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 초밥이 맛있으면 초밥집을
방을 나온 유리는 문 앞 데스크에 앉아 있는 이나를 잠시 쳐다보았다.
그녀의 눈에 이나는 이쁘장한 것 빼고는 별다른 특별함이 느껴지지 않는 여자였다.
“정이나 씨.”
“네?”
“강재혁, 어떻게 꼬셨어?”
“….”
이나의 표정이 굳어지는 걸 보며, 유리는 무시하는 듯한 늬앙스로 말했다.
“기분 나빠 하지 마. 정말 궁금해서 물어본 거니까.”
유리는 이나의 대답을 듣지 않고 앞을 지나갔다.
이나는 별다른 대답 없이 유리에게 고개를 숙였다.
“얼마나 가겠니. 그깟 몸뚱이가지고.”
복도를 걸어가며 유리는 혼잣말을 했다.
자신도 갖지 못한 재혁의 마음을 저런 여자가 가질 수 있을 리가 없을 것이다. 만약 그렇게 된다 하더라도 그냥 두고 볼 생각은 없었다.
그것은 재혁을 차지하고 말고의 문제가 아닌, 자신의 자존심이 걸린 문제였다.
엘리베이터가 내려가는 소리가 들리자 이나의 입에서 깊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연애의 달콤함과 회사라는 현실의 괴리감이 느껴졌다.
만약 회사에 다시 소문이라도 난다면?
호텔 직원들의 입방아에 자신의 이야기가 오르내릴 것을 생각하니 아찔했다.
‘이 정도는 감수해야겠지?’
다행히 재혁은 둘이 있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다른 직원들을 대하듯 그녀를 대해 주었다.
앞으로도 그래야 할 텐데….
그녀가 걱정하고 있을 때, 이나의 휴대 전화가 울렸다.
재혁이 보낸 문자였다.
[오늘 밤 같이 있자.]
그의 문자에 이나는 한숨을 한번 푹 쉬고 답장했다.
[네.]
어쨌든, 재혁을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었다.
***
8시가 조금 넘은 시간,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열리는 문틈 사이로 재혁의 모습이 보였다.
“빨리 왔네요.”
이나가 현관에 다가서는데, 재혁의 두 팔이 그녀의 허리 사이로 파고들었다.
“!!”
“가만히 있어. 온종일 보고 싶어서 혼났어.”
“하루 종일 같이 있었잖아요.”
“그게 본 건가? 비서 정이나 말고, 내 여자 정이나가 보고 싶었어.”
보고 싶었다는 재혁의 말이 이나의 마음을 간지럽혔다.
촉촉한 그의 입술이 목 언저리를 탐하며 귓가로 올라왔다.
재혁은 이나의 귓불을 잘게 깨물다가 다시 귓가에 속삭였다.
“온종일 끌어안고 싶은 걸 얼마나 참았는지 넌 모르겠지.”
“….”
그의 끈적한 입술이 볼을 타고 앞으로 다가왔다.
이나가 안절부절못하는 사이 그의 입술이 그녀를 강탈했다.
뱀처럼 거칠게 미끄러져 들어오는 혀 놀림에 이나는 몸을 반쯤 비틀었다.
이후로는 달고 진한 키스의 향연이었다.
입술과 입술이 부딪쳤고, 혀와 혀가 뒤엉켰다.
유려하게 입 안을 탐하는 키스는 이나의 정신을 사로잡는 최고의 무기였다.
이나가 정신을 완전히 빼앗기면, 그는 얄밉게 그녀를 유린하던 입술을 슬며시 거두었다.
그리고 ‘이제는 네가 다가와 봐.’라는 듯한 진한 눈빛으로 이나를 바라보았다.
그 유혹에 이나가 몸을 맡기면, 재혁이 그녀를 번쩍 안아 침대로 향했다.
이제는 열 번도 더 사랑을 나눈 침실이었지만, 매번 새로운 사랑의 장소처럼 느껴졌다.
이나는 자신을 있는 힘껏 열어 보였다.
재혁은 기다렸다는 듯이 그녀의 안으로 깊숙하게 파고들었다.
“아…!”
재혁은 이나의 그 숨소리에 흥분하며 그녀의 안에 오래도록 머물렀다.
그리고 그녀를 온몸으로 느꼈다.
진한 사랑의 순간이 지나가고, 이나는 배고픔도 잊은 채 그의 품에 안겨 있었다.
벌써 세 번의 절정에 오른 터라 털끝 하나 움직일 힘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그때, 밖에서 초인종 소리가 들렸다.
재혁은 탄탄하게 잡힌 근육질 몸매 위에 대충 셔츠를 걸쳐 입고 밖으로 나갔다.
거실로 나와 보니 식탁 위에는 초밥 세트가 놓여 있었다.
이나는 재혁을 향해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뭐예요?”
“배고플 거 같아서, 시간 맞춰 가져오라고 했어.”
“초밥이네요? 여기 비싸지 않아요?”
“사람에 따라서 비싸게 느낄 수도 있지. 왜? 내 주머니 사정이 걱정돼?”
“그건 아니지만.”
“걱정하지 말고 맛있게만 먹어. 초밥 말고 초밥집을 사 줄 수도 있으니까.”
“네?”
“농담이야. 먹자고.”
재혁은 아무렇지 않게 자리에 앉았다.
‘치… 하여간, 나 놀리는 재미로 산다니까.’
이나는 그를 살짝 흘겨보며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초밥 한 조각을 먹는 순간… 이나는 탄성을 내질렀다.
“너무 맛있어요!”
행복해하는 이나를 보며 재혁은 속으로 생각했다.
이번 주 수입으로 초밥집을 인수할 수 있을지를….
***
다음 날 아침, 재혁과 이나는 해운대 호텔 오너들의 모임에 참석하기 위해 이동 중이었다.
“아. 그나저나 비서실 사람 뽑는 건 어떻게 됐지?”
“아. 그게….”
이나가 망설이자 재혁이 궁금해 물었다.
“뭐 문제라도 있나?”
“그런 건 아닙니다. 다만 익숙하지 않아서요.”
“뭐가?”
“누군가의 상사가 되는 게요.”
“그렇군. 익숙해져. 더 높이 올라가야 하니까.”
“네. 금주 안으로 마무리하겠습니다.”
“그래. 필요한 만큼 뽑아. 많으면 많을수록 좋아. 그래야 나랑 놀러 갈 시간이 생기지.”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제가 대표님 스케줄을 빽빽하게 짜 놓을 생각이거든요.”
“비서 하나는 잘 뒀군. 그리고 뭐 좀 물어볼 게 있는데.”
“네. 대표님.”
“드라마 투자를 계획 중이야.”
“드라마요?”
“우리 호텔을 배경으로 하는 드라마지.”
“….”
드라마라는 말에 이나의 표정이 굳어졌다.
재혁은 이나의 상태를 모른 채 계속 말을 이었다.
“투자할지 말지를 고민 중이야.”
“그걸 왜 저에게….”
“캐스팅 배우에 대해 판단이 되질 않아서. 이나가 그쪽에 있었으니 혹시.”
고개를 돌린 재혁은 이나의 표정을 보고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이나는 복잡해 보이는 얼굴로 입을 앙다물고 있었다.
“혹시 내가 실수했나?”
재혁의 말에 이나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닙니다. 방금 말씀하신 부분은 말씀드리기가 어렵겠네요. 연기를 그만둔 지 너무 오래되어서요.”
차분하게 대답하는 그녀의 말은 어딘가 단호해 보였다.
마치 자신을 보호하려는 고슴도치의 가시처럼 말이다.
재혁은 자신이 실수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나가 연기를 전공했다는 사실만 알았을 뿐, 그녀가 현재 연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는 생각해 보지 못했다.
“그렇군. 알았어.”
“네.”
고개를 끄덕이던 재혁이 이나에게 물었다.
“혹시, 연기는 왜 그만뒀지?”
재혁의 물음에 이나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대답했다.
“찬이가 생겨서요.”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괜한 걸 물어보았군. 미안해.”
“괜찮습니다.”
재혁은 들고 있던 서류를 가방 안에 넣었다.
서류의 가장 위로 남자 주인공의 프로필이 보였지만, 이나는 보지 못했다.
이나는 아무렇지 않은 듯 이따 시작되는 회의에 대한 서류를 재혁에게 내밀었다.
“해운대에 존재하는 호텔들과 저희 명성 그룹 간의 관계도를 정리해 봤어요.”
지시하지 않은 업무였기에, 재혁은 놀란 얼굴로 이나를 바라보았다.
“언제 했지?”
“혹시 몰라서 틈틈이 조사했습니다. 듣기로 신입 호텔 오너들은 신고식을 겪는다는데, 당하고만 계시면 안 되니까요.”
“거기까지 준비했다고?”
“본사 회장님 비서실에 도움을 좀 받았습니다. 한번 살펴보세요.”
그녀가 내민 서류에는 명성 그룹이 주변 호텔들에 빌려준 자금 내역이 정리되어 있었다.
재혁이 놀라며 말했다.
“정말이지 비서 하나는 잘 뒀군.”
“제 일인걸요.”
재혁은 안타까운 표정으로 이나를 바라보았다.
이토록 유능한 이나가 꿈을 포기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아픔이 있었을지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
“왜 그렇게 보세요?”
동정의 시선을 느꼈는지 이나가 재혁에게 물었다.
그는 재빠르게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아니야. 아무것도.”
***
갑작스럽게 성사된 오늘 모임은 대외적으로는 상호 업무 협력을 약속하는 자리였지만, 실상은 썬라이즈 오너인 재혁이 신고식을 치르는 자리였다.
해운대 호텔의 총수들은 재혁을 중심으로 둘러앉아 볼멘소리를 늘어놓았다.
“썬라이즈 개장하면 우리는 다 쫄쫄 굶겠어?”
“그러게. 왜 그렇게 크게 짓는 거야? 우린 다 죽으라는 거야? 아무리 명성이어도, 이건 너무했지.”
재혁의 어린 나이를 보고, 한 호텔의 오너가 은근슬쩍 말을 놓았다.
하지만 강재혁이 누군가, 그는 아무렇지 않게 반말로 맞받아쳤다.
“그게 큰 건가? 난 좀 작게 지었다고 생각했는데.”
순식간에 분위기는 찬물을 끼얹은 듯 차갑게 가라앉았다.
반말을 당한 오너는 얼굴이 붉어졌고, 주변 사람들은 재혁이 생각보다 세게 나오자 놀라는 눈치였다.
재혁은 느릿하게 앉아 있는 오너들을 둘러보다가 말했다.
“힐튼 호텔, 명성에서 차용해 간 자금이 얼마나 됩니까?”
“흡!! 그건.”
“아니, 힐튼이 명성에 자금 빌렸어?!”
다들 모르고 있던 사실이었는지 힐튼 호텔 오너에게 시선이 쏠렸다.
재혁은 틈을 놓치지 않고 말했다.
“이것저것 백억쯤 되더군요.”
“백… 백억!!”
“….”
힐튼의 오너는 사색이 되어 고개를 숙였다.
재혁은 멈추지 않고 그 옆에 있는 다른 오너에게 말했다.
“하나 호텔에는 개장 전에 요청한 부지도 양보해 드렸구요.”
다들 자신에게 불똥이 떨어질까 재혁의 시선을 피하기 시작했다.
재혁은 주위를 느릿하게 돌아보며 말했다.
“우리 때문에 매출이 줄어들 거 알고 있습니다. 심각한 타격을 입을 수도 있겠죠. 그래서 명성을 적으로 돌릴 겁니까?”
“….”
“사업 공시가 난 지는 벌써 10년이 지났습니다. 그동안 준비를 못 했다면, 귀사의 능력에 유감을 표해야겠군요.”
“뭐라고!”
한 호텔 오너가 발끈해서 소리치자 재혁이 그를 노려보았다. 눈빛에 압도당한 오너는 엉거주춤 서 있다가 다시 자리에 앉았다.
조금 전까지는 느슨했던 재혁의 시선이 급변하며 오너들을 조였다.
“상생하든지, 적이 되든지. 확실하게 선택하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신입이 왔다고 이렇게 신고식 하는 거, 상당히 구리니까 빨리 고치시고. 그럼 일어나겠습니다.”
재혁은 거침없이 일어나 회담장을 빠져나갔다.
그가 나가자마자 숨죽이고 있던 오너들 사이에서 불만들이 터져 나왔다.
“저!! 어린 노무 자식이!”
“이대로 가만히들 있을 겁니까?”
그때, 누군가 말했다.
“그럼, 명성하고 싸우자는 겁니까?”
“….”
차마 그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서로 눈치를 보던 오너들은 하나둘 자리에서 일어나 흩어졌다.
***
“어떻게 됐어요?”
이나가 회담장을 나온 재혁에게 물었다.
“덕분에 잘 마무리했어.”
“다행이네요.”
재혁이 시계를 보니 이제 막 오후 6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퇴근 시간인데 저녁이나 먹으러 갈까?”
“좋아요. 대신 오늘은 싼 걸로 먹어요.”
“싼 거?”
“네. 흠… 돼지국밥 어때요?”
“좋아.”
“그럼 제가 맛집 검색해 볼게요.”
신이 나서 휴대 전화를 꺼내는 이나의 뒷모습을 보며 재혁은 또 한 번 생각했다.
‘국밥집은 얼마나 하는지 알아봐야겠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