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 매니저
“이봐요! 아가씨!”
연기에 들어가자 영인은 평소의 가벼운 이미지와는 다른 진지한 모습을 보여 주었다.
평소와는 다른 영인의 면모에 이나는 혼란스러웠다.
영인이라면 연기를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촬영은 영인과 인혜 두 사람이 서로를 마주 보는 모습을 마지막으로 끝났다.
박 감독은 만족한 표정으로 ‘컷’ 신호를 보냈다.
“장소 이동하고, 한 시간 후에 다음 신 촬영하겠습니다.”
조감독의 신호에 스태프들이 분주하게 장비를 갈무리했다.
그사이 박 감독이 자리에서 일어나 이나에게 다가왔다.
“대표님은 역시 못 오시고?”
“네.”
“허. 촬영장 분위기도 익히고 하셔야 하는데.”
박 감독이 싫은 소리를 하자, 이나가 재혁을 변호했다.
“필요한 부분 말씀해 주시면 제가 잘 전달하겠습니다.”
“말로 되는 게 아니니까. 아. 계속 같이할 거니까 말은 편하게 할게, 이나 씨.”
“네.”
“이거, 내일 촬영분.”
박 감독이 촬영 콘티를 이나에게 건넸다.
“장면 자체가 별로 없으니까 부담 갖지는 마시고, 내일은 이나 씨랑 장 배우랑 나오는 장면이니까 잠깐 합 좀 맞춰 보고.”
영인과 함께한다는 말에 이나는 살짝 망설였다.
각오는 하고 있었지만 막상 그와 단둘이 있어야 한다는 사실이 부담스러웠다.
그때, 영인과 인혜가 다가왔다.
“아, 이분이구나? 현장 발탁됐다는 그 행운아.”
“아, 인혜 씨. 인사해, 여기는 정이나 씨.”
“반가워요. 박인혜예요.”
이나는 인혜가 내민 손을 잡았다.
그녀의 온몸에서는 스타의 여유로운 기품이 흘러나왔다.
“정이나입니다. 잘 부탁드려요.”
“연기 기대할게요. 그럼.”
인혜는 이나를 두고 피곤한 듯 돌아섰다. 그녀의 매니저가 담요를 들고 달려와 그녀의 어깨를 감쌌다.
인혜의 당당한 태도에 이나는 스스로 작아지는 기분이었다.
영인이 이나의 표정을 살피며 말했다.
“부러운가 보네?”
영인의 말에, 이나는 마음을 들킨 것 같아 재빠르게 얼굴을 돌렸다.
“아니.”
“부러울 거 뭐 있어. 너도 금방 저렇게 될 텐데.”
“박인혜 씨처럼 되고 싶은 생각 없어.”
“아니면 말고. 시간 없으니까 30분만 맞춰 보자.”
두 사람은 간이 의자에 앉아 대본을 펼쳤다.
“시작한다. 너는 별자리 중에 어떤 별이 제일 좋아?”
“글쎄. 별자리는 잘 몰라서.”
“생각해 본 적 없어?”
“뭐가 있는지도 잘 몰라.”
이나의 대사를 듣던 영인이 갑자기 연기를 끊었다.
“잠깐, 정말 그렇게 할 건 아니지?”
“뭐, 문제라도?”
“감정이 하나도 없잖아. 책 읽는 것도 아니고.”
“….”
그때 촬영 장비가 넘어지며 주변이 소란스러워졌다.
쨍그랑!
“야! 조심해!”
영인은 주변을 두리번대더니 이나에게 말했다.
“리딩 하기 너무 시끄럽네. 옮기자.”
“그냥 해도 될 거 같은데.”
“시끄러우면 집중이 안 돼.”
“알았어. 어디로 갈 건데?”
영인은 대꾸 없이 일어나 휘적휘적 촬영장을 빠져나갔다.
로비로 나간 영인은 아예 건물 밖으로 나가더니 어두운 주차장 쪽으로 향했다.
“어디까지 가?”
이나가 뒤따라가며 소리쳤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걸어갔다.
띠딕-
주차장 구석에 놓인 빨간 스포츠카에 불이 켜졌다.
영인이 차 문을 열자, 이나는 멀찍이 서서 인상을 구겼다.
“여기서 하자구?”
“여기가 조용하니까. 빨리 와. 끝내고 가게.”
이나가 멀찍이 서서 고민하자 영인은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
“너, 설마 아직 나 좋아하냐?”
“뭐?”
“그러니까 안 타는 거 아니야? 이상한 상상 같은 거 하니까.”
“이봐요. 장영인 씨.”
“아니면 그냥 타, 나 너한테 관심 없으니까. 드라마가 애들 장난도 아니고 프로답게 행동해.”
“….”
이나는 하는 수 없이 보조석에 앉았다.
영인의 얼굴에는 0.1초 정도 미소가 피었다가 사라졌지만 이나는 보지 못했다.
그는 운전석에 손을 뻗은 채로 심각한 척 분위기를 잡았다.
“너, 연기 쉰 지 얼마나 됐지?”
“6년.”
“그 사이 현장 경험도 없지?”
“…응.”
“그러니까 그렇구나. 아까 보니까, 하는 게 학부생 같던데. 연기 연습 안 했어?”
“….”
영인은 경험이 없다는 이나의 약점을 일부러 들추었다. 이나를 주눅 들게 하려는 속셈이었다.
어느 정도 씨알이 먹혔다고 생각했는지, 그는 크게 한숨을 쉬더니 이나를 향해 몸을 돌렸다.
“휴. 그래 할 수 없지. 내가 좀 봐 줄게. 한번 해 보자.”
영인의 몸이 가까이 다가오자, 이나는 본능적으로 몸을 뒤로 뺐다.
그러자 영인이 표정을 굳혔다.
“너, 촬영장에서도 이럴 거야?”
“….”
“카메라 앞에 서면 프로잖아.”
프로라는 영인의 말이 이나에게 거부할 수 있는 자유를 빼앗아 갔다.
이나는 하는 수 없이 뒤쪽으로 기울었던 몸을 영인 쪽으로 살짝 움직였다.
이나가 다가오자, 영인은 이제 됐다는 듯 대본으로 시선을 돌리다가 무언가 생각났는지 다시 이나를 바라보았다.
“너, 결혼했어?”
“어?”
“아, 그때 아들 있는 거 같길래.”
“그게 왜 궁금한데?”
이나가 싸늘하게 대답했다.
영인은 무안한지 말을 돌려 버렸다.
“아니다. 계속하자.”
“….”
드라마에 대한 영인의 말이 이어졌다.
장면과 인물에 대한 분석이며 박 감독의 성향 같은 말이었다.
하지만 이나의 귀에는 한 마디도 들어가지 못했다.
자신의 불안한 상황 앞에 드리운 영인이라는 어두운 그림자에 그녀의 마음은 사시나무처럼 흔들리고 있었다.
***
“그럼 잘 부탁드립니다.”
“네.”
길었던 저녁 스케줄을 끝내고, 재혁은 휴대 전화를 바라보았다.
이나에게서 온 연락은 없었다.
온종일 붙어 있다 보니 문자를 주고받거나 전화를 하는 일이 잘 없는 두 사람이었다.
이렇게 이나 없이 스케줄을 소화하는 것이 오랜만이라, 괜히 그녀가 더욱 보고 싶어지는 재혁이었다.
레스토랑을 나오며 그녀의 이름을 검색하고 통화 버튼을 눌렀다.
띠리리- 신호음 뒤에 통화 중이라는 안내음이 나왔다.
누구에게 전화하는 중일까?
요즘 어머님과는 사이가 좋지 않으니, 찬과 통화하고 있을 것이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걸어가는데, 입구에 서 있는 이나의 모습이 보였다.
휴대 전화를 보고 있던 이나가 고개를 들자 두 사람은 눈이 마주쳤다.
서로를 보자마자 두 사람의 얼굴에 가벼운 미소가 깃들었다.
재혁이 다가서며 말했다.
“혹시 나한테 전화한 건가?”
“맞아요. 대표님도?”
“맞아. 빨리 끝났네.”
“네. 대표님, 저 배고파요.”
“그래? 여기 음식 좋던데, 먹고갈래?”
재혁의 말에 이나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요. 해 줘요.”
의외의 말에 재혁이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
“무슨 일 있었어?”
“아니. 그냥. 대표님이 해 준 밥 먹고 싶어서요.”
“그래, 가자. 맛있는 거 해 줄게.”
***
요리하는 재혁의 뒷모습을 보며, 이나는 자신이 참 약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엄마가 왔으니 집에는 못 간다는 말을 한 사람은 자신인데, 집에서 밥을 해 달라고 한 사람도 자신이었다.
잠시 그를 보고 있으니 눈앞에 작은 접시가 놓였다.
떡갈비를 올린 치즈 리소토였다.
“오늘도 떡갈비네요.”
“일년은 떡갈비만 먹어야 할 거 같네.”
장난스러운 재혁의 말에 이나는 미소를 지으며 음식을 입에 넣었다.
“맛있어요.”
“많이 먹어, 더 있어.”
“네.”
배가 고팠는지 이나는 한 접시를 금세 비웠다.
순식간에 바닥이 비어 버린 접시를 보며 재혁이 말했다.
“배고팠나 보네.”
“네. 많이 배고팠어요.”
“자, 이제 얘기해 봐. 대체 어떤 일이길래 이나가 집에까지 찾아왔는지.”
“대표님. 저 드라마 하지 말까 봐요.”
주눅이 든 듯 시선을 아래로 내리깐 이나의 모습에 재혁은 이상한 낌새를 느꼈다.
“장영인 때문이구나?”
재혁의 말이 이나의 마음을 후벼 팠다.
아니라고 말하고 싶지만 부정할 수 없는 사실에 이나는 입술을 달싹였다.
“아니… 그래, 맞아요. 장영인 때문이에요.”
“불편한 건가?”
“장영인과 함께하면 자꾸만 작아져요. 왜냐하면, 그 사람의 꿈은 성공했고, 내 꿈은 실패했으니까요.”
“실패한 꿈이라.”
이나의 말을 곱씹으며 생각하던 재혁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 무슨 말인지 알겠어. 그럼 장영인만 없으면 되는 건가?”
“그런 말이 아니잖아요.”
“이나를 작게 만드는 사람이라며. 난 그런 사람을 가만히 두고 볼 생각은 없는데 말이야.”
“장영인을 자르기라도 하겠다는 거예요?”
“왜? 못 할 거 같나?”
“하. 됐어요. 그만 얘기해요.”
“정이나.”
“네.”
“지금 네가 만나는 사람이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 감이 안 오는 모양이야.”
“알아요.”
“알면, 누구 앞에서도 주눅 들지 마. 너는 그래도 되는 사람이야.”
“….”
“네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 모르지?”
“내가 뭘 대단하다고.”
재혁이 손을 들어 그녀의 턱 끝을 살며시 잡았다.
“세상에 날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은 너밖에 없어. 알아?”
그의 흔들림 없는 말투와 눈빛에 이나는 마음이 뭉클해졌다.
매일같이 흔들리는 자신을 끝까지 믿어 주는 사람.
재혁은 이나에게 그런 남자였다.
“저녁 잘 먹었어요.”
이나는 마음의 갈피를 잡지 못하고 일어났다.
“이나야.”
그의 다정한 부름에 이나가 돌아보았다.
“넌 최고야. 이 세상 누구보다도.”
이나는 밀려오는 무안함에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잠시 서 있다가 “고마워요.”라고 말하고는 집을 빠져나갔다.
“내일 아침에….”
쾅- 닫히는 문소리에 재혁은 씁쓸하게 입맛을 다셨다.
“이거 봐. 날 막 대하는 사람은 너뿐이라고.”
***
다음 날 아침, 촬영장.
한쪽 구석에 이나가 눈을 감고 앉아 있었다.
“후우. 후우.”
그녀는 심호흡을 하며 마음을 진정시키고 있었다.
그녀에게 영인이 다가왔다.
“어때? 첫 촬영인데?”
영인의 목소리에 이나는 슬며시 눈을 떴다.
그녀의 눈앞에 뻔뻔하게 웃고 있는 영인의 모습이 보였다.
영인은 조금 전까지 재혁이 앉아 있던 자리에 자연스럽게 앉으며 이나를 돌아보았다.
“긴장한 거처럼 보이는데?”
“전혀.”
“너무 긴장하지 마. 처음은 다 그런 거니까.”
어른처럼 구는 영인의 말에 이나가 한마디 쏘아 주려는데, 멀리서 한 스태프가 영인을 불렀다.
“장영인 배우님~ 메이크업 들어갑니다.”
“그래요.”
영인은 대답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 파이팅하자.”
영인이 옆을 지나가면서 그녀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몸에 닿은 그의 손을 시작으로 빠르게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이나가 놀라 어깨를 빼려는데, 등 뒤에서 재혁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깨에서 손 떼지.”
그는 미간을 좁히며 다가와서 이나의 어깨 위에 올려놓은 영인의 손을 들어 신경질적으로 내려놓았다.
그러자 영인은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
“꼭 성추행범이라도 된 기분이네요?”
“연기할 때 빼고는 사적인 터치 금지입니다.”
“대표님, 꼭 남자 친구처럼 말씀하시는군요?”
영인의 말에 이나가 화들짝 놀라 일어났다.
하지만 이나가 말릴 틈도 없이 재혁이 대답했다.
“매니저입니다.”
예상 못 한 대답에 이나가 놀라 재혁을 바라보았다.
재혁은 장난스럽게 웃으며 뒷말을 이었다.
“정이나 배우는 내가 관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