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 질투
이나가 화장실을 향해 달려가는 사이, 보라가 내려왔다.
“정말 죄송해요. 손이 미끄러져서.”
보라는 손수건을 꺼내 재혁의 젖은 옷을 닦으려 했다.
그러자 재혁은 몸을 비틀어 보라의 손길을 피했다.
그는 고개를 들어 다시 한번 난간을 확인했다.
일부러 던지지 않았다면 그에게 커피가 쏟아질 일이 없을 만한 거리였다.
“저기 서 있나?”
재혁이 차갑게 말했다.
자신에게 잘못한 사람에게 예의를 갖출 만큼 그는 너그러운 사람이 아니었다.
보라는 상냥함을 가장한 유혹하는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네, 기대서 있다가 실수로 떨어뜨렸어요. 정말 죄송합니다.”
“커피가 혼자 날아왔나 보군.”
“네?”
재혁의 차가운 태도에 그가 만만치 않겠다는 생각을 하며 보라가 말을 돌렸다.
“죄송해서 그러는데, 전화번호라도 알려 주시면 제가 세탁비를….”
할 때, 재혁이 말을 끊었다.
“여기 배우인가?”
“네? 네. 슈퍼모델 황보….”
“촬영장에 청구하지.”
재혁은 보라를 지나쳐 갔다.
보라는 당황했다. 자신이 유혹하는데도 넘어오지 않는 남자라니….
그를 다시 부르려 해도, 재혁은 이미 화장실 쪽으로 사라지고 없었다.
***
재혁은 빠른 걸음으로 화장실로 향했다.
보라와 대화할 때, 이나를 따라가는 영인의 모습을 봤다.
아까 낮에 보았던 이나의 태도를 보아서는 두 사람 사이에 모종의 관계가 있는 것이 분명했다.
재혁의 직감은 그 관계가 쉽게 넘길 만한 것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었다.
화장실에 다가가자, 꺾인 복도 안쪽에서 이나의 목소리가 들렸다.
“정말 어이없네, 우리가 어떤 사이였는데!”
“잘.못.보셨다구요.”
복도 끝에 재혁의 발걸음이 멈췄다.
대화가 계속 들려왔다.
“너, 혹시 내가 창피하냐? 라고, 정이나 씨였으면 말했을 텐데요. 너무 닮아서 그랬습니다. 실례지만 성함이 어떻게 되시죠?”
영인의 말 뒤로 이나가 잠시 침묵했다.
그 침묵에서 재혁은 이나의 곤란함을 느꼈다.
“제 이름은.”
“여기 있었군요. 김인하 씨?”
재혁의 목소리에 영인이 휙 고개를 돌렸다.
“강재혁 대표님?!”
“너무 늦는군요.”
재혁의 목소리가 들리자, 이나는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꼭 들켜서는 안 되는 장면을 들킨 기분이었다.
“옷을 갈아입어야겠군요. 빨리 갑시다.”
“네.”
재혁이 돌아서자 이나가 영인을 지나쳐 재혁의 뒤를 따라갔다.
영인은 두 사람의 모습을 의심 가득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영인은 재혁에게서 정적을 경계하는 수컷의 태도를 느꼈다.
‘혹시?’
영인의 마음 안에 정체 모를 질투가 피어나고 있었다.
“대표님!”
이나가 재혁의 뒤를 급하게 따라왔다.
그러자 재혁이 이나를 향해 몸을 돌렸다.
“거짓말 한건가?”
이나는 시선을 내리깔며 대답했다.
“네.”
재혁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몸을 돌려 복도를 걸어갔다.
이나는 죄인이 된 기분을 느끼며 재혁을 불렀다.
“저!”
“뭐, 더 할 말 있나?”
“무슨 사이인지 안 물어보세요?”
“말하고 싶지 않으니까 말하지 않았겠지.”
“….”
“말하고 싶지 않은 건 말하지 않아도 돼. 그게 연인이건 상사건 말이야. 올라가자. 커피가 찝찝해서 못 견디겠어.”
그런 게 아니라고 변명하고 싶었지만, 차마 말을 꺼내지 못했다.
그 사이 재혁은 엘리베이터로 향하고 있었다.
이나는 한숨을 푹 쉬고 그의 뒤를 따라갔다.
대표실에 도착하자마자 재혁은 젖은 셔츠를 벗어 던졌다.
“옷 좀.”
이나는 옷장에서 셔츠를 챙겨 재혁의 방으로 들어갔다.
“여기에 두고 가겠습니다.”
이나가 테이블 위에 셔츠를 두고 돌아서려는데, 재혁이 그녀를 불렀다.
“잠깐. 젖은 옷 가져가.”
이나가 멈춰 서자, 재혁이 단추를 풀기 시작했다.
셔츠 사이로 보이는 그의 맨몸에 이나는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숙였다.
재혁은 곧은 시선으로 이나를 응시하며 옷을 벗었다. 그리고 벗은 셔츠를 이나에게 내밀었다.
“자.”
이나가 다가와 그의 셔츠를 받아들고 재혁에게 새 셔츠를 건넸다.
하지만 재혁은 이나가 건넨 셔츠를 받지 않았다.
이나가 슬며시 고개를 들자, 재혁이 그녀를 보며 말했다.
“정이나 씨가 입혀주지.”
그는 자연스럽게 팔을 벌리며 돌아섰다.
잔근육이 세세하게 자리 잡은 재혁의 뒷모습에 이나는 심장이 떨려왔다.
이나는 침을 한 번 꼴깍 삼키고 그에게 다가갔다.
한쪽 팔의 소매를 끼워 잡아당기자 재혁이 이나를 향해 몸을 돌렸다.
“!!”
셔츠를 두른 상태로 재혁의 얼굴이 눈 앞까지 다가왔다.
그는 질투심이 가득한 눈빛으로 이나를 보며 물었다.
“내가 걱정해야 되는 남자인가?”
앞뒤가 없는 말이었지만, 이나는 영인에 관한 질문인 것을 알았다. 괜히 말이 퉁명스럽게 나왔다.
“….”
“말해. 그 남자에 대해 단 하나도 빠짐없이 모조리.”
그의 눈빛은 집요하게 이나를 쫒으며 대답을 요구하고 있었다.
“장영인 씨는, 6년 전 그 남자예요.”
이나가 다시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그 한마디로도 재혁은 더 이상의 설명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숨 막히는 침묵에 이나는 꼼짝할 수가 없었다.
그때, 재혁이 손끝으로 이나의 턱을 가볍게 들어 올렸다.
다시 그와 시선이 마주쳤다.
그의 눈빛은 그 어느 때 보다 이나를 욕망하고 있었다.
“그래서 지금은 어떤 마음이지?”
“아무런 감정도 남아있지 않아요! 다만, 당신에게 말하는게 무서웠을 뿐이예요.”
“다시는 나에게 거짓말 하지마. 알았나?”
“알겠어요.”
“기억해, 난 내 여자를 다른 남자와 나눠 갖지 않아.”
그는 눈을 감으며 이나의 입술을 머금었다.
그의 농밀한 혀가 합쳐진 입술을 타고 넘어왔다.
두 사람의 몸이 소파 위로 기울었다.
이제는 능숙해진 그의 침범에 이나는 두 눈을 감았다.
***
한 시간 뒤, 유리가 대표실을 방문했다.
“사고 났다며?”
“그런 것도 사고라면. 촬영 시작했나?”
“막 첫 장면 찍는 거 보고 오는 길이야.”
“서브 남주 역할은?”
“글쎄, 감독하고 제작사에서 할 일이니까 나는 잘 모르겠네?”
“빨리 구하라고 해.”
“급하면 대표님께서 직접 출연하시죠?”
유리의 말에 재혁이 인상을 구겼다.
“농담한 거 가지고 뭘 그렇게 인상을 구겨? 하기 싫음 안 하면 되는 거지.”
“자꾸 쓸데없는 말로 회장님께 바람 넣지 마.”
“바람 넣은 적 없어. 오빠 때문에 벌어진 일이니까 나한테 떠넘기지 마.”
재혁은 말싸움을 하고 싶지 않아 대화를 돌렸다.
“촬영 일정 늘어나지 않도록 조율 잘해. 촬영보다 우리 개장이 우선이야.”
“물론이지.”
***
“컷! 컷!”
신경질적인 박 감독의 목소리에 촬영장의 분위기가 얼음장처럼 차갑게 가라앉았다.
“이봐! 황보라 씨! 계속 그딴 식으로 할 거야?!”
“뭘요?”
“연기를 하라고! 대사만 읽지 말고! 고작 세 마디 하는데, 지금 몇 번째야?! 어?!”
“아, 짜증 나. 뭘 더 어떻게 하라고. 싫으면 지가 와서 하던가.”
모두에게 들리도록 하는 보라의 혼잣말에 박 감독이 버럭 소리쳤다.
“뭐라고?! 야! 황보라!”
보라는 박 감독을 한 번 흘겨보더니 그대로 촬영장을 박차고 나갔다.
“이봐! 거기 안 서?!”
뒤에서 들리는 박 감독의 호통을 무시한 채 보라는 복도로 걸어 나갔다.
“지가 무슨 봉진호라도 되는 줄 아나. 정말 어이없어서.”
그녀는 휴대 전화를 꺼내 현준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오빠! 나 못 해 먹겠어! 짜증 나!”
“또 왜.”
“주연 주기로 했잖아! 왜 약속 안 지켜?”
“내가 말했지? 너 왜 이렇게 말길을 못 알아먹어?”
“싫어! 주연 자리 다시 안 내놓으면 내가! 엄맛!”
전화기에 대고 소리치던 보라는 복도를 돌다가 한 여자와 부딪쳤다.
그 총격으로 보라는 휴대폰을 떨어트렸다.
잔뜩 화가 난 표정으로 앞의 여자를 바라본 보라는 여자의 얼굴을 보자마자 말을 잃고 자리에 굳어버렸다.
“최… 최유리 이사님?”
“황보라 배우시군요.”
“안녕하세요.”
바닥에 떨어져 있는 휴대 전화에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휴대 전화는 유리의 발아래 떨어져 있었다.
유리는 별생각 없이 휴대 전화를 줍기 위해 허리를 숙였다.
“보라야? 황보라?!”
휴대 전화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에, 유리의 등 뒤로 서늘한 기운이 지나갔다.
너무나 익숙한 목소리였다.
그때 보라가 소리쳤다.
“최유리 부대표님! 제가 할게요!”
그녀가 잠시 멈칫하는 사이 전화가 꺼지고, 화면 위로 저장되어 있는 이름이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보라는 쏜살같이 다가와 휴대폰을 낚아챘다.
“죄송합니다. 제가 바빠서.”
보라는 사과를 하는 둥 마는 둥 하고 다급하게 사라졌다.
유리는 몸을 돌려 멀어지는 보라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조금 전 휴대 전화에 보였던 번호의 뒷번호를 읊조렸다.
“호구. 6378.”
너무나도 익숙한 현준의 뒷번호.
여자의 촉이 신호를 보내왔다.
유리는 몸을 돌려 촬영장으로 향했다.
***
유리가 촬영장에 나타나자 박 감독을 달래고 있던 이 대표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이고, 부대표님, 촬영장에는 어쩐 일로 오셨습니까?”
유리는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촬영이 멈췄네요?”
“아하하 쉬는 시간입니다.”
유리는 촬영장 분위기를 살폈다. 어색해진 분위기가 그냥 쉬는 시간 같지는 않았다.
유리가 언짢은 기색으로 이 대표에게 말했다.
“대표님, 저랑 얘기 좀 하시죠.”
***
집무실에 마주 앉자 유리가 입을 열었다.
“촬영은 왜 멈췄습니까?”
“그게… 배우와 감독 사이에 마찰이 좀 있었습니다. 하하. 촬영장에서는 흔한 일이니까. 너무.”
“그 배우가 누구죠?”
“그게… 황보라 씨입니다.”
“또요?”
“네.”
“촬영 일자 맞추셔야 합니다. 알고 계시죠?”
“네… 물론입니다.”
“대표님. 혹시 황보라 씨 캐스팅, 혹시 외부 압력이 있었습니까?”
흠칫하는 이 대표의 반응에 유리의 미간이 좁아졌다.
“있었군요?”
“압력까지는 아니고.”
“누구죠?”
“그게.”
“투자 끊을까요?”
“강현준 본부장님이 연락을 주시긴 했거든요. 괜찮은 배우가 있다면서.”
현준의 이름이 나오자 유리의 표정이 싸늘하게 굳었다.
이 대표는 말실수를 깨닫고 급하게 수습하려 했다.
“하지만 꼭 써야 한다거나, 그렇게 말씀하신 건 아니구요!”
“알았습니다.”
“네?”
“알았어요. 말씀드린 기간만 잘 확인해 주시고, 나가 보시죠.”
“아. 네.”
이 대표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 대표가 나간 후, 유리는 조금 전 보라와 마주쳤을 때를 떠올렸다.
‘보라야! 황보라!’
의심은 맑은 물에 떨어진 잉크처럼 마음속에 번져 갔다.
“내가 여기 버젓이 있는데, 바람피운 여자를 보냈다?”
유리의 눈빛이 차갑게 식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