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 영인
‘엄마!’
멀어지는 아버지의 뒷모습을 보며 어린 재혁은 애처롭게 소리쳤다.
뜨거운 불꽃이 혀를 날름대며 어머니를 찰나. 갑자기 차에서 폭발이 일었다.
펑!
***
재혁은 악몽에서 깨어났다.
그의 온몸은 식은땀으로 흥건하게 젖어 있었다. 증세는 계속해서 심해져, 이제는 매일 악몽을 꾸었다.
그렇다는 것은 언제 증상이 다시 나타날지 모른다는 뜻이기도 했다.
‘병원에 가 봐야겠군.’
그가 골똘히 생각하고 있을 때, 이나가 그에게 말했다.
때마침 이나에게 문자가 왔다.
[깨어나실 시간이십니다.]
***
“엄마가 있는 동안 따로 들어가는 게 좋겠어요.”
코스를 달리며 이나가 말했다.
“내가 앞집에 사는 거 말 안 했나?”
“네.”
“그냥 말하는 건 어때?”
재혁의 말에 이나는 조금씩 속도를 늦추더니 자리에 멈췄다.
재혁 역시 몇 발자국 더 가다가 멈춰서 이나를 바라보았다.
“대표님.”
그녀의 심각한 태도에 재혁이 말했다.
“알았어. 원하는 대로 해.”
그는 씁쓸한 표정으로 다시 뛰어갔다.
이나는 사실 영인에 대해 말을 꺼내려는 중이었다.
막상 말하려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다음에 말해야겠다고 생각하며 그의 뒤를 쫓아갔다.
일이 점점 복잡해지고 있었다.
엄마는 이곳에서 며칠 더 묵을 생각인 듯했다.
명절에도 가게 문을 열던 사람이라 이나는 엄마의 말이 의아했지만, 올라가라고 보챌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더니, 반환점을 돌아 집 쪽으로 향하려는데, 누군가 재혁을 불렀다.
“강재혁 대표님!”
소리가 난 곳을 돌아보니, 영인이 밝은 미소를 지으며 달려오고 있었다.
“아, 장영인 씨.”
“?!”
다가오는 영인을 보자 이나는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어느새 다가온 영인은 재혁 앞에 멈춰 섰다.
“이런 데서 만나다니 반갑습니다.”
“여긴 어쩐 일로?”
“네, 작품 준비하는 동안 이곳에서 지내기로 했습니다. 아, 인사해. 강재혁 대표님.”
영인은 옆에 서 있는 젊은 여자에게 말했다.
“어머! 실물이 훨씬 멋있으시네요.”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금발 머리 여자가 재혁에게 인사했다.
“감사합니다.”
영인의 시선이 뒤에 서 있던 이나에게 향했다.
“어제는 실례가 많았습니다.”
영인의 사과에 이나는 대꾸 없이 고개를 숙였다.
영인의 눈빛이 집요하게 이나를 쫓고 있었다.
이나는 그와 눈을 마주칠 수 없어서 몸을 살짝 돌리고 섰다.
영인이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그런데 정말 닮았네요. 정말 정이나 아니,”
영인의 말이 끝나기 전에 재혁이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바빠서 가봐야겠군요.”
영인은 재혁이 내민 손을 어쩔 수 없이 다시 잡았다.
인사를 마친 재혁이 이나를 돌아보며 말했다.
“김 비서 갑시다.”
그리고는 곧장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이나는 시선을 사선으로 내리 깐 채로 재혁의 뒤를 따라갔다.
이나가 지나갈 때, 영인은 그녀의 얼굴을 자세히 쳐다보았다.
그 순간 그는 이나의 정체를 확신했다.
‘정이나야.’
두 사람이 멀어지자, 영인의 여자 친구가 물었다.
“오빠, 누구야?”
영인은 멀어지는 이나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말했다.
“전 여친.”
***
아파트 앞에 도착할 때까지 이나는 좀처럼 진정이 되지 않았다.
생각에 빠져서 걸어가다가 재혁의 등에 머리에 부딪혔다.
“죄송해요.”
“뭘 그렇게 생각해?”
“그냥, 이것저것.”
이나는 죄를 지은 사람처럼 재혁의 눈빛을 피하다가 입을 열었다.
“고마워요. 모른 척해준 거.”
재혁은 이나가 민망해할까 봐 일부러 말을 돌렸다.
“따로 들어가야겠지?”
이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문 안으로 사라지는 재혁의 뒷모습을 보며 이나는 망설였다.
그에게 말해야 하나? 계약 연애라지만, 엄연히 연인이었다.
이제는 감정이 남아 있는 것도 아니었는데 차마 입술이 떨어지지 않았다.
“재….”
이나가 힘겹게 그의 이름을 부를 때, 갑자기 재혁이 뒤돌아섰다.
이나는 깜짝 놀라 하려던 말을 삼켰다.
“이따 저녁 같이하자.”
영인에 대한 질문이 아닌 것에 이나는 마음을 쓸어내리며 말했다.
“엄마가 계시는 동안은 어려울 거 같아요.”
“아쉽군.”
그는 조금 아쉬운 듯 대답하고 아파트 단지 안으로 사라졌다.
갑자기 피곤이 몰려왔다.
이나는 눈에 보이는 벤치로 가서 앉았다.
“후.”
깊은숨을 내쉬며 마음을 진정시키려 노력했다.
‘하필….’
그녀가 고민에 빠져 있는데, 찬의 목소리가 들렸다.
“엄마다!”
엄마와 찬이 이나에게 다가왔다.
“찬아! 어디 갔다 와?”
“할머니랑 슈퍼!”
“아침부터?”
“응! 소시지 샀어.”
이나가 시선을 돌리자 엄마가 다가오며 말했다.
“잠자리가 바뀌어서 잠이 안 오나.”
“응. 아무래도.”
“넌 아침부터 어디 갔다 와?”
“운동.”
“운동? 평소에 안 하던 운동을 왜?”
“이제 체력 관리해야지.”
“들어가자. 찬거리 좀 사 왔어.”
“찬거리는 왜?”
“먹을 게 떡갈비밖에 없더라.”
“아.”
찬이 이나의 손을 잡아끌었다.
“엄마 가자!”
찬의 손을 잡고 나서야 이나는 재혁에게 영인에 대해 말하지 못한 이유를 깨달았다.
그녀의 머릿속에 6년 전 그때의 기억이 떠올랐다.
임신 사실을 알고 고민 끝에 영인을 찾아갔던 그 날.
' 너 몸 함부로 굴리고 다닌다며? 내 아이인지 아닌지 어떻게 알아?'
그가 이나에게 했던 말이 가슴에 상처가 되어 남았다.
찬이 누구의 아이인지 몰랐지만, 이나는 그 말 때문에 재혁을 찾아가지 않았다.
사랑하는 재혁에게만은 그런 상처를 받고 싶지 않았으니까.
이나는 물끄러미 찬이를 바라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
썬라이즈는 촬영 준비로 이른 아침부터 분주했다.
여기저기에 촬영장비들이 설치되었고, 스태프들과 배우들 그리고 배우들의 매니저며 코디들까지 모이자 로비는 발 디딜 틈이 없었다.
개장 준비로 바쁘게 지내던 직원들은 배우들을 보기 위해 촬영장 주위로 몰려들었다.
“이야. 드라마는 이렇게 촬영하는구나?”
“그르게. 되게 간단해 보였는데, 장난 아니네.”
“장영인은 어디 있어?”
“몰라. 오겠지.”
“여기서 뭐 해!”
“아! 지배인님.”
“놀러 왔어?! 빨리 제자리로 안 가?”
“넵!”
급하게 뛰어가는 직원들을 보며 지배인은 짜증 섞인 말을 내뱉었다.
“어후. 무슨 드라마를 찍는다고. 바빠 죽겠는데.”
한편, 보라는 정신없는 1층을 벗어나 2층 난간에 몸을 기대고 있었다.
그녀는 불만이 가득한 표정이었다.
현준이 보라에게 약속한 배역은 여주인공이었다. 하지만 막상 그녀에게 주어진 역할은 서브 여주였다.
‘이걸로도 감지덕지해.’
배역이 정해진 날, 전화기 너머로 들리던 현준의 목소리가 떠오르자 보라는 불쑥 짜증이 났다.
“짜증 나. 강현준. 이인자 주제에.”
그 사이, 입구에 여주인공 인혜가 나타났다.
어떻게 알았는지 그녀를 기다리고 있던 팬들이 인혜의 주위로 몰려드는 모습이 보였다. 보라는 질투 어린 시선으로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원래는 저 자리가 자신의 자리였어야 한다는 생각이 머릿속에서 떠나지를 않았다.
치미는 짜증에 그녀는 손에 들고 있던 커피잔을 인혜에게 던지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다.
“짜증 나, 정말.”
그녀가 질투심에 홀로 불타고 있을 때, 입구에 다시 소란이 일었다.
“어?”
멀리서 봐도 눈에 딱 띄는 외모의 남자가 들어오고 있었다. 외모만 놓고 보면 드라마 남자 주인공인 영인보다 더 배우처럼 생긴 사람이었다.
보라는 처음 보자마자 그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광화문 사거리 전광판에 붙어 있는 재혁의 모습을 모를 리 없었다.
“강재혁?!”
그의 외모는 소문보다 축소되어 있었다.
가만히 그를 지켜보는데, 조감독으로 보이는 남자가 재혁에게 달려가는 모습이 보였다.
한참 대화를 나누던 두 사람은 보라가 있는 난간 아래에 멈춰 섰다.
“저기, 저번에 말했던 배역은 어떻게.”
“이미 끝난 내용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그 모습을 바라보던 보라의 머릿속에 엉뚱한 생각이 떠올랐다.
‘잠깐, 썩은 줄인 강현준만 붙들고 있을 이유는 없잖아? 차라리 강재혁을 꼬시면 일이 쉬운 거 아닌가?’
그렇게 생각하니 재혁이 더욱 탐스럽게 보였다.
그녀는 평소 남자들을 꾀던 방법을 이용하기로 했다.
생각과 동시에 그녀는 들고 있던 커피잔을 재혁을 향해 던졌다.
“그러니까 그게, 뭐야!”
조감독이 놀라 소리쳤다.
커피 폭탄이 터지며 재혁의 옷이 엉망이 되어버렸다.
재혁은 커피가 떨어진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어머! 죄송해요!”
어떤 여자가 죽을죄를 지었다는 표정으로 자신에게 달려오고 있었다.
재혁의 뒤에 서 있던 이나는 급하게 손수건을 꺼내 그의 옷을 닦았다.
“대표님, 괜찮으세요?!”
“괜찮아. 뜨거운 음료는 아니였어.”
“휴지를 가져오겠습니다.”
이나는 재빠르게 화장실로 뛰어갔다.
화장실로 뛰어든 이나는 다급하게 휴지를 챙겨 다시 화장실 밖으로 뛰어나갔다.
그때, 문 앞에서 갑자기 영인이 튀어나왔다.
로비에 나와 있던 영인이 이나를 보고 뒤따라온 것이었다.
“맞지? 정이나.”
이나의 놀란 표정을 보고 영인은 확신하며 말했다.
처음에 당황했던 이나는 이내 표정을 굳혔다.
마음을 단단히 먹고 그를 모른 척하기로 했다.
“사람 잘못 보셨습니다.”
그녀는 굳은 표정으로 대답한 후 영인을 지나쳐 가려했다.
그러자 영인이 앞을 막았다.
“거짓말하지 마, 표정에 다 쓰여 있으니까.”
“….”
흔들리는 이나의 눈빛을 보며 영인이 한 발 다가왔다.
“왜 모른 척하는거야?”
이나가 대답했다.
“잘못 보셨습니다.”
“야 너 정말 이렇게 나올 거야?”
“사람 부르기 전에 나와주시죠.”
“정말 어이없네, 우리가 어떤 사이였는데!”
“잘.못.보셨다구요.”
이나가 영인을 노려보며 말했다.
이나의 눈빛을 한참 동안 바라보던 영인이 알았다는 듯 어깨를 으쓱하고는 길을 비켜섰다.
이나가 그의 옆을 지나가는데, 영인이 말했다.
“너, 혹시 내가 창피하냐?”
영인이 이나의 팔을 잡아당겼다.
돌아본 영인의 눈빛은 뭔가 일을 저지를 것처럼 보였다.
이나의 몸이 긴장으로 조금 굳어지는데, 영인이 갑자기 분위기를 바꾸며 말했다.
“라고, 정이나 씨였으면 말했을 텐데요. 너무 닮아서 그랬습니다. 실례지만 성함이 어떻게 되시죠?”
“제 이름은.”
이나가 주저하며 대답할 때, 뒤에서 재혁의 목소리가 들렸다.
“여기 있었군요. 김인하 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