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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커밍아웃 (38/72)

38. 커밍아웃

퇴근길, 이나는 멍하니 차창 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정이나?’

하루 종일 영인에 대한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고 있었다.

옆자리에 앉아 서류를 넘기던 재혁이 힐끗 이나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이나는 하루 종일 지금 같은 상태였다.

“뭘 그렇게 멍하니 있어?”

재혁의 말을 못 들었는지 이나는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재혁이 다시 그녀를 불렀다.

“정이나 씨?”

그제야 이나가 깜짝 놀라며 재혁을 돌아보았다.

“네?”

“뭘 그렇게 멍하니 있냐고 말했어.”

“아. 죄송합니다.”

“오늘 온종일 그런 거 같은데, 무슨 일 있어?”

“아니요. 별일 없어요.”

아니라고 말은 했지만 이나는 당황한 모습이었다.

이나의 변화가 영인을 만난 후라는 것을 재혁 역시 알고 있었다.

‘때가 되면 말해주겠지.’

재혁은 불편한 상황을 피하기 위해 말을 돌렸다.

“찬이는 언제 온다고?”

“이번 주말이요.”

“그럼 시간이 별로 없네. 오늘은 같이 있자.”

이나는 오늘 혼자 있고 싶었지만 지금 거절한다면 재혁이 이상하게 볼 것만 같았다.

그녀는 떨어지지 않은 입을 열어 대답했다.

“네.”

“오늘 저녁은 내가 해 줄게.”

“좋아요.”

“장부터 봐야겠군.”

두 사람은 근처의 마트로 향했다.

퇴근 시간 직후 마트는 장을 보러 나온 사람들로 북적였다.

함께 카트를 끌며 장을 보는 중에는 이나는 좀처럼 집중할 수가 없었다.

시식 코너를 돌다가 시식코너 직원이 나를 불렀다.

“새댁~ 이거 맛 좀 보고 가요.”

새댁이라는 말에 이나가 얼굴을 붉히며 대답했다.

“저 새댁 아니예요.”

“아 그래요? 그럼 애인?”

“네.”

“이제 곧 결혼 하겠네. 보기에 딱 신혼 부부같아.”

그 말을 듣고 있던 재혁이 직원에게 다가갔다.

“정말 부부 같습니까?”

“그럼요~ 너무 잘 어울리는 게 완전 천생연분 같네요.”

재혁의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지어졌다.

“이거 얼맙니까.”

“한 봉지에 만오천 원, 세 봉지에 삼만 원이에요. 한 번 드셔서 보세요.”

“여기 있는 거 다 주시죠.”

*** 

마트에서 나온 두 사람의 양손에는 떡갈비가 잔뜩 들려 있었다.

재혁이 드는 것으로도 모자라 이나까지 들어야 하는 양이었다.

이나는 떡갈비를 들고 가며 툴툴 댔다.

“신혼부부 같다고 이걸 다 전부 사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재혁은 웃기만 할 뿐 별다른 대꾸를 하지 않았다.

아파트에 도착해 엘리베이터에 오르자 마자 재혁이 이나를 벽으로 밀어붙였다.

“키스해 줘.”

그의 시도 때도 없는 요구가 이제는 익숙해져서, 이나는 가볍게 그에게 입술을 맞췄다.

“됐죠?”

“됐을 리가.”

그는 두 손으로 이나의 볼을 감싸며 입을 맞췄다.

재혁의 손에 들려 있던 식자재들이 바닥에 떨어졌다.

사실, 이나는 마트에 들어가기 전부터 알고 있었다. 어차피 재혁의 관심은 음식이 아닌 온통 자신에게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격렬한 키스가 이어지는 가운데, 엘리베이터는 빠르게 올라가 재혁과 이나의 집이 있는 층에 멈췄다.

재혁은 다급하게 이나의 손을 잡아채서 엘리베이터를 나갔다.

그런데, 문 앞에 엄마와 찬이가 서 있었다.

“헉!! 엄마!!”

“동료 아저씨!”

“동료 아저씨?!”

찬의 외침에 엄마가 즉각 반응했다.

이나는 변명할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엄마에게 물었다.

“엄마. 또 왜 왔어?”

“왜 왔긴, 주말 일도 미안하고 해서 놀라게 해 주려고 왔지. 주말까지 있다가 갈 생각이었… 근데, 누구?”

엄마의 눈빛이 재혁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좁아진 미간이, 어디서 많이 본 얼굴이라고 생각하는 듯 보였다.

이나가 그의 앞을 막아서며 변명하려는데, 재혁이 앞으로 불쑥 나섰다.

“안녕하십니까 어머님, 이나씨 남자친구입니다.”

재혁의 인사에 엄마는 그를 알아보았다.

“아, 회사 상사!”

“네, 기억하시는군요.”

“그런데 남자친구라고요?”

이나는 더 이상 엄마와 재혁을 같은 자리에 있게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있는 힘껏 엄마를 집 쪽으로 밀어내며 말했다.

“엄마, 일단 들어가자.”

하지만 시장에서 장사만 20년인 엄마를 이나가 이겨 낼 수 없었다.

엄마는 이나를 오히려 밀어내더니 재혁에게 바짝 다가섰다.

“혹시, 이번에도 상사가 그쪽?”

“네, 이곳으로 발령 나면서 정이나 씨를 비서로 데려왔습니다.”

“그럼, 앞집에 살던 직장 상사가 발령이 나서 이나를 데리고 왔다는 말이네요?”

“네.”

엄마의 시선이 바닥에 떨어진 식자재들로 향했다.

봉지에 담겨 있던 양파가 엄마의 발 앞까지 굴러와 있었다.

이나가 망했다 싶은 순간 재혁이 거침없이 대답했다.

“혹시 떡갈비 좋아하십니까?”

***

치이이익-

고기가 익는 고소한 냄새가 온 방 안에 가득한 가운데, 앞치마를 두른 재혁의 모습이 보였다.

이나는 그를 원망의 눈초리로 바라보았다.

대체 어쩌자고 엄마한테 그런 말을 한 걸까? 그것도 찬이가 있는 자리에서….

“부웅~”

다행히 찬은 아무것도 모르는지 그저 동료 아저씨가 집에 왔다는 사실이 즐거운 듯했다.

“너무 괜찮다.”

옆에서 들린 엄마의 감탄사가 이나를 자극했다.

그녀가 애써 무시하는데 엄마가 옆구리를 툭툭 쳤다.

“왜….”

“언제부턴데?”

“뭘.”

“서울에서부터?”

“아니야.”

“아닌데 앞집으로 이사와?”

“우연이었어.”

“어머? 우연히 아파트가 같았다고? 귀신을 속여라.”

“아니라니까?”

“어쩐지, 찬이랑 나를 그렇게 보내려고 하더니. 새살림 차린 거였구나?”

“아니라고!”

“그래, 그게 뭐가 중요하겠니. 요리도 잘하고 부자고. 너무 괜찮네. 정말 너무 괜찮아.”

엄마의 눈에서는 그야말로 꿀이 떨어지고 있었다. 마음속으로는 이미 재혁을 사위로 삼은 듯했다.

이나는 한숨을 쉬며 엄마에게 당부했다.

“엄마, 부탁인데, 아무 말도 하지 말아 줘.”

“너네 어디까지 갔어?!”

“엄맛!”

갑자기 들린 외침에 찬과 재혁이 이나를 바라보았다.

이나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태연하게 손짓하고는 엄마만 들리도록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니야. 그런 거 아니라고.”

“아니긴, 너 그거 알아? 넌 어렸을 때부터 화내면 진짜였어~”

“….”

재혁이 요리들을 식탁 위에 올려놓았다.

“다 됐습니다. 오시죠.”

“우와! 꼬기!”

찬이 떡갈비 구이 한 조각을 포크로 찍어 입에 넣었다.

재혁이 차린 음식은 그야말로 떡갈비 코스요리였다.

떡갈비 구이, 떡갈비가 들어간 스파게티, 떡갈비 샐러드, 떡갈비로 만든 찜 요리까지.

재혁이 엄마를 보며 말했다.

“뭘 좋아하실지 몰라서. 다양하게 만들어 봤어. 앉으시죠. 어머님.”

“오호호호. 고마워요.”

재혁의 입에서 나온 어머님이라는 말에 엄마의 입이 귀에 걸렸다.

재혁은 음식을 덜어 사람들 앞에 조금씩 놓아 주었다.

그 모습을 본 엄마가 감탄하며 말했다.

“어머, 친절하기도 해라.”

“필요하시면 더 말씀해 주세요.”

“오호호, 고마워요. 어디, 예비 사위가 해 준 밥 한번 먹어 볼까?”

“엄마!”

“얘는! 애 떨어지겠다!”

이나는 슬며시 재혁의 상태를 살폈다. 무표정한 얼굴이어서 도무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으음~ 맛있네! 고급 레스토랑에서 먹는 것 같아!”

“입에 맞으셔서 다행입니다.”

“요즘 사람들은 참 멋있네~ 남자가 요리도 다 하고.”

“맛있게 드세요. 찬이도 많이 먹고.”

“네! 동료 아저씨!”

할머니와 부부, 그리고 아들까지.

남들이 보면 영락없는 화목한 가족의 모습이었지만, 이나에게는 그야말로 불편하기만 한 식사 자리였다.

이나가 깨작거리자 재혁이 걱정스레 물었다.

“음식이 입에 안 맞나?”

이나의 원망스러운 눈초리가 재혁을 향해 쏟아졌다.

‘어쩌자고 일을 이렇게….’

이후 쏟아질 엄마의 질문 공세를 생각하자 벌써부터 머리가 지끈거렸다.

하지만 여기서 티 낼 수도 없는 노릇이어서 이나는 고개를 도리도리 흔들고는 스파게티를 포크에 말아 입에 넣었다.

“그나저나 강서방. 부모님은 계시고?”

“푸우!”

엄마의 기습 공격에 이나의 입에 들어 있던 스파게티가 허공을 날아 재혁의 얼굴로 날아갔다.

“아.”

스파게티 범벅이 된 재혁의 얼굴을 보며 이나는 생각했다.

정말 최악의 하루라고.

***

이나와 재혁은 문 앞에 마주 섰다.

식사 후, 이미 엄마의 집요한 질문 공세를 견뎌 낸 후라 이나는 기진맥진해 있었다.

“죄송해요.”

“아니야, 즐거웠어.”

잠시 침묵이 지나갔다.

이나의 마음에는 미안함과 원망이 함께 공존하고 있었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런 거예요?”

“뭘? 우리 만난다고 한 거?”

“네. 왜 엄마한테.”

“어차피 1년은 만나는 거 아닌가?”

“그렇긴 하지만.”

“그럼 1년 동안은 진짜 연인처럼 행동해. 헤어질 때 쿨하게 돌아서 줄 테니까.”

“….”

“오늘 즐거웠어. 진심이야. 그러니 걱정 말고 내일 보자고.”

“….”

재혁은 말없이 이나의 볼에 가볍게 키스했다.

“좋은 꿈 꿔.”

그가 들어간 후에도 입술의 감촉이 오래도록 남았다.

복잡한 중에 그가 했던 말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그럼 1년 동안은 진짜 연인처럼 행동해. 헤어질 때 쿨하게 돌아서 줄 테니까.’

그녀는 깊은 한숨을 쉬고 집으로 들어갔다.

문을 열자마자 엄마가 다시 이나에게 달라붙었다.

“갔어? 왜 벌써 와? 여기서 자고 가라고 할 걸 그랬다, 얘. 우리가 나가도 되는데.”

“엄맛!”

“어머 깜짝이야. 왜 소리를 질러!!”

엄마의 호통 소리에 잠들어 있던 찬이가 눈을 비비며 방에서 나왔다.

“왜 이렇게 시끄러워? 밤에는 조용히 해야지.”

“어, 찬아, 깼어?

“할머니랑 엄마가 시끄러워서 찬이가 깼잖아.”

“미안, 미안. 이제 조용히 할 테니까 다시 들어가서 자.”

“동료 아저씨는?”

“어, 아까 갔어.”

“왜? 여기서 자고 가는 거 아니야?”

“아니야. 아저씨 집으로 가야지.”

“왜? 엄마 남자 친구잖아.”

찬의 말에 이나가 당황했다.

“차. 찬아.”

“할머니가 그랬어. 남자 친구만 집에 들어와도 된다고.”

“할머니가?”

“응! 할머니 남자 친구가 과자 이만~큼 사 줬거든.”

“할머니 남자 친구가… 집에 왔었어?”

“응!”

이나는 도끼눈을 하고 엄마를 노려보았다.

엄마는 다급하게 자리를 피했다.

“아. 화장실 가야겠다.”

이나는 엄마가 사라질 때까지 뒷모습을 노려보다가 찬이를 향해 손을 벌렸다.

“찬아, 일루 와 봐.”

찬이 이나의 품에 안겼다.

“엄마가 남자 친구 생기면 어떨 거 같아?”

“좋아.”

“좋아?”

“응, 그럼 동료 아저씨가 아빠 되는 거 아니야?”

이나는 찬의 말에 순간 말문이 막혔다.

“찬이 혹시, 아빠 있으면 좋겠어? 저번에는 엄마만 있어도 된다며.”

“엄마만 있어도 돼!”

“진짜?”

“응!”

“그럼 엄마랑 평생 살기로 약속하는 거야~”

“그래! 약속!”

찬이가 고사리 같은 손을 이나에게 내밀었다.

이나는 씁쓸하게 웃으며 찬의 손에 손가락을 걸었다.

“약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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