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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투자의 조건 (36/72)

36. 투자의 조건

집에 도착하니 엄마가 이미 와 있었다.

“왔어?”

“어.”

이나는 어색함을 감추기 위해 엄마의 시선을 피했다.

엄마는 자신의 연애를 이나가 알고 있다는 상상조차 하지 못한 채 평소처럼 이나에게 말을 걸었다.

“부산으로 바로 가야지?”

“응, 10시 비행기야.”

“찬이 완전히 곯아떨어졌네? 어디 갔다 왔어?”

“어? 어… 그냥 여기저기.”

“밖에 사람들 엄청 많더라 얘. 이래서 주말에는 집에 있어야 해. 밥은?”

“먹었지, 시간이 몇 신데.”

“그래. 바로 갈 준비 해야겠네?”

“어. 나 찬이 좀 누이고 올게.”

이나는 찬이를 안고 방으로 들어갔다.

엄마에게 자신이 알고 있다는 사실을 말해야 하는지, 아니면 모른 척 넘어가야 하는지 고민이 되었다.

‘말하는 게 낫겠지?’

이나는 결심을 하고 방을 나가 엄마의 앞에 앉았다.

이나를 힐끔 본 엄마가 먼저 말을 걸었다.

“뭐 할 말 있어?”

“응.”

“뭔데 그렇게 무서운 표정이야?”

“엄마, 다음 주에 찬이 데려갈게.”

이나의 심각함을 감지했는지 엄마가 빨래를 내려놓고 물었다.

“갑자기 왜?”

“그냥, 찬이랑 떨어져 살려니까 쓸쓸하기도 하고.”

“쓸쓸하면 남자를 만나야지. 하긴, 근데 찬이도 엄마랑 떨어져 사는 거 힘들 거야.”

“….”

엄마의 말이 괜히 서운하게 느껴졌다. 데리고 가지 말랄 때는 언제고….

“엄마, 혹시… 남자 있어?”

“남자는 무슨.”

엄마는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당황했는지 급하게 이나의 시선을 피했다.

엄마가 아니라고 부인하자 말이 뾰족하게 튀어나왔다.

“전에는 데려가지 말라더니, 요즘은 왜 자꾸 보내려고 해?”

“누가 보내려고 한다니? 말도 못 하게.”

“엄마.”

“왜.”

“나 봤어.”

“뭘?”

“만재 씨.”

빨래를 개키던 엄마의 손길을 멈추었다.

“오늘 어린이 대공원 갔었어.”

“그랬어?”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엄마의 모습이 이나는 왠지 더 화가 났다.

이나가 엄마에게 쏘아붙이듯 말했다.

“누구야?”

“아무도 아니야.”

“아무도 아닌데 팔짱을 껴?”

“….”

“남자 친구지?”

“얘는,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해. 더 이상 얘기하기 싫으니까 빨리 집에나 가.”

엄마는 급하게 자리를 피하려 했다.

이나가 엄마를 불렀다.

“엄마.”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 찬이 깨.”

“난 엄마가 그 남자랑 잘됐으면 좋겠어.”

“….”

“조금 놀라기는 했지만, 엄마가 사랑하는 사람이 생겨서 다행이야.”

“야… 아니라니까….”

“진심이야, 엄마.”

“너….”

엄마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이나는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엄마가 미워서 찬이 데려가겠다고 한 거 아니야. 그냥 엄마 연애 응원하고 싶어서 그래. 우리 엄마, 평생 나를 위해 살아 줬으니까. 이제 내가 엄마를 응원하고 싶어.”

“찬이가 왜 발목을 잡니? 난 그렇게 생각 안 해….”

“알지. 그것도 그렇고, 엄마 말대로 찬이랑 나랑 떨어져 사는 거, 별로 안 좋은 거 같아. 찬이한테도, 나한테도.”

“….”

이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엄마를 안아 주었다.

엄마의 몸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그 떨림을 타고, 따뜻한 엄마의 체온이 온몸에 퍼져 왔다.

오랜만에 안아 본 엄마는 생각보다 작았다.

이 작은 체구로 딸과 손자까지 책임지느라 얼마나 힘들었을까.

엄마도 엄마이기 전에 한 명의 여자인데, 그걸 모르고 살았었나 보다.

“이제 우리 서로 기대자. 엄마 혼자 앓지 말고.”

“얘는, 낯간지럽게.”

엄마의 말에 물기가 스며 있었다.

“찬이는 다음 주에 데려갈게. 어린이집에 말 좀 해 줘요.”

“너 정말이야? 안 그래도 돼….”

엄마가 말끝을 흐리자, 이나는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아니야, 내가 데려갈게.”

엄마는 이나에게 미안한지 별다른 말을 하지 못했다.

어색함을 깨기 위해 이나가 먼저 엄마에게 질문했다.

“그나저나, 누구야? 어디서 만났어?”

“…구청 문학 동호회.”

이나는 실눈을 뜨고 엄마를 바라보았다. 

“동호회? 어려 보이던데, 몇 살이야?”

“마흔여덟.”

“엄마보다 여덟 살이나 어리네?”

놀라는 이나의 말에 엄마는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이 엄마 아직 안 죽었다는 증거지.”

“정말. 뭐 하는 사람인데?”

“시인.”

“시인?!”

“얘. 너는 내가 물어보면 속물 취급하더니! 됐어. 아직 그렇게 깊은 사이 아니니까. 나중에. 빨리 가, 늦겠다.”

엄마는 이나를 두고 도망치듯 방으로 들어갔다.

***

배웅하겠다는 엄마를 힘겹게 들여보내고, 이나는 집을 나섰다.

재혁은 본사에서 대여한 차를 타고 아파트 문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밤 비행기를 예약한 터라 시간이 촉박했다.

이나는 차에 타며 재혁에게 사과했다.

“너무 늦었죠. 미안해요.”

재혁이 시간을 확인하며 말했다.

“괜찮아. 금방 갈 수 있겠어.”

두 사람을 태운 차가 엄마의 아파트에서 출발했다.

공항으로 가는 길 이나는 우물쭈물 하고 있었다.

네온사인이 휘황찬란하게 빛나는 도심을 지나 공항으로 향하는 어두운 길에 접어들 때까지 이나는 말을 꺼내지 못하고 숨을 한 움큼 들이마셨다가 내뱉기를 반복했다.

찬과 함께 살아야 한다는 얘기가 차마 입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그에 대한 마음이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많은 부분이 조심스러웠다.

그런 이나의 상태를 재혁은 금세 눈치챘다.

공항 초입에 들어설 때 재혁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뭐 할 말이 있나?”

“네?”

“계속 한숨 쉬는거 보니까 할 말이 있는거 같아서.”

“….”

“말하기 어려운 건가?”

“그런 건 아니예요.”

“말하기 어려운 거면 나중에 얘기해도 괜찮아.”

이럴 때는 좀처럼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남자였다.

하지만 이나는 알고 있었다. 겉으로는 차가워 보여도, 그는 속이 여린 남자라는 걸.

아마 싫어도 아무렇지 않게 ‘그래.’라고 말하겠지. 그 ‘그래.’라는 말속에 너무 많은 의미가 담겨 있지 않기를 바라며 이나가 말을 꺼냈다.

“찬이를 부산에 데려와야 할 거 같아요.”

이나의 말이 끝나고, 아주 잠깐의 침묵이 흘렀다.

침묵 속에 담긴 긴장감이 이나의 숨을 조였다.

그녀는 죄인이라도 된 기분으로 재혁의 대답을 기다렸다.

재혁은 잠시 고민하더니 간결하게 대답했다.

“잘됐군.”

잘됐군. 예상대로 무미건조한 대답이었다.

그 대답의 의미를 알 수 없어서 이나가 말을 이었다.

“이제 집에서 자거나 할 수 없을 거 같아요.”

이나가 다시 조심스럽게 말을 꺼내자 재혁이 곧바로 대답했다.

“그렇겠지?”

“미안해요.”

이나의 사과에 재혁은 의아하다는 듯 되물었다.

“왜?”

“그게….”

이나가 선뜻 대답하지 못하자 재혁이 말했다.

“달라지는 건 없어. 여태까지 너무 많은 걸 누린 거지. 찬이는 원래 이나 곁에 있어야 해.”

“….”

“내가 찬이에게 인사해야지. 잠깐 엄마를 빌려줘서 고맙다고 말이야.”

“….”

“집이 좀 불편하겠어. 필요한 거 있으면 말해.”

“네, 지내면서 하나씩 준비해 볼게요.”

“그래, 잘됐어. 찬이에게도, 이나에게도.”

“….”

말에 담긴 재혁의 따뜻한 마음이 이나의 마음에 닿았다.

말을 꺼내기까지 그녀가 했던 고민은 봄눈 녹듯 사라졌다.

이나는 어쩐지 차 안이 포근해진 기분이었다.

그녀는 생각했다.

‘어쩌면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마음 넓은 남자일지도….’

이런 남자에게서, 1년 후에 떠날 수 있을까?

잘 모르겠다… 지금은.

***

다음 날 아침, 유리의 비서실에서 연락이 왔다.

[드라마 제작자 미팅, 30분 당겨 11시에 만나실 수 있는지 여쭤보십니다. 사전 협의 문제라고 하십니다.]

[여쭤보겠습니다.]

이나는 문자에 회신하고 재혁의 방으로 들어갔다.

똑똑-

“들어와요.”

방 안에 들어가니, 재혁은 서류에 온 신경을 쏟고 있었다.

“부대표님 비서실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무슨 일?”

“부대표님께서 미팅 시간을 30분 앞당겨 달라고 요청하셨습니다. 드라마 관련 협의하실 것이 있으시다고 하셨습니다.”

“사전 협의? 흠.”

“뭐라고 말씀드릴까요?”

“알았다고 전해요.”

“네, 알겠습니다. 대표님.”

“잠깐, 정이나 씨.”

“네.”

재혁이 이나에게 다가왔다.

이나는 재혁의 눈빛에서 위험을 감지하고 한발 물러섰다.

“왜 다가오시죠?”

“긴히 할 말이 있어.”

어느덧 이나를 스쳐 지나간 재혁이 문을 닫았다.

“문은 왜.”

“지금부터 하는 짓을 누가 보면 안 되니까.”

재혁의 손길이 이나의 어깨를 스쳤다.

“근무 시간입니다. 대표님.”

“압니다. 정이나 씨.”

“근무 시간에 이러시는 건 곤란합니다.”

“큰 착각을 하고 있군요. 근무 시간에 이런 짓이 곤란한 건, 직원들이지 내가 아닙니다.”

“그게 무슨 얼토당토않은 말씀.”

재혁이 그녀의 허리를 끌어당기는 바람에 이나는 말을 끝맺지 못했다.

재혁은 당황하는 이나의 모습에 벌써 아랫도리가 당기는 모양이었다.

“내가 왜 썬라이즈 오너로 온 줄 알아? 오너는 이래도 되기 때문이야.”

말과 함께 전진해온 그의 입술이 부드럽게 이나의 입술을 훔쳤다.

“흡….”

오피스에서 하는 이 나쁜 짓이 주는 스릴에 이나는 묘한 흥분을 느끼며 그를 받아들였다.

***

유리는 약속 장소에서 재혁을 기다리고 있었다.

약속 장소는 썬라이즈 호텔의 스위트룸. 오늘 오후, 드라마 미팅이 있을 장소이기도 했다.

“왜 이렇게 안 와?”

약속 시간이 15분이나 지났지만, 재혁은 오지 않고 있었다.

“정말… 짜증 나게.”

유리가 툴툴거릴 때 문이 열리며 재혁이 나타났다.

그는 미안한 기색 없이 유리를 향해 곧장 다가와 반대편 소파에 앉았다.

“왜 이렇게 늦어?”

유리가 말하자, 재혁은 시계를 보더니 대답했다.

“개인 용무로 바빴어.”

그의 태연함에 유리는 불쑥 짜증이 났다.

“미안하다는 말도 없어?”

“미안.”

“….”

성의 없는 재혁의 태도가 유리의 화를 돋우었다.

유리가 억지로 화를 참고 있을 때, 재혁이 물었다.

“말할 게 뭐지?”

“회장님 지시 사항.”

“왜 나한테 안 하시고 너한테?”

“오빠한테 말하기 싫으셨나보지.”

조금 전까지 잔뜩 찌푸리고 있던 유리의 표정에 갑자기 미소가 떠올랐다.

의심스러운 미소였다.

“말해봐.”

“드라마 투자 건에 대해 말씀드렸더니, 본사 차원에서 흔쾌히 투자해 주신다고 하셨어. 관심이 많으셔서 제작사에 직접 연락까지 하신 모양이야.”

“워낙 드라마를 좋아하시니까. 그게 문제는 아닌 거 같은데?”

“눈치가 빠르네, 대신 조건이 있어.”

“조건?”

유리가 재혁의 앞에 서류를 내밀었다.

서류를 펼쳐본 재혁이 인상을 잔뜩 찌푸렸다.

“설마 이게 투자 조건이라고?”

재혁의 심기 불편한 모습을 보고 유리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래, 그 조건이 아니면 절대 투자 안 하신다 하셨어.”

“말 같지도 않은 소리.”

재혁이 유리가 내민 서류를 구겨서 쓰레기통에 버렸다.

“뭐하는 짓이야?”

“절대 못 받아들여.”

“지금 자존심 세울 때야?”

“적당히 말이 안 되어야 생각이라도 해보지, 지금 이걸 조건이라고 가져온 건가?”

“오빠가 드라마에 출연하는 게 왜 말이 안 되지?”

“안 되지! 내가 어떻게 드라마에 출연해?!”

재혁이 유리에게 버럭 화를 냈다.

강 회장의 투자 조건은 다름 아닌 재혁이 서브남주로 드라마에 출연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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