 이나를 바라보았지만, 박 감독만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가 이나에게 다가왔다.
“정이나 씨, 좋아. 연기도 좋고 다 좋은데, 느낌이 좀 어색해.”
“감독님, 저는 좋던데요.”
뒤에 있던 조감독이 끼어들자 그는 한번 째려보고는 다시 말했다.
“캐릭터 연구를 좀 더 해 보자구요. 연락할 테니까, 시간 되면 내려오면 좋겠는데.”
“네, 알겠습니다.”
“그래도 처음치고는 좋았어요.”
박 감독의 말에 이나의 표정이 환해졌다.
“감사합니다.”
촬영이 끝나고 대표실로 올라가는 길, 이나에게 연락이 왔다.
[오후에 회장님께서 썬라이즈 호텔에 방문하실 예정입니다.]
재혁은 또 그런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연락 좀 하고 오시라니까.”
갑작스러운 강 회장의 방문에 호텔이 발칵 뒤집혔다.
총지배인부터 임원들이 모두 소집되었고, 모든 업무가 정지되었다.
한바탕 폭풍이 휘몰아친 후, 호텔 입구에는 재혁을 비롯한 몇몇 임원진들이 나와 있었다.
도착하는 시간조차 정확히 알려 주지 않은 통에 그들은 30분 동안 밖에서 기다려야 했다.
슬슬 재혁의 인내심이 바닥을 드러낼 때쯤 강 회장의 차가 호텔 입구로 진입했다.
차가 멈추고, 직원들이 다가오기도 전에 문이 벌컥 열리며 강 회장이 밖으로 나왔다.
“나 올 때마다 몰려나올래? 늙은이 부담스럽게 해서 못 오게 하려는 속셈이로구나?”
그의 성격을 잘 알고 있는 임원들은 웃으며 고개를 숙였고, 처음 강 회장을 접하는 사람들은 식은땀을 뻘뻘 흘렸다.
“그러게 미리 연락하고 오셔야죠. 아랫사람들은 오시는 것만으로도 피곤한 거 모르세요?”
“이 자식, 호텔 대표 됐다고 할애비를 창피하게 하는 게냐?”
“잘 오셨어요. 어서 오세요.”
두 사람은 가볍게 농담을 주고받으며 호텔 안으로 들어갔다.
강 회장이 가장 먼저 들른 곳은 역시 드라마 촬영장이었다.
때마침 촬영이 한창이었고, 강 회장은 촬영을 방해하기 싫다며 별다른 인사 없이 촬영장을 떠났다.
“이번 기획, 아주 마음에 들어.”
현장을 나오며 강 회장은 흡족한 말투로 말했다.
임원들은 돌려보내고 강 회장은 재혁의 방으로 향했다.
방 안에 마주 앉자마자 재혁이 물었다.
“건강은 어떠세요?”
“걱정 마. 증손자 볼 때까지는 절대 안 갈 거니까.”
“오래오래 사셔야겠네요.”
“올해 안에 가기로 한 거, 잊지 않았지?!”
“….”
때마침 노크 소리가 들렸다.
“들어와요.”
재혁의 말에 이나가 찻잔을 들고 방 안으로 들어왔다.
이나는 긴장한 표정으로 다가와 두 사람 앞에 차를 내려놓았다.
강 회장의 눈빛이 날카롭게 이나를 살폈다.
강 회장의 눈빛을 느낀 재혁이 서둘러 이나에게 말했다.
“나가 봐요. 정이나 씨.”
“네, 알겠습니다.”
눈에 쌍심지를 켠 재혁을 보며 강 회장이 말했다.
“뭘 그렇게 꽁꽁 숨기려고 해?”
“혹시, 이나 보려고 여기까지 오신 거예요?”
재혁의 말이 허를 찔렀는지, 강 회장은 크흠 소리를 내며 화제를 돌렸다.
“그나저나 드라마는 죽어도 안 한다더니, 어쩐 일이냐?”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그래, 잘했어. 홍보에도 훌륭하고, 나쁠 거 없어.”
“이나도 출연합니다.”
“뭐?”
“중간에 배우 한 명이 하차해서 그렇게 됐습니다.”
“허. 이놈이.”
강 회장은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지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저 아이는.”
“제 짝은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허 그래 알아서 해라.”
말은 그렇게 했지만 내심 서운한 눈치였다.
“식사하셔야죠?”
재혁이 묻자 강 회장이 대답했다.
“유리 불렀으니까 같이 해. 호텔 음식도 살펴봐야 하니까.”
“네. 알겠습니다.”
재혁이 고분고분하게 대답했다.
이나의 문제로 한 번 부딪쳤으니 다른 문제들은 강 회장의 뜻대로 내버려 두었다.
자신을 갖고 노는 재혁의 태도를 보며 강 회장은 혀를 찼다.
사람을 다루는 모습이 꼭 자신의 젊은 시절 같아서 더욱 짜증이 났다.
“누구를 닮아서. 쯧.”
“네?”
“아니야. 됐어.”
***
썬라이즈를 둘러본 강 회장은 유리를 불러 함께 저녁 식사를 했다.
개장 전이라 레스토랑은 세 사람만을 위한 장소였다.
“수준이 괜찮구나.”
관자 요리를 먹으며 강 회장이 말하자 옆에 있던 유리가 대답했다.
“오빠가 식당에 신경을 많이 쓰고 있어요. 매일 점심을 여기서 먹는다니까.”
“오너가 그 정도는 해야지. 고로 레스토랑은 호텔의 얼굴인 법이야. 잘하고 있다.”
강회장의 칭찬에도 재혁은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강 회장은 무뚝뚝한 놈이라고 생각하며 다시 유리와 대화를 나누었다.
“일은 할 만하고?”
유리는 재혁을 힐끔 보고는 웃으며 말했다.
“네, 할아버님.”
“그래, 약혼식이 미뤄져서 상심이 크지?”
“괜찮아요.”
“퇴원하면 바로 진행하자.”
강 회장의 말에 유리는 잠시 멈칫하고는 웃으며 대답했다.
“네.”
두 사람이 대화하는 동안 재혁은 묵묵히 음식을 입에 집어넣었다.
그런 재혁의 태도가 못마땅한 듯, 강 회장이 그를 나무랐다.
“대화 좀 하면서 먹어.”
“더 드실래요?”
“이 녀석이! 하여간, 지 아빠 닮아서 살가운 면은 하나도 없어. 안 그러냐? 유리야?”
강 회장의 질문에 유리는 재혁의 눈치를 보았다.
강 회장도 아차 싶었는지 말을 삼켰고, 어색함이 흘렀다.
재혁과 유리가 연인 사이였을 때 그들을 대하던 말투가 나온 것이었다.
재혁은 그 어색함이 싫었는지 포크를 내려놓고 직원을 불렀다.
“여기, 물 좀.”
재혁은 웨이터가 가져온 물로 가볍게 입을 헹구고 냅킨으로 입을 닦았다.
“식사 다 하셨으면 일어나시죠.”
“그래, 거의 다 먹었어.”
유리는 재혁을 원망의 눈초리로 바라보았다.
이렇게까지 할 거 있나 싶을 정도로 그는 냉정하게 굴었다.
밉기도 했지만, 그런 재혁의 냉정함이 더욱 그녀를 끌어당겼다.
현준이 바람피우는 것을 알게 된 순간…. 그녀는 다시 재혁을 원하게 되었다.
당장 무얼 할 생각은 아니었다. 지금은 옆에 두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니까.
유리가 밝게 웃으며 강 회장에게 말했다.
“회장님 저랑 같이 바다 구경가세요.”
***
남은 업무를 마무리하고 시계를 보니 퇴근 시간이 지나 있었다.
대충 업무도 마무리됐고, 시간도 늦어서 이나는 가방을 챙겨 비서실을 나갔다.
밖은 이미 어두워져 있었다.
오랜만에 혼자 보내는 저녁 시간에 이나는 여유롭게 거리를 걷고 싶어졌다.
그녀는 택시 정류장을 지나쳐 집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시원한 바람이 불어와 복잡한 머리를 식혀 주었다.
오랜만에 맛보는 여유에 절로 기분이 좋아졌다.
재혁과 같이 있는 것도 너무 좋지만, 가끔 이렇게 혼자 보내는 시간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자유를 만끽하며 걷고 있는데, 그녀의 휴대 전화가 울렸다.
모르는 번호였다.
“네, 강재혁 대표님 비서실입니다.”
이나는 평소처럼 사무적인 말투로 전화를 받았다.
“강 회장님 비서실입니다.”
“네. 말씀하세요.”
“회장님이 따로 뵙고 싶어 하십니다.”
그녀의 심장에 무거운 돌덩이가 떨어졌다.
드디어 올 것이 오고야 말았다.
강 회장이 애지중지하는 손자, 재혁과의 소문 때문에 여기까지 발령 난 것이 아닌가.
강 회장이 두 사람 사이를 모를 리 없었고, 언젠가는 이런 상황이 벌어지리라고 생각했었다.
그렇다고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는 것은 아니었다.
심장의 떨림을 느끼며 이나가 대답했다.
“어디로 가면 되죠?”
“엠엑스 빌딩 8층으로 오시면 됩니다.”
“네, 알겠습니다.”
이나가 대답하자마자 전화는 끊겼다.
그녀는 심란한 마음에 한참 동안 자리에 서 있었다.
재혁과 함께한다면 언젠가 맞이할 만남.
피할 수는 없었다.
택시를 잡았다.
“기사님, 엠엑스 빌딩으로 가 주세요.”
***
엠엑스 빌딩에 도착해 엘리베이터에 오르며 수많은 생각이 머리를 스쳐 갔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고민해 보았지만, 딱히 뭐라고 대답할지 정하지 못했다.
어느새 강 회장이 있는 8층에 앞에 도착했다.
초인종 앞에 서서 누르는 것을 주저하고 있는데, 띠- 소리가 나며 문이 열렸다.
CCTV로 이나가 도착한 것을 알았던 모양이었다.
이나는 마음을 다잡기 위해 깊은숨을 한 번 들이쉬고 열린 문 안으로 들어갔다.
텅 비어 있는 사무실 안쪽에 불이 켜져 있었다.
이나가 다가가니, 낮에 보았던 비서가 문 앞에 서서 그녀에게 인사했다.
“안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안쪽에는 사무용 책상과 소파들이 놓여 있었고, 소파에 강 회장이 앉아 있었다.
“어서 와요.”
이나는 공손하게 인사한 후 강 회장 앞에 자리했다.
“갑자기 불러서 놀랐지요?”
예상과 다른 온화한 말투였다.
이나는 긴장한 듯 굳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괜찮습니다.”
“허허. 내가 원래 이런 사람이 아닌데, 아무래도 만나서 얘기해야 할 거 같아서 불렀어요.”
“네.”
“우리 재혁이가 정이나 양을 많이 좋아하는 거 알고 있어요. 그렇게 젊은 감정이야 앞뒤 안 가리고 달려드는 거지만, 결혼은 그것만으로는 안 되는 거니까. 적당한 때에 적당하게 떠나 주면 좋겠어서 이렇게 불렀어요.”
“….”
“혹시, 원하는 거 있으면 말해 봐요. 뭐든 상관없으니까.”
이나의 표정이 굳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