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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놀이동산에서 생긴 일 (2) (35/72)

35. 놀이동산에서 생긴 일 (2)

“대표님?! 여긴 어떻게!”

재미있다는 듯 서 있는 재혁의 손에는 자그마한 백호 인형이 들려 있었다.

“백호!”

백호 인형을 보자 잔뜩 풀이 죽어 있던 찬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재혁은 인형으로 찬에게 장난을 쳤다.

“어흥!”

백호 인형이 팔을 무는 시늉을 하자 찬은 간지러운지 꺄르륵 웃으며 몸을 비틀었다.

그는 백호 인형을 찬의 얼굴 앞에 두고는 백호가 말하는 것처럼 찬에게 말했다.

“찬아, 오늘은 아파서 못 만날 거 같아. 다음에 만나자. 호랑이처럼 씩씩하게. 그 동안 울면 안 돼! 알았지?!”

“응!”

찬이 언제 울었냐는 듯 씩씩하게 대답했다.

재혁은 한 발 다가와 인형을 찬의 손에 쥐여 주고는 찬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어흥!”

찬은 신이 나서 백호 인형을 이리저리 가지고 놀았다.

이나는 어안이 벙벙해서 재혁에게 물었다.

“대체 어떻게 된 일이에요?”

이나의 물음에 재혁이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서울 출장이 잡혔어.”

“출장이요?”

“너무 중요한 사업이라 이나도 모를 거야.”

“무슨 사업인데요?”

“연애 사업.”

이나는 어떻게 반응해야할지 몰라 혼란스러웠다.

말도 없이 갑자기 나타난 것이 화가 나면서도 그가 와서 기뻤으니까.

재혁은 마치 영화 속의 히어로처럼 느껴졌다.

이나가 머뭇거리는 사이 찬이 재혁에게 달라붙어 목말을 태워달라고 졸랐다.

“아저씨! 나 목말 태워주세요!”

“찬아. 그러면 안 돼.”

재혁은 망설임 없이 찬이를 번쩍 안아 목말을 태웠다. 그리고는 이나가 말릴 새도 없이 사람들 사이로 걸어갔다.

“대표님! 힘들어요. 찬아 어서 내려와.”

이나가 따라와 만류하자 재혁이 이나에게 말했다.

“오늘은 찬이 일일 아빠 역할하러 온 거니까. 말리지 마.”

일일아빠라는 재혁의 말에 이나는 자리에 멈춰 섰다.

마음속에 애써 묻어 두었던 그녀의 기대가 고개를 들려 하고 있었다.

재혁이 찬이에게 다가가도록 두면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그것을 말리고 싶지 않았다.

재혁은 찬이를 태우고 빠르게 멀어지고 있었다.

재혁과 찬이의 모습은 그녀가 생각했던 것 보다 더 잘어울렸다.

***

“사자다!! 아저씨, 백호랑 사자랑 싸우면 누가 이겨요?!”

“당연히 백호가 이기지.”

“우와! 백호 최고! 그렇지만 사자도 멋있어요.”

“그래? 그럼 찬이 사자 우리에 던져야겠다!”

“으악!!”

찬이를 대하는 재혁의 모습이 이나는 낯설게 느껴졌다.

평소에 자신을 제외하면 모든 사람에게 무뚝뚝한 성격이었고, 찬과 몇 번 마주쳤을 때도 그리 살갑게 대하는 모습은 아니었다.

하지만 재혁은 아들을 대하는 것처럼 찬이와 즐겁게 놀고 있었다.

찬도 재혁과 함께하는 것이 즐거운지 아까부터 이나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있었다.

동물원을 한 바퀴 다 돌고 나서, 세 사람은 놀이공원으로 향했다.

그 사이 찬의 손에는 커다란 헬륨 풍선이 들려 있었고, 여전히 재혁의 어깨 위에 자리 잡은 상태였다.

온종일 목말을 태우고 있어서 재혁이 힘들까 봐 걱정이 되었다.

이나가 찬에게 말했다.

“찬아. 아저씨 이제 힘드시겠다. 이제 내려올까?”

이나의 말에 찬이가 휙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싫엉!”

“찬아~ 착하지?”

그러자 재혁이 이나를 말렸다.

“좋아하는데 그냥 둬.”

“대표님 힘드니까.”

“이 정도는 온종일 가능해. 힘들면 내가 내려 줄 테니까 걱정하지 마.”

“알겠어요. 대신 힘들면 바로 말씀하세요. 썬라이즈 임직원들의 밥줄이 대표님에게 달려 있다구요.”

“걱정되면 이따가 조금 주물러 줘도 되고.”

“그런 건 꿈 깨시구요.”

예상했던 대로, 놀이동산 역시 동물원만큼이나 사람들로 가득했다.

입구에서부터 쭉 늘어선 줄 때문에 입장에만 30분이 걸렸다.

우여곡절 끝에 놀이동산에 들어가자마자 찬이가 좋아하는 범퍼카 쪽으로 향했다.

범퍼카 역시 끝이 보이지 않는 대기줄이 늘어서 있었다.

줄이 중간쯤 줄어들었을 때, 찬이가 말했다.

“엄마, 나 목말라.”

“찬이 목말라?”

재혁이 이나에게 말했다.

“내가 뭐 좀 사 올게.”

“아니요. 제가 갔다 올게요. 찬이가 위에 타고 있기도 하니까요.”

“그래, 그럼. 앞쪽으로 오면 될 거야.”

“네, 알겠어요.”

이나는 줄을 빠져나와 근처 매점으로 향했다. 매점 역시 사람들로 붐볐다.

사람들을 뚫고 찬이 좋아하는 음료수와 재혁에게 줄 스포츠 음료 한 캔을 골라 계산대로 향했다.

음료를 사는 것도 오래 걸릴 것 같아 이나가 초조하게 시계를 보며 서 있는데, 익숙한 목소리가 소음을 뚫고 이나의 귀로 파고들었다.

“차암~ 만재 씨도.”

목소리를 듣자마자 등 뒤로 서늘한 기운이 지나갔다. 엄마의 목소리였다.

이나는 깜짝 놀라 소리가 난 곳을 바라보았다.

이나가 서 있는 곳보다 조금 앞쪽에, 엄마가 어떤 남자와 팔짱을 끼며 웃고 있었다.

“!!”

이나는 깜짝 놀라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우리 나중에 같이 놀러 가요.”

“좋지요. 만재 씨~”

엄마가 낯선 남자에게 애교를 부리는 모습에 이나는 입이 딱 벌어졌다.

이나의 눈이 남자에게 향했다.

40대 중후반 즈음 되어 보이는 남자는 엄마보다 10살은 어려 보였다.

설마… 애인일까? 하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다.

안 될 것은 없지만, 너무나 갑작스러운 상황이었다. 

온갖 생각이 드는 그때, 엄마가 무심코 이나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놀란 이나는 본능적으로 자리에 주저앉았다.

“왜요? 뭐 있습니까?”

“어? 아니요. 아는 사람을 본 거 같아서요. 잠깐만요.”

엄마의 말소리가 저 멀리서 들렸다.

‘큰일 났다.’

사람들로 북적이는 매점 안에서 이나에게 다가오는 엄마의 발소리가 유독 또렷하게 들렸다.

찰나의 순간, 이나는 재빨리 가판대 반대쪽으로 기어가 매점을 빠져나왔다.

이나는 왜 자신이 도망가야 하는지도 모른 채 사람들 사이로 정신없이 달려갔다.

그녀는 매점이 보이지 않을 만한 곳에 도착해서야 겨우 멈춰 섰다.

“헉… 헉….”

숨이 턱 밑까지 차오르고 땀이 비 오듯 흘러내렸다.

이나는 이마를 짚으며 의자에 기댔다.

‘차암~ 만재 씨도.’

조금 전, 행복해 보이던 엄마의 모습이 아직 눈앞에 생생하게 떠올랐다.

‘엄마가, 연애를?’

***

“엄마!”

돌아오는 이나를 발견한 찬이 손을 흔들었다.

이나는 생각에 잠겨 찬의 목소리를 듣지 못했다.

“엄마!!”

“어? 어 찬아~”

다시 부르는 목소리에 이나는 애써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이나의 상태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낀 재혁이 걱정스레 물었다.

“무슨 일 있었나?”

이나는 모른 척하며 음료수를 건넸다.

“아니요. 좀 피곤한가 봐요. 자, 찬아.”

이나가 자판기에서 뽑아온 이온 음료를 내밀자 찬이가 투정을 부렸다.

“찬이는 뿌요뿌요 먹을 건데!”

“여기는 안 팔아, 찬아~ 엄마가 집에 가서 사 줄게~”

찬과 재혁에게 음료수를 건넨 이나는 다시 생각에 잠겨 멍하니 서 있었다.

“정말 괜찮아?”

재혁이 다시 묻자 이나는 깜짝 놀라며 대답했다.

“네? 아 괜찮아요.”

“힘들면 조금 쉬지. 내가 찬이랑 타고 오면 되니까.”

“아무래도 그래야겠어요.”

음료수를 사러 갔다 오는 사이, 범퍼카의 줄은 많이 짧아져 있었다.

이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찬과 재혁이 보이는 거리의 벤치에 앉았다.

가만히 앉아 있자 온갖 생각들이 머릿속을 괴롭혔다.

그런 와중에도 이나는 혹시라도 엄마가 나타날까 계속해서 주위를 살폈다.

지난주, 엄마와 찬이가 부산에 왔을 때 엄마가 했던 말들이 떠올랐다.

‘찬아, 부산 좋지?’

‘어때, 여기에서 살래?’

은연중 나오는 진심은 속일 수 없는 법이다.

은연중 엄마를 원망하던 이나는 깜짝 놀라며 자신에게 되물었다.

‘정이나, 엄마는 연애하면 안 되는 거니?’

주말마다 찬이를 보느라 집에 있었을 엄마에게 괜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엄마라고 누군가를 만나지 말라는 법은 없다.

“엄마!!”

찬의 목소리가 들렸다.

앞을 보니 범퍼카에 올라탄 찬이가 이나를 향해 손을 흔들고 있었다.

이나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손을 올릴 때, 재혁이 찬이 탄 범퍼카에 부딪쳤다.

“받아라!”

“으악!”

참 잘 어울리는 한 쌍이었다.

모르는 사람이 봤으면 영락없는 아빠와 아들이라고 말했을 것이다.

이나는 찬이를 부산으로 데려갔을 때의 모습들을 상상했다.

그럼 지금처럼 재혁과 함께 저녁을 먹고, 침대에서 보내는 시간은 사라지겠지.

그러다가 방금 자신이 한 생각이 어이없어 코웃음을 쳤다.

찬이 누군가의 골칫거리가 되길 원치 않으면서 이런 생각을 하고 있다니….

‘나빴네. 정이나.’

그 사이 찬과 재혁이 돌아왔다.

“엄마!”

찬은 재혁의 어깨 위에서 내려와 이나를 향해 달려왔다.

찬이 이나의 품에 쏙 안겼다.

“재미있었어?”

“응! 엄마도 같이 타자!”

찬이 이나의 손을 끌고 다시 범퍼카 줄로 향했다.

“다시 타자고?”

“응!”

찬의 손에 이끌리며 그녀는 생각했다.

‘그래. 찬이를 이대로 그냥 둘 수는 없겠어.’

***

이나는 온종일 신경이 곤두서 있었다.

다행히 엄마와 다시 마주치는 불상사는 벌어지지 않았다.

놀이공원에서 나올 때는 이미 석양이 지고 있었다.

찬은 재혁의 등에 업혀 잠들어 있었고, 이나와 재혁은 노을빛으로 물든 공원을 나란히 걸어갔다.

이나는 여전히 생각이 많은 표정으로 먼 산을 보며 걸었다.

그때, 이나의 손가락 사이로 재혁의 손이 부드럽게 파고들었다.

이나가 그를 돌아보자 재혁은 앞을 보며 말했다.

“생각이 많아 보여.”

“네… 조금.”

“심각한 일인가?”

재혁의 질문에 이나는 곰곰이 생각하고는 대답했다.

“아니요. 좋은 일이에요.”

“그래.”

재혁의 대답에 이나는 다짐하듯이 혼잣말을 했다.

“네… 잘된 일이죠. 많이요.”

“잘된 일은 기뻐하면 돼. 뒷일이 어떻게 될까 걱정하지 말고.”

“….”

이나는 한동안 말없이 걸었다.

결국 자신의 걱정이 찬이 때문이라는 사실에 이나는 마음이 아팠다.

엄마가 연애를 한다면 찬을 부산에 데려가야 할 테고, 그렇다면 재혁과는 지금처럼 지내기 어려워질 것이다.

내 사랑을 위해 엄마의 사랑을 걱정해야 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이었다.

다시 하루가 끝나가고 있었다.

재혁의 등에 업힌 찬의 얼굴을 바라보며, 이나는 씁쓸한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이나는 재혁을 위해 마음에도 없는 말을 했다.

“알겠어요. 걱정하지 않을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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