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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그 남자 (37/72)

37. 그 남자

강 회장의 손주 사랑은 옛날부터 정평이 나 있었다.

재혁을 6개월 동안 설득한 끝에 회사 CF 모델로 만든 것은 업계에서도 유명한 일화였다.

거기에 더해 드라마 매니아이기도한 강 회장이 이번 기회를 놓칠 리 없었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드라마의 완성도가 아닌 사랑하는 손자가 출연하는 드라마였으니까.

재혁은 더 이상 재고할 가치도 없다는 듯 유리에게 말했다.

“내가 회장님께 연락드릴 테니까. 없던 일로 해.”

“본사 투자 빠지면 드라마 못 찍어. 아니, 찍어도 제대로 된 드라마가 안 나와. 그럴 거면 안 찍는 게 낫고. 공과 사는 구분해.”

“지금 공과사를 구분 못하는 게 누군데!”

재혁이 언성을 높일 때, 누군가 객실 문을 두드렸다.

재혁은 시계를 바라보았다.

드라마 제작팀이 도착할 시간이었다.

재혁은 화를 누르며 말했다.

“들어와요.”

드라마 팀이 객실로 들어오자, 재혁과 유리는 언쟁을 멈추고 자리에서 일어나 그들을 맞았다.

안에는 드라마 대표와 감독 그리고 남녀 주인공들까지 네 명이 들어왔다.

“안녕하십니까. 바른우리 대표 이찬재입니다.”

“강재혁입니다. 반갑습니다.”

재혁은 대표와 인사하고 감독의 앞으로 갔다.

“안녕하십니까. 디렉터 박성훈입니다.”

“강재혁입니다.”

악수하는 순간 자신을 훑는 감독의 시선이 느껴졌다.

그는 재혁의 시선 따위는 상관없다는 듯 노골적으로 재혁을 훑어보았다.

재혁의 얼굴에 불쾌하다는 표정이 일자, 옆에 있던 이 대표가 그의 옆구리를 툭툭 치며 말렸다.

대표의 만류에도 재혁을 관찰하던 감독의 얼굴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보였다.

“좋네요.”

“박 감독, 거…!”

재혁은 불쾌한 기분을 느끼며 옆으로 넘어갔다.

“박인혜예요.”

“잘 부탁합니다.”

인혜는 명실상부한 대한민국 최고의 여배우였다.

재혁이 이 작품에 투자를 결정한 이유 역시 그녀의 출연 때문이기도 했다.

그녀는 슈퍼스타답게 약간은 거만한 태도로 악수하고 물러났다.

재혁은 마지막으로 남자 주인공 앞에 섰다.

최근 영화에서 조연으로 얼굴을 알린 후, 이제 막 뜨기 시작한 배우였다.

인혜와 비교해 떨어지는 스타성 때문에 재혁으로 하여금 투자를 망설이게 만든 장본인이었다.

재혁이 먼저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는 허리를 숙여 깍듯하게 재혁의 손을 잡았다.

“강재혁입니다.”

“배우 장영인입니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인사가 끝나고 그들은 안쪽 소파에 둘러앉았다.

재혁이 먼저 입을 열었다.

“먼 길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어유, 아닙니다. 당연히 찾아뵙고 인사드려야지요.”

박 감독의 목소리가 불쑥 들렸다.

“합격.”

이해할 수 없는 박 감독의 태도에 재혁은 다시 미간을 좁혔다.

화들짝 놀린 이 대표는 박 감독을 말리며 재혁의 눈치를 봤다.

“아, 박 감독 왜 이래. 이거 실례야!”

“사진보다 실물이 훨씬 낫네요.”

“혹시, 제 출연 때문에 그러시는 겁니까?”

“당연하죠. 시킨다고 시키는 대로 할 수는 없는거니까.”

“박 감독!”

“이해합니다.”

재혁의 말에 이 대표가 놀란 듯 그를 바라보았다.

“박 감독님의 작품 세계에 저 같은 사람이 끼어들 수는 없는 노릇이죠. 그래서 말씀드리는 건데, 저는 출연하지 않을 생각이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시죠.”

그의 말에 방문한 드라마 팀 모두 어리둥절한 표정이 되었다.

이 대표가 조심스레 재혁에게 물었다.

“그 말씀은, 출연하지 않으시겠다는 말씀이신가요?”

“물론입니다.”

그는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박 감독과 시선을 교환하고는 다시 재혁에게 물었다.

“저, 제가 듣기로는 강 회장님께서.”

“회장님의 뜻이지 제 뜻은 아닙니다.”

올 때 들었던 내용과는 반대되는 말에 이 대표는 혼란스러웠다.

그는 다시 한번 재혁에게 가장 조심스러운 부분을 물어보았다.

“혹시… 말씀하셨던 투자는….”

“진행되도록 회장님과 의견 조율해 보도록 하죠.”

“아! 하하. 그러시면 대표님 뜻대로 하셔야죠!!”

옆에 다리를 꼬고 앉아 있던 인혜가 툭 던지듯 말했다.

“나는 좋은데.”

재혁이 인혜를 바라보자, 이 대표는 다시 안절부절못하며 의자에서 들썩였다.

“자자 다들 그 얘기는 나중에 하고.”

“지금 안 하면 언제 하게요?”

싸늘한 인혜의 말에 분위기가 급속도로 얼어붙었다.

유리는 그 모습을 재미있다는 듯 바라보고 있었다.

천하의 강재혁이 난처한 상황이라니. 어디서도 쉽게 볼 수 없는 구경거리였다.

재혁이 말했다.

“혼란을 주었다면 미안하지만,”

“네, 아주 혼란스러웠네요. 촬영 일주일 남기고 대본이 갑자기 바뀌질 않나. 바꿔 놨더니 내정된 배우가 안 한다고 하지를 않나. 사람 데려다 놓고 장난하는 거 맞죠?”

“….”

대본까지 바뀌었다는 말에 재혁은 할 말을 잃었다.

강 회장의 영향력은 그가 생각한 것보다 더욱 깊게 뻗쳐 있는 것 같았다.

재혁의 출연 문제로 미팅은 난장판이 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유리가 중재하고 나섰다.

“아무래도 커뮤니케이션이 잘 안된 거 같은데, 오늘은 여기까지 하실까요?”

인혜는 이만하면 됐다고 생각했는지 자리에서 일어나 방을 나갔다.

“저.”

이 대표가 조심스럽게 말을 걸자 재혁이 말했다.

“다음 미팅 때 얘기하도록 하죠.”

“알겠습니다. 자 그럼 가자고.”

이 대표가 나머지 사람들을 데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박 감독은 아직 앙금이 남았는지 못마땅한 표정으로 재혁을 바라보며 일어났다.

세 사람이 문으로 향할 때, 이나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대표님, 식사 준비가 완료되었습니다.”

그때, 문 앞에 서 있던 영인이 놀란 표정으로 이나를 불렀다.

“정이나?”

영인의 말에 모두의 시선이 이나에게 향했다.

무심코 영인을 바라보았던 이나는 귀신이라도 본 사람처럼 깜짝 놀란 표정이었다.

이나는 당황한 듯 급하게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

“사람 잘못 보셨습니다.”

격한 반응이 누가 보아도 일부러 모른 척 하는 것 같았다.

이나는 당황했던 표정을 재빠르게 감추며 재혁을 바라보고 말했다.

“식사 어떻게 할까요?”

“오늘은 못 할 거 같으니 취소해요.”

“네, 알겠습니다.”

이나가 뒤돌아 방을 나가자 옆에 있던 이 대표가 영인에게 물었다.

“아는 사람이야?”

영인은 미심쩍은 눈빛으로 이나가 나간 문을 바라보다가 자신이 실수했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아는 사람과 닮아서요. 제가 잘 못 봤나 봐요.”

“난 또.”

이 대표는 아쉬운 듯 재혁을 돌아보며 말했다.

재혁의 비서와 어떻게든 인연이 닿아 있는 것은 나쁘지 않은 일이었으니까.

“자 가자고 우리도.”

이 대표는 멈췄던 걸음을 재촉해 방을 나갔다.

모두가 나간 후, 유리가 재혁을 바라보며 물었다.

“일부러 모른 척하는 거 맞지?”

재혁은 아무 대답 하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

드라마 팀이 돌아간 후, 재혁은 사무실로 돌아왔다.

이나는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일어나 재혁에게 인사했다.

“오셨어요.”

“일 봐요.”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던 재혁은 이나의 앞을 지나가다가 다시 이나에게 되돌아왔다.

이나가 그를 보자 재혁은 해명을 요구하는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을 알아챈 이나가 별거 아니라는 듯 말했다.

“얼굴만 아는 사람이에요. 일하는 사이에 껄끄러워서 모른 척한 거고요.”

“누가 뭐라 그랬나?”

재혁은 그 질문을 하려던 게 아니었다는 듯 방 안으로 들어갔다.

재혁이 방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조금 전까지 밝게 웃고 있던 이나의 표정이 갑자기 어두워졌다.

그의 얼굴을 다시 본 순간 그녀는 벼락에 맞은 것처럼 움직일 수가 없었다.

다시는 보지 않으리라 다짐했던 얼굴이었다.

하지만 장난기 넘치는 운명의 여신은 영인을 그녀의 앞에 다시 데려다 놓았다.

영인은 6년 전 이나에게 거짓 이별을 고했던 그 남자였다. 그리고 어쩌면 찬이의 아빠일지도 모르는 남자이기도 했다.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도저히 감이 잡히지 않았다.

‘어떻게 해야 하지?’

불안의 그림자가 그녀의 마음에 드리우고 있었다.

***

드라마의 한 장면이 책상 위 모니터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래서! 당신을 떠나는 거라고!”

강 회장은 의자에 기대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갑자기 울리는 호출 소리에 강 회장은 헐레벌떡 자세를 고쳐 앉았다.

“어.”

“강재혁 대표님 전화입니다.”

“재혁이? 아. 그래 연결해.”

문득 재혁 몰래 벌여 놓은 일이 생각났다.

“아이코, 큰일이구나.”

강 회장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혼자 생각하는 동안에도 전화벨은 계속 울렸다.

한참 고민하던 강 회장은 마음의 준비를 하고 수화기를 들었다.

“크흠. 그래, 무슨 일이냐.”

“저랑 장난하시려는 거죠?”

“응? 그게 무슨 말이지?”

강 회장의 너스레에 재혁이 정색하며 말했다.

“저 시간 없습니다. 회장님.”

“시간은 너보다 내가 없지!”

“강렬한 태양 보고 계셨던 거 다 압니다.”

강 회장은 뜨끔해서 모니터를 바라보았다.

“사랑해.”

재혁의 공세가 시작되는 긴박한 상황 중에도 드라마 속 남자 주인공은 눈치 없게 사랑 고백을 하고 있었다.

“무…슨 소리! 요즘 바빠 아주.”

“네. 그러시겠죠. 드라마 제작까지 손대셨으니까요.”

“크… 크흠.”

“말씀이 없으신 거 보니 찔리는 부분이 있으신 모양입니다. 회. 장. 님.”

“그냥, 투자 좀 한 거야.”

“그걸 말씀드리는게 아닙니다. 투자 조건은 어떻게 된거죠?”

“아, 내가 보니까. 그냥 조금.”

“할아버지!”

재혁의 호통에 강 회장은 수화기를 귀에서 멀리 뗐다.

“아, 왜 소리를 질러!”

“말도 안 되는 일을 벌이시니까요!”

“그게 뭐! 보니까 출연 장면도 얼마 안 된다던데! 회사 홍보도 할 겸 나가는 거지. 얼마나 특별한 기회냐, 이 말이야! 너만 할 수 있는 일이기도 하고.”

“저 못 해요. 제가 무슨 연기자도 아니고.”

“왜 못 해! 연극판에서 3년이나 보낸 놈이!”

“….”

재혁은 말을 삼켰다.

강 회장은 때는 이때다 싶어 재혁을 몰아붙였다.

“할아비 말 안 듣고 죽어도 연기하겠다고 그렇게 돌아다녔으면 써먹어야 할 거 아니야! 안 그래? 그리고 사업하는 놈이 생각이 그렇게 짧으면 어떡해! 호텔 차원에서 얼마나 좋냐 이 말이야!”

속사포처럼 쏟아지는 강 회장의 말을 뒤로하고, 그의 머릿속에는 이나를 찾아 헤맸던 지난 3년의 세월이 아스라이 지나갔다.

그는 말없이 사라진 이나를 찾아 무작정 찾아간 극단에 들어갔었다.

같은 일을 하면 언젠가는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었다.

그는 아직도 그때 자신의 무모함을 후회하고 있었다.

한참을 떠들던 강 회장의 말을 끊고 재혁이 말했다.

“안 합니다.”

“너… 할아버지 마지막 소원인데도 안 할 거냐?”

“제 결혼이 마지막 소원 아니었나요? 제가 출연하는 대가로 결혼 얘기 안 하실 거면 제가 해드리죠.”

“이놈아, 갖다 댈 걸 갖다 대야지!”

“제 결혼 포기하실 거 아니면 더 이상 말씀하지 마세요.”

“투자는!”

“그건 마음대로 하시구요. 말씀하신 기업가 정신으로. 그럼 제 의사 말씀드렸으니 끊겠습니다.”

“야! 강재혁! 허.”

끊긴 수화기를 들고 강회장은 승부욕을 다졌다.

“재혁아, 그렇다고 포기할 할애비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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