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 캐스팅
이나를 바라보며, 영인은 6년 전의 어느 날을 떠올리고 있었다.
‘영인 씨, 이제 좀 떠야 하지 않아?’
손등을 어루만지는 어느 소속사 사장의 손길을 그는 뿌리치지 못했다.
치열한 배우의 세계.
영인은 알고 있었다.
아무리 실력이 좋아도 운이 있어야 성공한다는 것을, 그리고 지금 이 유혹이 그에게 다가온 첫 번째 운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아버지가 아프셔. 헤어지자.’
생각해 보면 이나와 헤어질 때는 마음이 그렇게 아프지 않았다.
스쳐 지나가는 여자일 뿐이라고 생각했고, 눈앞에 보이는 당근이 너무나 크고 달게만 느껴졌다.
이나가 아이를 가졌다고 찾아왔을 때, 그의 눈에는 이나가 성공을 방해하는 장애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야. 그 아이가 내 아이라는 증거 있어? 너 요즘 다른 남자 만난다며!’
매몰차게 이나를 버린 후, 성공은 순리였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찾아왔다.
처음에는 엑스트라 자리가 들어오더니, 조조연, 조연, 서브 남주에서 결국 이번 드라마를 통해 주연을 꿰찼다.
그렇게 성공의 단맛을 맛볼 때, 이나를 다시 만났다.
이나를 보자 옛 감정이 고개를 치켜들었다.
마치 어제도 본 사람처럼 이나가 가깝게 느껴졌다.
영인이 상념에 젖어 있는 사이, 박 감독의 화난 목소리가 촬영장에 들려 왔다.
“에이, 짜증 나.”
“감독님, 배우 바꾸시게요?”
“몰라 임마!”
“잘된 거 아닌가요? 안 그래도 황보라 문제 많았는데.”
“내가 먼저 바꾸자고 해야지, 저쪽에서 바꾸자고 해서 바꾸면 그게 내 작품이야? 감독은 폼으로 있냐? 폼으로 있어?”
“아닙니다.”
“에이.”
박 감독이 몸을 돌려 앉자 조감독이 그를 설득하듯 말했다.
“저 감독님, 캐스팅 다시 하시려면 시간이 빠듯할 거 같은데요.”
“어쭈? 이 자식 봐라? 조금 있으면 네가 감독한다고 나서겠다?”
“그게 아니라.”
“빨리 쓸 만한 배우 있는지 알아나 봐!”
“네….”
조감독이 물러나자, 재혁이 박 감독에게 다가갔다.
“무슨 일입니까?”
“아. 조연 배우한테 문제가 좀 있어서 말이죠.”
“바꾸는 겁니까?”
“그렇죠. 뭐.”
“개장일까지는 시간 맞춰야 합니다.”
재혁의 냉철한 말에 박 감독은 어이없다는 듯 웃고는 재혁을 비꼬며 말했다.
“네, 뭐. 알고 있죠. 여배우도 여배우인데, 남자 배우는 어쩌나.”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는 사이, 영인이 슬며시 재혁에게 다가와 말을 걸었다.
“안녕하세요. 대표님.”
“장영인 씨.”
“어제 집에는 잘 들어가셨습니까?”
“네.”
박 감독은 의외라는 듯 두 사람을 가리키며 말했다.
“어제 술이라도 한잔하셨나?”
박 감독의 말에 영인은 이나를 보며 말했다.
“아니요. 그냥 일이 좀 있어서요.”
묘한 뉘앙스에 이나가 미간을 좁혔다.
영인은 박 감독에게 물었다.
“그나저나, 황보라 씨는?”
“아, 미안한데 5신은 나중에 촬영하자고, 다음 장면은 준비됐지? 장 배우?”
“그럼요. 그런데 황보라 씨 바꿔요?”
“그렇게 됐어.”
“아. 그럼 새로 뽑아야겠네요?”
“그렇지. 아씨. 짜증 나. 이번 작품은 배우들이 말썽이네.”
박 감독이 은근히 재혁에게 눈치를 주며 말했다.
“감독님, 그럼 제가 추천을 좀 드려도 괜찮을까요?”
“추천? 좋지. 남자 주인공이랑 엮이는 배역이니까. 장 배우가 데려올 수 있으면 웬만하면 오케이지.”
“배우 경력은 없는데, 연기력 하나는 보장하죠. 그림도 좋고.”
영인의 눈빛이 이나를 훑었다.
눈빛을 느낀 이나는 묘한 불안감을 느꼈다.
그 사이 박 감독은 잘 됐다는 투로 말했다.
“그래? 누군데?”
“여기, 대표님 비서로 일하는 정이나 씨요.”
“뭐?”
영인의 말에 박 감독과 재혁, 그리고 주변에 서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이나에게 향했다.
놀란 이나의 두 눈이 토끼 눈처럼 커졌다.
박 감독은 의심의 눈초리로 이나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저 비서님을? 갑자기 왜?”
“저랑 대학 동기입니다.”
“대학 동기? 에이. 이 바닥에서 그런 정도로는 좀.”
“어차피 다음 촬영까지 시간도 떴겠다. 바로 오디션 보시면 되잖아요.”
틀린 말도 아니어서 박 감독이 이나를 향해 물었다.
“흠. 비서님, 생각 있어요?”
“네?”
이나는 무심결에 재혁에게 시선을 돌렸다.
박 감독은 아차 싶었는지 머쓱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 대표님에게 먼저 여쭤봐야 하나?”
“당황스럽지만, 본인이 원한다면.”
재혁의 대답에 다시 모두의 시선이 이나에게로 향했다.
이나는 당황한 듯 머뭇거렸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상황에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그녀의 모습을 보고 있던 영인이 이나를 향해 말을 걸었다.
“어때?”
영인의 말에 그를 바라본 순간 이나는 머릿속의 고민이 깨끗하게 사라졌다.
‘대체 뭘 고민한 거지?’
그녀는 결심한 듯 고개를 들더니 말했다.
“아니요. 왜 이런 제안을 하셨는지 모르겠지만, 거절하겠습니다.”
영인이 뭔가 더 말하려고 할 때, 재혁이 말했다.
“그렇다는군요. 그럼.”
재혁의 단호한 표정 앞에 영인은 다가가던 걸음을 멈추었다.
재혁과 이나는 순식간에 촬영장을 빠져나갔다.
“에이, 뭘 기대했냐. 조감아! 연락 돌려 봐라.”
***
촬영장을 나온 재혁과 이나는 대표실로 향하는 엘리베이터 앞에 섰다.
재혁이 슬며시 이나를 바라보았다.
이나의 표정에서 고민이 엿보였다.
재혁이 물었다.
“왜 거절했지?”
이나는 뭘 그런 걸 물어보냐는 듯 대답했다.
“근무 시간에 촬영하고 있을 수는 없잖아요.”
“배려해 줄 수 있어. 이나의 꿈이었잖아.”
재혁의 말에 이나의 표정이 굳어졌다.
“이제는 그런 꿈 없습니다.”
마침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이나는 더 이상의 대화는 하지 않겠다는 듯 엘리베이터에 먼저 올랐다.
대표실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재혁은 이나의 방 구석에 있는 책장을 떠올렸다.
한 줄을 가득 채운 대본집과 드라마 DVD들.
“거짓말.”
들릴 듯 말 듯 한 재혁의 혼잣말에 이나가 휙 고개를 돌렸다.
마침 대표실에 도착했고, 이번에는 재혁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
이나는 온종일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여기, 대표님 비서로 일하는 정이나 씨요.’
그때의 상황이 계속 머릿속에 맴돌고 있었다.
오디션을 보라는 말을 들었을 때, 그녀는 온몸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배우가 되는 건가?’
멈춰 있던 그녀의 심장이 다시금 뛰기 시작했다.
오후 시간, 멍하니 앉아 촬영 중인 드라마에 대해 검색을 하는 자기 모습을 깨달은 그녀는 화들짝 놀라 컴퓨터를 꺼 버렸다.
‘왜 이래, 이나야.’
망상과 자책을 반복하던 중 엄마에게서 전화가 왔다.
휴대 전화 화면에 뜬 엄마의 이름을 보자 덮어 두었던 화가 치밀었다.
전화를 받지 말까? 싶다가 찬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것일 수 있다는 불안감에 전화를 받았다.
“왜.”
이나가 퉁명스럽게 말하자, 엄마는 주눅이 든 목소리로 말했다.
“바쁜데 미안해. 경비 업체에서 왔어.”
“경비 업체?”
“응, 경비 시스템 설치하고 가더라. 네가 시킨 거야?”
엄마의 말을 듣자마자 재혁이 떠올랐다.
“아니. 나는 아닌데 누군지는 알 거 같네. 알았어.”
“저… 이나야. 저녁은 집에서 먹을 거지? 맛있는 거 해 놓을까?”
“바빠. 끊어.”
“그래, 알았어.”
전화를 끊고 이나는 재혁의 방문을 두드렸다.
똑똑-
“들어와.”
이나는 방으로 들어가 재혁에게 물었다.
“경비 시스템 설치하셨나요?”
“맞아. 왜 그랬냐, 필요 없다, 괜찮다, 이 세 마디는 하지 마. 미리 설치해 주지 않은 내가 한심한 상태니까.”
“감사해요.”
이나의 감사 인사에 재혁은 의외라는 듯 이나를 바라보았다.
“의외군.”
“뭐가 의외시죠?”
“왜 그랬냐, 필요 없다, 괜찮다, 이 세 마디 중에 하나로 대답할 거 같았거든.”
“하지 말라면서요.”
“하지 말라면 더 하는 게 정이나 아닌가?”
“절 청개구리로 보시네요.”
“청개구리 맞지 않나? 언제나 내가 말하는 것에 반대로만 행동하잖아.”
“그건 제가 아니라 대표님이잖아요.”
“난 내 주장이 센 거고.”
“그럼 저도 제 주장이 센 거고요. 그럼 나가 보겠습니다.”
이나가 돌아서자 재혁이 무심하게 말했다.
“고마우면 이따 밤에 우리 집으로 좀 와. 성능 테스트도 할 겸.”
이나의 구겨진 표정을 보고 재혁이 말을 이었다.
“알아. 그럴 때 아니라는 거. 보여 줄 게 있어서 그래.”
“낮에 보여 주시면 되잖아요.”
“그럴 수 없는 거니까 이러는 거겠지. 절대 안 건드릴 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와. 건드릴 거면 여기서 했을 테니까.”
“….”
“11시면 되나?”
“5분 만이에요.”
“알겠어. 신데렐라.”
***
퇴근 후, 엄마가 차려 놓은 진수성찬 앞에서도 이나는 엄마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식사가 끝나고 찬과 놀아 주고 나니 밤이 깊었다.
“찬아. 이제 엄마 없다고 밖에 막 나가고 하면 안 돼. 알았지?”
“응! 엄마도 이제 찬이 두고 가지 마.”
찬의 말에 이나는 마음이 뜨끔했지만, 아무렇지 않은 척 대답했다.
“그럼. 엄마가 항상 찬이 옆에 있을게. 알았지?”
“응!”
찬이를 재우고 거실로 나오니, 엄마가 소파에 앉아 있었다.
못 본 척 방으로 들어갈 때 엄마가 이나를 불렸다.
“이나야.”
“왜.”
“미안해.”
“그 남자는?”
“아직….”
“엄마.”
“응.”
“꼭 찾아.”
“그래.”
이나는 엄마를 두고 방으로 들어갔다.
따뜻하게 위로 한마디 건네지 못하는 자신이 참 못났다는 생각이 들었다.
침대에 누우니 이런저런 생각들이 머릿속에 밀려들어 왔다.
엄마에 대한 걱정. 영인과의 껄끄러운 관계. 재혁과의 관계.
그중에서 그녀의 머릿속을 가장 많이 차지한 생각은 바로 드라마에 대한 것이었다.
“….”
그녀는 몸을 일으켜 벽면의 책장으로 다가섰다.
그간 일을 하며 틈틈이 모아 왔던 책들과 DVD들이 책장에 꽂혀 있었다.
이나는 대본 하나를 빼 들어 열어 보았다.
대사 밑으로 밑줄과 메모들이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그녀는 한참 동안 서서 대본집을 넘겼다.
딩동-
그녀가 대본에 집중하고 있을 때, 휴대 전화가 울렸다.
재혁의 문자였다.
[슬슬 오지.]
시간을 확인해 보니 벌써 11시였다.
이나는 대본을 책장에 다시 꽂아 두고 밖의 상황을 살폈다.
거실은 조용했다.
찬이의 방 문을 열어 보니, 엄마가 찬이 옆에 꼭 붙어 잠들어 있었다.
엄마가 안쓰러우면서도 미운 마음에 이나는 조심스레 문을 닫았다.
현관문을 나서니 재혁의 집 문은 열려 있었다.
그의 집으로 들어갈 때, 왠지 모를 불안감이 엄습했다.
그녀가 멈칫하며 현관에서 서성이는데 재혁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서 와.”
이나는 하는 수 없이 안으로 들어갔다.
재혁은 작은 책 한 권을 든 채로 소파에 앉아 있었다.
“무슨 일이에요?”
재혁이 말했다.
“앉아. 대본 리딩하자.
재혁이 손에 들고 있던 대본을 그녀에게 건넸다.
얼떨결에 받아 든 대본의 겉표지에는 호텔에서 촬영 중인 드라마의 제목이 적혀 있었다.
다시 자리에 앉은 재혁은 다리를 꼬고 앉아 소파에 놓여 있던 대본을 펼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