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 대공원에서 생긴 일
바쁜 한 주가 지나고, 어느덧 주말이 다가왔다.
개장이 코앞으로 다가오면서 썬라이즈는 본격적인 손님맞이 준비로 정신없는 상태였다.
거기에 더해 현준이 제안했던 드라마까지 진행하는 바람에, 재혁은 그야말로 눈코 뜰 새 없는 한 주를 보낸 후였다.
황금 같은 봄날의 주말. 재혁은 이나를 싣고 꽃놀이라도 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다.
하지만 이번 주 역시 그럴 수 없었다.
“서울에 올라가 봐야 해요.”
수요일이 지날 때쯤 이나가 재혁에게 말했다.
재혁의 얼굴에 언뜻 실망의 기색이 스쳐 지나갔지만 금방 아무렇지 않은 척 대답했다.
“찬이가 좋아하겠군.”
이나는 재혁 혼자 독점할 수 없는 여자였다.
찬이라는 강력한 라이벌 앞에 그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이나의 마음이 편하도록 아무렇지 않은 척하는 것뿐이었다.
“서운해요?”
이나가 묻자, 재혁은 날 뭐로 보냐는 듯 코웃음을 치며 대답했다.
“설마.”
“서운한 거 같은데?”
“전혀. 오히려 찬이한테 너무 소홀한 거 같아서 내가 먼저 올라가 보라고 얘기하려던 참이었어.”
“대표님답지 않게 말이 길어지시네요?”
“미치겠군. 정말 아니야.”
이나는 흥분하는 재혁의 모습이 귀여워서 작게 웃었다.
이 남자의 질투를 이 세상 누가 받을 수 있을까?
재혁은 흥분한 것이 무안했는지 고개를 서류로 돌리며 말했다.
“다 했으면 나가 봐.”
이나는 슬며시 그에게 다가가 볼에 뽀뽀했다.
“?!”
이나의 기습 키스에 재혁은 화들짝 놀라며 입술이 닿았던 볼에 손을 올렸다.
“금방 갔다 올게. 조금만 기다리고 있어요.”
이나가 방을 나가는 동안
재혁은 여전히 볼에 손을 올린 채로 멍하니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말했다.
“혹시 내가 꼬리 아홉 개 달린 여우에 홀린 게 아닐까?”
***
공항에 도착해 이나가 게이트에 들어갈 때까지 재혁은 그녀의 손을 놓아주지 않았다.
“누가 보면 어쩌려구요.”
“상관없어. 이틀이나 못 잡는데 지금이라도 많이 잡아둬야지.”
비행기 탑승 시간이 다가오자 재혁은 아쉬운 마음에 이나에게 말했다.
“나도 서울 갈까?”
“그러면 혼자 있어야 하는데요?”
“어차피 부산에 있어도 혼자 있는데 뭘.”
“그러지 말고 조금만 기다려요. 해외 나가는 것도 아니고 납북되는 것도 아니잖아요. 금방 볼 거니까.”
“그냥 해 본 말이야. 조심해서 갔다 와. 무슨 일 있으면 전화하고.”
“네. 걱정하지 마세요. 대표님이나 무슨 일 있으면 꼭 전화해요. 나 걱정할까 봐 숨기면 안 돼요, 알았죠?”
“알았어.”
누가 보면 멀리 떠나는 사람처럼 긴 이별의 인사를 나눈 후에야 이나는 돌아설 수 있었다.
“연락해!”
이나는 재혁에게 손을 흔들어 주며 게이트 안으로 들어갔다.
“….”
재혁은 아쉬움이 가득한 눈빛으로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고작 이틀을 못 볼 뿐인데 이렇게 아쉬울 수가….
이나를 통해 날마다 새롭게 배우는 사랑에 재혁은 조금씩 변해 가고 있었다.
이나가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진 후, 재혁은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이끌고 공항 밖으로 향했다.
로비를 지나 공항을 빠져나가던 재혁은 아쉬움에 자리에 멈춰 섰다.
이제 곧 이나가 탑승한 비행기가 떠나려 하고 있었다.
“왠지 서울 갈 일이 생길 거 같군.”
그는 혼잣말을 하며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전화기 너머로 안내원의 목소리가 들렸다.
“네 에어항공입니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부산에서 서울로 가는 제일 빠른 비행기가 몇 시에 있습니까?”
***
이나 역시 재혁을 보내고 아쉬움에 계속해서 뒤를 돌아보았다.
그와 사랑에 빠질수록 깊어지던 불안감은 조금씩 옅어졌다. 그리고 그 빈자리를 재혁과 그리는 희망찬 미래가 조금씩 비집고 들어왔다.
거기에 더해, 회사에서는 비서 업무에 완전히 적응하며 조금씩 능력을 발휘하는 중이었다.
일도 사랑도, 이나는 지금 이 너무나 만족스러웠다.
‘그래, 1년은 그저 행복하게 살아 보는 거야.’
인천 공항에 도착하니 엄마와 찬이가 마중을 나와 있었다.
“엄마!!”
손을 벌리고 달려오는 찬을 보자, 이나의 얼굴에는 환한 미소가 피어났다.
“찬아!”
“엄마. 보고 싶었어.”
이나의 마음이 그 어느 때보다 따뜻해졌다.
재혁과 함께 있을 때와는 다른 종류의 따뜻함이었다.
“엄마도 보고 싶었어! 찬아.”
이나가 찬을 안을 때, 엄마가 다가왔다.
“으이구~ 할머니한테도 그렇게 좀 해라. 찬아!”
엄마의 질투 섞인 목소리를 들으며 이나가 찬을 번쩍 안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는 데 힘들었지?”
“지하철 쭉쭉 뚫려서 금방 오더라, 얘. 여기까지 행차하시느라 고생이 많으셨네?”
“비행기 타고 오니까 별로 안 힘들어.”
“그래, 돈도 잘 벌겠다, 이런 거에 아끼지 마. 그나저나 부산 가더니 얼굴이 계속 좋아진다?”
“그런가?”
엄마의 말에 이나는 멋쩍은 듯 얼굴을 만져 보다가 급하게 말을 돌렸다.
“점심 먹어야지?”
“오랜만에 집 밥 먹이려고 밥 해 뒀어. 집으로 가자.”
“집 밥? 좋지!”
집으로 가는 버스 안에서, 찬은 언제나처럼 이나의 무릎에 기대어 잠들어 있었다.
곤히 잠든 찬을 내려다보며 이나는 재혁과 찬이, 두 남자와 함께 한집에서 사는 상상을 했다.
생각만으로도 그녀의 입가에는 미소가 피어났다.
‘그렇게 될 수 있을까?’
재혁과의 관계가 깊어 질수록, 이나는 그와 함께 하는 미래에 대해 점점 더 많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런 생각을 할 때면 항상 마지막에는 고개를 저으며 점점 구체화 되는 생각의 고리를 억지로 끊어내고는 했다.
‘그래서 만약 아니면?’
재혁과 함께 하기에는 너무나 많은 장벽들이 그들을 가로막고 있었다.
그의 집안에서 보일 반대와 사회적 지위, 그리고 가장 중요한 찬의 출생문제까지.
기대가 클수록 실망도 큰 법이다.
이나는 생각했다. ‘괜한 기대하지 말자.’ 고
***
집으로 돌아와 엄마가 해 준 집 밥을 먹었다.
메뉴는 이나가 제일 좋아하는 엄마표 닭볶음탕이었다.
오랜만에 먹는 엄마 음식에 이나는 폭식을 하고 말았다.
밥 한 공기를 뚝딱하고, 후식으로 멜론까지 잘라 먹고는 소화도 할 겸 근처 쇼핑몰에 놀러 갔다.
그사이 찬이가 새로 갖고 싶어 한 장난감과 옷을 몇 벌 사 주고, 엄마의 옷도 골랐다.
평소였으면 옷 입을 일이 없다며 손사래를 쳤을 텐데, 엄마는 웬일인지 나서서 옷을 골랐다.
“이거 어때?”
난생 입어 본 적도 없는 원피스를 몸에 대며 묻는 엄마를 이나는 신기한 듯 쳐다보았다.
엄마가 민망한 듯 물었다.
“왜… 안 어울려?”
“아니, 아니! 잘 어울려 엄마.”
“표정은 아닌데?”
“아니야. 정말 잘 어울려.”
“그래? 좀 젊어 보이나?”
“당연하지! 10년은 젊어 보여.”
저녁은 쇼핑몰에서 가볍게 해결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저녁을 먹으며 엄마는 ‘내일 오랜만에 동창들 만나.’라며 외출을 선언했다.
찬을 보느라 주말마다 집에 있었을 엄마에게 미안했다.
이나는 자주 올라와야겠다고 생각하며 알았다고 말했다. 그렇게 평범했던 하루가 지났다.
***
아침에 눈을 떴을 때 엄마는 이미 나가고 없었다.
시간을 보니 9시, 휴대폰에는 재혁에게 문자가 와 있었다.
[잘 잤어?]
[네, 대표님도요?]
[그래, 아침 먹고 출근했어. 드라마 건 좀 다시 검토해야겠어.]
[주말인데 좀 쉬죠.]
[그럴게. 오래 안 걸릴 거야. 오늘 이나 스케줄은 어떻게 되지?]
[저는 오늘 찬이랑 데이트예요.]
[그렇군. 어디로?]
[어린이 대공원이요. 찬이가 백호를 보고 싶다고 하네요.]
[그래 좋은 하루 보내. 틈틈이 연락하지.]
[알았어요. 대표님도요.]
재혁과 짧은 문자 타임이 끝나고, 이나는 찬이를 깨웠다.
“찬아~ 일어나야지~”
“엄마! 나 아까 일어났어!”
“우리 찬이 부지런하네? 언제 일어났어?”
“지금!”
“아까 일어났다며?”
“거짓말이지롱~”
“너어~ 아침 먹게 세수하고 나오세요~”
“네!”
찬이가 씻는 동안 이나는 간단한 아침을 준비했다. 메뉴는 토스트와 에그 스크램블이었다.
“찬아, 밥 먹자~”
“네!”
문득 메뉴가 재혁의 아침 식사와 닮아 있는 것을 발견했다. 매일 아침 함께 식사를 하다보니 습관적으로 비슷한 매뉴를 준비한 것이다.
***
이나와 찬은 지하철을 타고 어린이 대공원으로 이동했다.
5월 초의 주말이어서, 어린이 대공원으로 향하는 지하철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어린이 대공원, 어린이 대공원 역입니다. 내리실 분은….]
지하철 문이 열리자 열차에서 사람들이 우르르 쏟아져 나왔다.
사람들 사이에 끼어서 이나는 벌써 진이 빠지는 기분이었다. 그에 반해 찬은 오랜만에 하는 엄마와의 외출에 마냥 신나 있었다.
지하철 입구로 있는 솜사탕을 보고 찬이가 소리쳤다.
“엄마!! 나 솜사탕!!”
솜사탕의 유혹을 뿌리칠 수 없는 아이들로 인해 가게 앞에는 긴 줄이 늘어서 있었다.
이나는 피곤함을 무릅쓰고 줄을 섰다. 오늘만큼은 찬이가 원하는 것을 전부 해주고 싶었다.
자기 몸통보다 2배는 큰 대왕 솜사탕을 받아 들자 찬은 뛸 듯이 기뻐했다.
“엄마아~”
찬이가 떼어준 솜사탕을 입에 넣으며 이나는 오랜만에 행복을 느꼈다.
“백호야. 기다려~ 찬이가 간다!”
걸어가는 내내 찬은 백호노래를 불렀다.
엄마 말로는, 얼마 전 그림책에서 백호를 보고 홀딱 반했다고 한다.
사람들을 뚫고 백호 우리로 가는 길, 찬은 기대에 한껏 부풀어 있었다.
백호는 동물원의 상징이기도 하여서 다시 줄을 서야 할 것 같았다.
하지만 웬일인지 백호우리는 한산했다.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우리 앞에는 백호의 건강 문제로 금일 백호 우리를 개방하지 않는다는 안내문이 쓰여 있었다.
“찬아, 백호가 아파서 오늘은 못 본대.”
이나의 말에 찬의 눈에 순식간에 눈물이 차올랐다.
“싫어. 나 백호 볼 거야.”
서글픈 말과 함께 찬의 두 눈에서 닭똥 같은 눈물이 흘러내렸다.
이나가 어르고 달래 보았지만 찬의 눈물은 그치지 않았다.
기대가 큰 만큼 실망도 큰법이다.
“찬아~ 엄마랑 다음에 같이 오자.”
“시러….”
“엄마가 맛있는 거 사 줄게, 응?”
“싫엉…. 백호… 흑… 흑흑.”
눈물을 뚝뚝 흘리는 찬을 이나가 달래 주고 있을 때,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어흥~ 백호가 찬이 찾아왔다.”
깜짝 놀란 이나는 설마 하는 마음으로 고개를 돌려보았다.
그녀의 눈앞에는 재혁이 백호 인형을 들고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