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 찬이의 아빠 (1)
이나 엄마가 무거운 표정을 하고 은행에서 나왔다.
그녀는 깊은 한숨을 푹 내쉬고는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돈 보냈어.”
“얼마나?”
“삼백.”
“택도 없어. 이자도 안 되는 거 알잖아.”
“알지. 아는데, 지금 이거밖에 없어. 좀 부탁할게. 가게만 어떻게 안 넘어가게 해 줘.”
“내가 하길 뭘 해. 빨리 그놈이나 찾아!”
전화기 너머로 들려온 말에 엄마의 표정이 굳어졌다.
엄마는 화를 억누르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찾고 있지.”
“그놈한테 돈 떼인 사람이 한둘이 아니야! 뭐 그런 사기꾼 같은 놈이 다 있어? 이나 엄마, 가게 말고 또 보증 든 거 있어?”
“없어…. 뭐가 더 있겠어.”
“대체 어디로 숨은 거야! 연락도 안 되고, 아는 사람도 없고, 답답해 죽겠어. 하여튼, 빚쟁이들이 이나 엄마 찾아다닌대, 돈 받을 데가 거기밖에 없다면서! 그러니까 일단 잘 숨어 있어. 알았지?”
“그래. 알았어.”
“그럼 전화 끊는다!”
뚝-
엄마는 끊긴 전화를 내려다보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가게만 담보로 잡은 거 아니야…. 집까지 잡혀 있어.”
자조적인 혼잣말에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몇십 년 만에 찾아온 사랑이라 믿었던 사람에게 뒤통수를 맞았다.
한 번만 믿어 달라는 말에 속은 것이 화근이었다.
가게도 모자라 집까지 담보로 잡힌 상황에서 빚 독촉은 계속 이어졌다.
그리고 어린이 대공원에서 만난 것을 마지막으로 만재는 잠적해 버렸다.
너무나 원통하고 분한 상황이었지만, 만재를 찾는 것밖에는 별달리 뾰족한 수가 없었다.
이나 엄마는 빚쟁이들을 피해 이나의 집에 머물면서 만재를 찾고 있었다.
“어디 있어. 만재 씨.”
엄마는 울먹이며 도로를 방황했다.
그리고 그 모습을 누군가 몰래 지켜보고 있었다.
***
똑똑-
“들어와.”
“대표님, 먼저 퇴근하겠습니다.”
이나의 말에 재혁은 시계를 바라보았다.
낮에 이나가 조기 퇴근을 하겠다고 했던 말이 떠올랐다.
“찬이 어린이집 간다고 했었나?”
“네.”
“같이 가지. 내가 데려다줄 테니.”
“괜찮아요.”
재혁이 옷을 챙기며 일어나자 이나가 다시 한번 말했다.
“찬이 보기 좀 그래서….”
“그래. 그럼.”
이나는 고개 숙여 인사하고 사무실을 나갔다.
이나가 나가고, 재혁은 다시 서류로 시선을 돌렸다.
그는 며칠 전 의사에게 받은 문자를 떠올렸다.
[특히 심리적으로 타격을 받을 만한 일을 줄이세요.]
생각해 보면 어이없는 말이어서 재혁은 쓴웃음이 나왔다.
심리적인 타격은 예상치 못하게 찾아오는 것인데, 어떻게 줄인다는 말인가?
그는 이나 몰래 예약해 두었던 병원 스케줄을 확인했다.
이나가 나간 김에 갔다 오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밖에서 들리는 엘리베이터 소리를 확인한 후, 재혁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
“수고하셨습니다!”
보라의 이탈로 촬영은 2시간이나 지연되었다.
영인은 박 감독에게 인사하고 빠르게 촬영장을 빠져나왔다.
그가 지하 주차장을 가로질러 갈 때, 전화가 울렸다.
여자친구에게서 걸려 온 전화였다.
“어.”
“오빠, 배고픈데 언제 와?”
“지금 가. 촬영이 좀 지연됐어.”
“빨리 와. 배고프단 말이야.”
“알았어! 기다려.”
짜증을 내며 시선을 돌리는 영인의 눈에 이나의 모습이 보였다.
그녀는 엘리베이터를 빠져나와 로비를 가로지르고 있었다.
영인은 전화기를 든 채로 멀뚱히 서서 이나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이나는 영인을 보지 못했는지, 급한 걸음으로 주차된 자신의 차에 올라탔다.
“오빠, 오늘은 회 먹고 싶으니까. 매니저한테 얘기해서.”
“야. 저녁 먼저 먹어라. 추가 촬영 생겼어.”
“오빠, 오빠.”
뚝-
그는 전화를 끊고 매니저가 타고 있는 차의 앞문을 열었다.
“내려 봐.”
이런 일이 곧잘 있었는지 매니저는 운전대를 움켜쥐며 반항했다.
“안 돼요. 오늘 사장님이 바로 귀가시키라고 했단 말이에요.”
“내리라면 내려, 자식아!”
매니저를 끌어낸 영인은 문을 닫고 시동을 걸었다. 마침 이나의 차가 주차장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그는 서둘러 이나의 뒤를 쫓아갔다.
이나는 영인이 따라오고 있다는 사실을 꿈에도 모른 채 찬이의 어린이집으로 향했다.
시간은 넉넉했지만, 그녀가 간과한 것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이곳이 부산이라는 것.
초보 운전자들은 발도 들여놓기 힘들다는 냉혹한 드라이버들의 도시답게, 차들은 도로를 무섭게 질주했다.
“운전 똑바로 해!”
한바탕 욕을 쏟아 내고 질주하는 초록색 택시를 바라보며, 이나는 쥐고 있던 핸들을 굳게 다잡았다.
하지만 너무 긴장한 탓일까?
결국, 도로가 바뀌는 혼합 차선에서 사고가 났다.
쿵-
사고가 나자마자 대머리의 중년 남성이 목덜미를 잡으며 차에서 내렸다.
“아니! 눈을 어디다 달고 다니는 거야! 어?! 야, 나와 봐! 나와!”
남자는 다짜고짜 다가와 운전석을 두드렸다.
“아….”
사고의 충격 때문에 머리가 띵했다.
이나가 나오지 않자, 남자는 흥분하여 운전석 문을 잡아당겼다.
“어쭈? 버티겠다 이거냐? 나와! 나오라고!”
덜컹거리는 소리가 격해질 때, 밖에서 어어? 하는 소리가 나더니 소란이 그쳤다.
“보험 부르지, 왜 몸을 쓰나?”
이나는 깜짝 놀라 창밖을 봤다.
문밖에, 험악하게 인상을 쓰고 사고를 낸 남자를 위협하고 있는 영인의 모습이 보였다.
***
병원 응급실.
이나는 다급한 마음으로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화를 받지 않아-”
찬이의 하원시간이 다가오는 중이어서 그녀는 마음이 급했다.
고민하던 이나는 하는 수 없이 재혁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 무슨 일?”
“교통사고가 났어요.”
“뭐? 몸은 괜찮아?”
“네. 조금 뻐근한 정도예요.”
“지금 어디야? 내가 가지.”
“그거보다, 엄마가 전화를 안 받으세요. 그래서 말인데, 찬이 좀 데리러 가 줄 수 있어요?”
“….”
“미안해요. 괜한 부탁 해서.”
“아니, 이나에게 가야 하나 찬이에게 가야 하나 잠깐 고민했어. 찬이 데리고 바로 그쪽으로 가지.”
“아니, 괜찮아요. 곧 나갈 거예요.”
“아니야. 그냥 있어. 후유증이 있을 수 있으니까. 검사도 다 해 보고.”
“네. 일단 오늘은 나가구요. 찬이 어린이집 문제도 해결해야 하고.”
“그냥 있으면 좋겠는데.”
“무리하지 않을게요. 약속해요.”
“그래. 그럼 연락하지.”
“네.”
뚝-
전화를 끊은 이나는 옆 침대를 바라보았다.
옆에는 영인이 치료를 받으며 온갖 엄살을 다 떨고 있었다.
“아야야야.”
“환자분, 가만히 좀 계세요. 살짝 까진 거뿐이니까.”
“주먹으로 맞았다구요! 주먹으로!”
이나는 그 모습을 보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대체 어디 있다가 튀어나온 걸까?
간호사가 치료를 끝내고 돌아가자, 영인은 상처 부위를 쓰다듬으며 불평을 늘어놓았다.
“좀 살살 좀 하지.”
“왜 따라온 거야?”
이나가 불쑥 묻자 영인은 씨익 웃으며 말했다.
“따라오긴, 촬영 끝나고 집에 가는 길이었다고. 정이나 씨?”
영인이 빙긋 웃으며 이나의 이름을 불렀다.
“….”
“도대체 왜 숨긴 거야? 숨긴다고 숨겨지나?”
“아는 척하고 싶지 않았을 뿐이야.”
“야 서운하다. 우리 사이가.”
“우리 사이가 뭔데?”
이나가 정색하며 영인의 말을 끊었다.
영인은 머쓱한 표정을 짓다가 대답했다.
“친한 지인 사이?”
영인의 대답을 무시하며 이나는 고개를 돌렸다.
더 이상 영인과 대화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다시 영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무리 그래도 고맙다는 인사 정도는 해야 하는 거 아니야? 너 때문에 배우가 얼굴을 다쳤는데.”
“….”
“참, 나.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가는 건데.”
이나는 ‘그냥 가지!’라고 소리치고 싶은 마음을 꾹 억누르며 그에게 말했다.
“감사합니다. 장영인 배우님.”
영인은 성공했다는 듯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별말씀을. 그나저나 강재혁 대표도 웃기네? 뭐하러 니 이름을 숨겨줘? 남자친구라도 되는 모양이지?”
영인이 이나를 떠보듯 말했다.
이나는 별다른 말 없이 그에게서 몸을 돌렸다.
이후로 영인이 계속 이나에게 말을 걸었지만, 그녀는 아무런 대꾸를 하지 않았다.
다시는 영인과 엮이고 싶은 생각은 눈곱만치도 없었다.
***
검사가 끝나고 나오는 길, 영인이 그녀의 뒤를 따라왔다.
“태워 줄게.”
“됐어. 보험사에서 빌려준 차 있어.”
이나는 보험사에서 제공해 준 렌터카에 올라타 시동을 걸었다.
하지만 그녀의 바램과는 다르게, 랜터카는 드르릉 소리만 낼 뿐 시동이 걸리지 않았다.
당황한 이나가 몇 번을 시도해 봤지만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다.
난감해하는 중에, 영인이 운전석 차창을 두드렸다.
“그냥 내 차 타고 가지?”
몇 번의 시도 끝에 이나는 포기하고 차에서 내렸다.
“생각이 바뀌었어?”
끝까지 치근덕대는 영인을 피해 이나는 도로로 걸어갔다.
그때, 갑자기 현기증이 나서 이나는 자리에서 비틀거렸다.
그 모습을 본 영인이 재빠르게 다가와 그녀를 부축했다.
이나는 벌레가 몸에 닿은 듯 그의 손길을 쳐냈다.
“내 몸에 손대지 마.”
“알았어. 알았으니까 내 차 타고 가, 이 몸으로 어디 간다 그래?”
“됐어.”
영인의 손길을 뿌리치고 다시 걸어가던 이나는 다리에 힘이 풀려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
아파트 앞에 차가 멈춰서자마자 이나가 내렸다.
“오늘은 감사했습니다.”
“별말씀을. 필요하면 언제든지 부르라고.”
“그런 일은 없을 겁니다.”
이나가 휙 돌아 아파트로 들어가는데 영인이 그녀를 불렀다.
“야, 정이나. 우리, 좀 친하게 지내면 안 되냐?”
“네. 그럴 생각 없습니다.”
이나가 차갑게 대답하고 돌아섰다.
영인이 다시 그녀를 불렀다.
“미안해!”
멈칫.
이나가 돌아서자 영인이 말을 이었다.
“죄책감이 좀 들어서 그래.”
“무슨 죄책감?”
“그때, 헤어지고 두 달 지나서 우리 집 앞에 찾아왔었잖아.”
영인의 말에 이나는 깜짝 놀랐다.
그가 모두 잊었을 거라고 생각했다.
아니, 잊었어야만 했다.
“그때, 너무 모질게 대한 게 아닌가 해서. 생각해 보면 너도 무서웠을 텐데, 내가 너무했어. 그래서….”
“니 말대로, 앞길 막으려고 했던 말이야.”
이나는 애써 차가운 척 말하고는 그에게서 돌아섰다.
돌아서는 그녀의 입술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날 영인이 했던 말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야! 지워! 누구 앞길 망치려고.’
이나가 돌아서는 그때, 차 한 대가 이나 앞에 멈춰 섰다. 그리고 앞 창문이 열리더니 찬이가 이나를 불렀다.
“엄마!”
놀란 이나의 시선이 휙 돌아갔다.
앞좌석의 열린 차창으로 재혁과 찬의 모습이 보였다.
그녀는 순간 뒤돌아 영인을 바라보았다.
영인의 시선이 차창에 매달려 얼굴을 내밀고 있는 찬이에게 향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