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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 배우 교체 (44/72)

44. 배우 교체

“설마, 만재 씨?”

이나의 설마하는 말에 엄마가 힘겹게 고개를 끄덕였다.

“응.”

“엄마!”

이나는 이 상황이 믿기지 않았다. 빚지는 것이 싫다며 이나의 등록금조차 현금으로 마련했던 엄마다. 그런데 보증이라니….

하지만 엄마의 미안하다는 말이 모든 사실을 분명하게 말해주고 있었다.

엄마가 그 남자에게 당했다는 사실을.

“미안.”

“만재 씨는 어디 있고?”

“그게… 모르겠어…. 흑흑.”

“모르겠다니? 동물원 갔다 온 지 얼마나 됐다고?”

“그날부터 연락이 안 돼….”

“맙소사….”

참아 왔던 울음이 터지며, 엄마의 눈에서 닭똥 같은 눈물이 떨어졌다.

이나는 깊은 한숨을 한번 내쉬고 엄마에게 물었다.

“얼만데.”

“잘 모르겠어.”

“담보는.”

“가게…랑 집.”

“엄마!”

“돌아올 거야. 지금은 워낙 급하니까.”

“하.”

이나는 참지 못하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미안해. 엄마가 정말 미안해.”

미안하다는 엄마의 말이 이나의 마음을 들쑤셔 놓았다.

그렇다고 위로해 줄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그녀는 엄마를 두고 방 안으로 들어갔다.

어둠 속에 서자 깊은 한숨이 절로 흘러나왔다.

엄마의 연애가 이런 식으로 끝날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이제 엄마도 행복을 찾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너무 순진한 생각이었다.

머리가 아팠다. 재혁과 영인의 문제에 더해 엄마 문제까지, 안 좋은 일이 겹겹이 쌓이는 기분이었다.

“아….”

답답한 마음에 그녀는 문 뒤에 주저앉았다.

잠들 수 없는 밤이 흘러가고 있었다.

***

이나는 걱정에 뜬눈으로 밤을 새웠다.

아침에 일어나자 엄마가 아침을 차려 놓았다. 식사를 하는 동안 엄마는 연신 이나의 눈치를 보았다.

식사가 끝나고 출근할 때까지 이나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잘 갔다 와.”

이나는 대답 없이 문을 쾅- 닫으며 나왔다.

주차장으로 내려가니, 재혁의 차에는 이미 시동이 걸려 있었다.

“안녕하세요.”

이나가 타자 태블릿 화면을 보고 있던 재혁이 슬며시 이나를 보며 인사했다.

“좋은 아침이군.”

차가 출발했지만, 이나는 재혁과 앉아 있는 것이 불편했다.

어제 일이 그녀에게 치부처럼 느껴졌다.

그가 엄마에 관해 물어본다면 선뜻 대답해 주기 어려울 것 같았다.

그렇다고 모른 척할 수만은 없었다. 이나는 앞자리에 앉은 기사의 눈치를 살피고는 먼저 입을 열었다.

“어제는, 감사했어요.”

“찬이는?”

“괜찮아요.”

“다행이군.”

그는 엄마에 관해 묻지 않고 고개를 돌렸다.

“엄마가 당분간 부산에 계실 거 같아요.”

“그것도 잘됐군. 집안일까지 하기 힘들었잖아.”

“….”

조금은 냉랭한 태도가 왠지 서운했다. 이나가 고개를 돌리려는데, 문득 그의 입술에 난 상처가 보였다.

“대표님, 그거 뭐예요?”

“뭐가?”

“입술에 난 상처요.”

“상처? 그런 거 없어.”

“없긴 뭐가 없어요. 여기 다 까졌는데, 봐 봐요.”

이나가 재혁의 턱을 잡고 반대편으로 돌렸다.

누구에게 맞았는지 그의 입술에는 붉은 딱지가 앉아 있었다.

이나가 미간을 좁히며 물었다.

“싸웠어요?”

“넘어졌어.”

“그 말을 나한테 믿으라구요? 설마… 그 사람들 따라갔어요?”

“아니야.”

“무슨 생각으로!”

재혁이 자신의 턱을 잡은 이나의 손을 잡아 깍지를 꼈다.

그리고 차분하게 그녀를 보며 대답했다.

“정말 아니야.”

“….”

미덥지 않았지만, 더 이상 추궁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이나는 할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나가 시선을 앞으로 돌리며 말했다.

“엄마일은 모른척해 주세요.”

“모르는 일이라 모르는 척을 할 수가 없겠어. 그러니까 걱정 마.”

***

유리는 모니터 속 사진을 바라보았다.

화면에는 현준의 교통사고 당시 찍힌 CCTV 사진이 보였다.

흐릿한 화면이지만, 유리는 현준의 차량 앞자리에 앉은 여자가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황보라.

딸깍-

사진을 넘기는 유리의 표정은 남의 일인 듯 무관심해 보였다.

현준과 유리가 팔짱을 끼는 사진에도, 차 안에서 입을 맞추는 사진을 볼 때도, 심지어 두 사람이 모텔 객실에서 찍힌 사진을 볼 때도 그녀는 아무런 표정 변화가 없었다.

“한심하긴.”

유리의 입에서 무미건조한 말이 튀어나왔다.

단 하루 만에 찾아낸 사진들.

바람을 피울 거면 철저하게 숨기기라도 하지, 이렇게 허술하게 걸리다니.

화면을 넘기자 세세하게 적힌 보라의 프로필이 나타났다.

조금은 헤퍼 보이는 미소를 띤 보라의 사진을 보며 유리는 눈살을 찌푸렸다.

“기품 있는 애랑 놀지 그랬니.”

그녀는 현준의 바람보다 보라의 헤픈 모습에 더 짜증이 났다.

바람을 피울 거였으면 자신과 격이 맞는 사람하고 펴야 할 것 아닌가.

사진으로 보이는 보라의 격 낮은 모습에 유리는 화를 낼 마음조차 사라져 버렸다.

현준의 바람기에 대해서는 진작에 눈치채고 있었다.

걸리지만 않았다면 모른 척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허술하게 행동해서 사람을 피곤하게 하다니.

애초에 사랑 때문에 시작한 관계도 아니었다.

오로지 자신을 버린 재혁에게 복수하겠다는 생각으로 선택한 상대.

하지만 바람 상대를 자신이 일하는 공간으로 보냈다는 사실을 그냥 넘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아니, 그녀는 확실하게 응징할 생각이었다.

“부대표님, 바른우리 대표님 도착하셨습니다.”

때마침 비서의 목소리가 들렸다.

“들어오시라고 해요.”

유리의 말이 끝나자마자 문이 열리고, 이 대표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부대표님, 밤사이 평안하셨습니까.”

“앉으세요.”

이 대표가 자리에 앉자마자 물었다.

“저… 아침부터 무슨 일로.”

“어제, 강현준 본부장 전화 받지 않았나요?”

“네?”

“뭐라고 하던가요?”

유리의 시선이 그의 내면을 꿰뚫고 있었다. 그는 전날 최유리 이사의 귀에 들어가지 말게 하라고 했던 현준의 말을 떠올렸다.

본부장과 호텔 부대표의 의견 충돌.

‘큰일 났다. 잘못하다간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지게 생겼어.’

이 대표는 상황을 수습하려는 듯 멋쩍게 웃으며 말했다.

“아하하, 아닙니다. 갑자기 그런.”

“알아보고 맞으면 투자가 끊길 텐데. 똑바로 말씀하신 거 맞나요?”

유리가 정색하자 이 대표는 자세를  공손하게 고쳐 앉으며 대답했다.

“아니요. 죄송합니다. 연락 왔었습니다.”

“다시 묻죠. 뭐라고 하던가요?”

“저….”

“황보라, 배역 늘리라고 하던가요?”

“네.”

“나한테 얘기하지 말라고도 했고?”

“네.”

“그렇군요.”

“네. 감사합니다.”

“황보라 배역 빼세요.”

“네?”

“자꾸 두 번 말하게 하시네요.”

“아. 하하, 그게 저… 제 마음대로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

“내 마음대로 결정합니다.”

“물론 부대표님 마음대로 정하셔도 되시지만, 감독이나 스태프들과도 의논을 좀 해야 하고….”

“박 감독님은 황보라 씨 싫어하지 않나요? 어제도 문제 있었던 걸로 아는데요.”

“그래도, 그게.”

“대표님.”

“네?”

“TS 그룹이 내년에 엔터 쪽 투자 계획 있는 거 아시죠.”

“TS요? 거기는 선박 회사인데, 엔터는 왜….”

“왜냐면 제가 TS 그룹 장녀니까요.”

“?!”

“무슨 말인지 이해하셨나요?”

“네. 정확히 알아들었습니다.”

“비밀 유지도 아시겠죠?”

“네! 물론입니다.”

“좋아요. 가 보셔도 좋아요.”

“네. 그럼 잘 부탁드립니다.”

이 대표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유리에게 90도로 인사했다.

“아, 그럼 새 배우는 어떻게 할까요?”

“그건 알아서 하세요.”

“네, 알겠습니다.”

힘차게 대답한 이 대표는 뒤돌아 유리의 방을 나갔다.

대표가 나가고, 유리는 눈을 가늘게 뜨고 허공을 응시했다.

분노와 함께 막연한 허무함이 밀려와 정신이 아득하게 멀어지는 기분이었다.

그녀는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흔들었다. 생각보다 충격을 받았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아.”

그녀는 해야 할 일을 떠올리고 전화기를 들었다.

***

“부대표님 연락이십니다.”

다이얼에서 들리는 이나의 말에 재혁이 고개를 돌렸다.

안 그래도 출근길에 들었던 이나의 말에 대해 생각을 하던 중이어서 왠지 속마음을 들킨 기분이었다.

“넘기지.”

재혁이 대답하자 이나는 말없이 다이얼을 돌렸다.

“무슨 일이지?”

“오늘 촬영장에 좀 들러.”

“왜?”

“그동안 한 번도 안 들렀다는 얘기 들었어.”

“너한테 다 위임했으니까.”

“그래도 대표가 한번 가 봐야 하는 거 아니야?”

“바빠.”

“알아. 그래도 대표가 할 일이야. 애처럼 굴지 마.”

“애?”

“배우 하라는 거 아니잖아. 얼굴만 비추라고.”

“잔소리가 심하군.”

“잔소리 심한 거 알면 잔소리하게 하지 마. 나도 싫으니까. 끊어.”

뚝-

재혁은 인상을 구기며 끊긴 전화기를 바라보았다.

***

“컷!”

“오 분만 쉬었다 하겠습니다.”

조감독은 박 감독의 눈치를 보며 그에게 다가갔다.

날카로운 컷 소리로 미루어 볼 때 그는 지금 폭발하기 직전이었다.

“어후. 속 터져.”

스크립트를 바닥에 던지는 박 감독의 옆으로, 보라가 고개를 치켜들며 지나갔다.

그녀는 구석에 마련된 의자에 다리를 꼬고 앉아 화를 내는 박 감독을 바라보았다.

“삼류 주제에.”

촬영장이 한참 어수선하던 그때, 재혁이 입구에 나타났다.

짜증을 내던 보라는 재혁을 발견하자마자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그녀는 꼬고 있던 다리를 풀고 냉큼 일어나 재혁에게 달려갔다.

“어머, 대표님 안녕하세요~”

보라는 귀 뒤로 머리를 넘기며 재혁에게 인사했다.

“네.”

촬영장에 감도는 이상한 분위기에, 재혁은 보라의 인사를 받는 둥 마는 둥 하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길길이 날뛰던 박 감독은 재혁을 발견하고는 고개를 돌렸다.

재혁의 등장에, 촬영장의 모든 시선에 그에게로 향했다.

구석에 앉아 있던 영인 역시 재혁과 그 뒤에 선 이나를 발견하고는 몸을 일으켰다.

“저 대표님~ 식사하셨어요?”

보라가 꼬리를 살랑거리며 재혁에게 다가갈 때, 그녀의 매니저가 다급하게 뛰어와 귓속말했다.

미소를 머금고 있던 보라의 얼굴이 순식간에 흙빛으로 변하더니 매니저와 함께 촬영장을 빠져나갔다.

그와 동시에 전화기를 든 조감독의 깜짝 놀라는 목소리가 들렸다.

“네?! 조연 여배우를 바꾸라고요?!”

“야, 그게 무슨 소리야? 전화 이리 줘 봐. 대표님!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립니까?”

박 감독의 표정이 시시각각 변했다.

“아씨! 장난하는 것도 아니고, 왜 맨날 이랬다 저랬다야! 새 배우를 어디서 구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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