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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널 닮은 꽃 (32/72)

32. 널 닮은 꽃

이나는 찬과 엄마를 데리고 주말 내내 부산 여기저기를 돌아다녔다.

태종대에 오르며, 엄마는 아빠와 신혼여행을 이곳으로 왔었다며 소녀처럼 기뻐했다.

엄마의 들뜬 목소리 저편에는 20년 세월에도 지워지지 않은 아픔이 어렴풋하게 묻어 있었다.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이 어찌 세월이 간다고 잊힐까. 그냥 그 위에, 살아가면서 느끼는 기쁨들과 다른 아픔들을 차곡차곡 쌓아서 덮어 두는 것뿐이겠지.

이나는 돌아가신 아빠를 생각하며 엄마의 등을 쓸어 내렸다.

하지만 측은한 마음은 이어지는 엄마의 말 한마디에 와장창 깨져 버렸다.

“그러니까 너도 혼자 살지만 말고!”

엄마의 잔소리가 또다시 시작되었다.

요즘 들어 엄마의 모든 말은 꼭 이나의 결혼으로 끝났다.

이나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찬의 손을 잡고 언덕을 올라갔다.

이후 영도 문화 마을에서 사진도 찍고, 자갈치 시장에서 먹장어도 먹으며 즐거운 한때를 보냈다.

하지만 오랜만에 가족과 보내는 시간인데도 이나는 마음 한편이 허전했다.

맛있는 것을 먹을 때마다 재혁 생각이 났다.

맛있는 것을 먹을 때 누군가 생각난다면 그 사람을 사랑하는 거라는데….

이나는 힐끔 휴대 전화 화면을 확인했다.

재혁에게는 아무런 연락도 오지 않았다.

엄마와 함께 있을 때 연락이 어렵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니 자신을 배려하는 중일 것이다.

그럼에도 마음 한편으로는 서운한 마음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모양이다.

문득, 온종일 휴대 전화 화면을 확인하는 자기 모습이 낯설게만 느껴졌다.

그녀가 모르는 사이, 재혁에 대한 마음이 눈덩이처럼 불어나 있었다.

“붕붕~”

이나는 찬에게 눈을 돌렸다.

찬은 재혁이 준 장난감을 여행하는 내내 손에서 놓지 않았다.

재혁에 대한 그리움이 커질수록 찬에 대한 미안함 역시 덩달아 커졌다.

그녀는 미안한 마음에 찬에게 말했다.

“찬아. 뭐 갖고 싶은 거 있어?”

“응?! 아니 괜찮아!”

“왜. 서울 가기 전에 엄마가 사 줄게.”

“갖고 싶은 거 없어! 엄마랑 같이 노는 게 더 좋아!”

“….”

어찌어찌 하루를 더 보내고, 엄마가 돌아가는 일요일 저녁이 되었다.

공항으로 가는 내내 엄마는 계속 아쉽다는 말을 했다.

“아우~ 이박 삼일은 너무 짧다.”

“그르게.”

“이렇게 가끔 놀러 오는 것도 좋은 거 같아. 너 서울 왔다 갔다 하기 힘드니까.”

“좋지. 찬아, 재밌었어?”

“응! 나 부산 집 너무 좋아!”

찬이가 기뻐하는 모습에 이나는 마음이 철렁 내려앉았다.

찬이가 부산을 더 좋아하면 어떡해야 하지? 하는 걱정이 들었다.

이나는 찬의 마음을 확인하기 위해 한 번 더 물었다.

“찬아~ 그럼 부산에서 사는 건 어떨 거 같아?”

“좋아!”

마음이 다시 한번 철렁했다.

그때, 엄마가 옆에서 찬에게 말했다.

“찬찬~ 그럼 엄마랑 부산에서 살래?”

“응!”

이나는 당황하며 말했다.

“엄마. 나 요즘 바빠.”

그러자 엄마는 무안하다는 듯 말했다.

“농담이지. 서운하게.”

“아니, 괜히 기대하면 더 서운하니까….”

“네가 그러는 게 더 서운해.”

“….”

찬이가 눈치를 보며 이나에게 말했다.

“엄마. 나 괜찮아. 엄마 바쁘니까.”

눈치를 보는 그 표정에 이나는 목이 멨다.

문득 자신이 나쁜 엄마처럼 느껴졌다.

“아니야, 찬아. 엄마 안 바빠.”

이나의 상태를 본 엄마는 분위기를 바꾸려는 듯 손사래를 쳤다.

“얘 또 진지해진다. 그냥 한 말이야. 신경 쓰지 마. 찬이 나랑 잘 지내~ 그치~ 찬아?”

“응! 할머니!”

찬의 밝은 대답에도 이나의 마음은 쉽게 풀어지지 않았다.

재혁과의 관계에 관한 생각이 머릿속에서 복잡하게 뒤엉켰다.

공항 게이트에 도착할 때까지 엄마는 계속 이나의 눈치를 살폈다.

“다음 주에는 내가 올라갈게.”

이나가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하자, 엄마는 바쁜데 올 것 없다며 손을 내저었다.

이나는 찬이를 향해 쭈그려 앉아 두 눈을 마주 보며 말했다.

“찬~ 할머니 말 잘 듣고.”

“응! 엄마도 동료 아저씨 말 잘 듣고!”

“!!”

이나는 깜짝 놀라 엄마의 눈치를 살폈다.

다행히 엄마는 듣지 못한 것 같았다.

“그래. 알았어. 엄마가 전화할게. 밥 잘 먹고! 알았지?”

“웅! 걱정하지 마. 엄마 나 아기 아니야! 이제 다 큰 어린이야!”

“그래 우리 찬이 다 큰 어린이지. 일루 와, 엄마 뽀뽀.”

찬은 이나의 품에 쏙 안겨 그녀의 볼에 뽀뽀했다.

쪽-

이나는 있는 힘껏 찬을 끌어안았다. 미안한 마음에 끌어안은 두 팔에 힘이 들어갔다.

“으… 엄마 숨 막혀.”

“얘 늦겠다. 이제 가야지.”

찬을 품에서 놓았을 때, 이나의 볼에 눈물 한 방울이 흘렀다.

“엄마 울어?”

“아니. 엄마 안울어.”

이나는 눈물을 재빨리 훔치며 찬을 향해 웃었다.

“울지 마. 엄마….”

“엄마 안 울어~ 봐, 스마일~”

“그럼 내가 영상 통화 걸게 엄마!!”

“그래. 찬. 조심해서 가.”

“응! 엄마 빠이빠이!!”

찬과 인사를 나눈 후 이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엄마와 인사했다.

“조심해서 가고, 연락할게.”

“그래, 너도 아무리 바빠도 밥 꼭 챙겨 먹고.”

“응. 들어가, 늦겠다.”

“그래그래.”

이나는 찬과 엄마가 사라질 때까지 손을 흔들었다.

엄마와 찬이 시야에서 사라진 후에도 이나는 하염없이 찬이 사라진 검색대 입구를 바라보았다.

이 기분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허탈함? 미안함? 아니면 원망?

알 수 없는 감정들이 뒤섞여 속이 울렁거렸다.

더 그녀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은, 이 순간 가장 보고 싶은 사람이 재혁이라는 사실이었다.

이제 그녀는 부정할 수 없이 그를 사랑하게 되었다.

그가 지금 눈앞에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때, 너무나 듣고 싶은 목소리가 거짓말처럼 들려왔다.

“뭘 그렇게 우울한 표정으로 서 있어?”

이나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눈앞에는 흰색 프리지어 꽃다발을 들고 있는 재혁의 모습이 보였다.

“여전히 이쁜가 궁금해서 와 봤더니, 왜 우울해 있어?”

“대표님….”

그는 꽃다발을 이나의 눈앞에 불쑥 내밀었다.

투명하고 화사한 흰색을 가진 프리지어였다.

“오는 길에 널 닮은 꽃이 있길래 사 왔어.”

이나는 감동에 떨리는 마음으로 꽃다발을 받아들었다.

화사한 꽃잎마다 투명한 물방울이 맺혀 반짝이고 있었다.

그 모습이 꼭 자신의 기분처럼 느껴졌다.

기쁨과 슬픔이 공존하는 꽃의 눈물.

몰려오는 서러움에 눈물 한 방울이 그녀의 볼을 타고 떨어졌다.

재혁은 무슨 기분인지 알겠다는 듯 그녀를 가볍게 안아 주었다.

“힘든 주말이었구나?”

따뜻한 재혁의 목소리에 이나는 설움이 폭발해 버렸다.

그녀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그를 끌어안았다.

“보고 싶었어요.”

이나의 말에 재혁은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재혁 역시 이나만큼 힘겨운 주말을 보내고 왔다.

자신을 괴롭히는 부회장과 할아버지의 반대까지….

무엇보다, 부산에 도착해 그녀를 기다리는 시간은 그에게 있어 너무 긴 시간이었다.

하지만 이나의 말 한마디가 모든 것을 보상해 주었다.

“얼만큼?”

재혁의 물음에 이나는 조금 주저하다가 대답했다.

“많이요….”

재혁의 두 팔에 힘이 들어갔다.

그는 있는 힘껏 이나를 끌어안으며 말했다.

“너 없는 주말이 왜 이리도 길었는지 모르겠네. 처음도 아닌데 말이지.”

“….”

“나도 보고 싶었어, 이나야. 미치도록 말이야.”

주말 동안 두 사람을 괴롭히던 걱정들이 서로의 따뜻한 체온에 모두 녹아내렸다.

이나는 이 순간, 이 남자가 곁에 있어서 참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프리지어의 꽃말은 새로운 출발.

이나의 손에 들린 흰색 프리지어가 화사하게 피어 있었다.

***

서울 스케줄이 끝난 후 월요일 아침.

유리는 재혁의 방을 찾았다.

재혁이 명령했던 엘리베이터 문제는 이미 개선되어, 대표 전용 엘리베이터는 VIP 전용으로 변경되어 있었다.

유리가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 이나가 그녀를 맞이했다.

“어서 오세요.”

유리는 이나를 내려다보더니 물었다.

“대표님은?”

“기다리고 계십니다.”

유리는 거침없이 대표실 문을 열었다.

재혁은 무언가 골똘하게 보고 있었다.

힐끔 유리가 들어온 것을 확인한 그는 시선을 다시 서류 쪽으로 돌리며 말했다.

“잠깐 앉아 있어. 보내 준 보고서 확인하고 있으니까.”

고개를 끄덕이고 자리에 앉았다.

그녀는 서류에 온 정신을 집중하고 있는 재혁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서류 너머로 언뜻 보이는 그의 미간에 잡힌 주름이 유독 섹시하게 느껴졌다.

‘처음에 저 모습에 반했지.’

그녀가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재혁을 보고 있는데,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 유리 앞에 앉았다.

“투자금이 너무 많은 거 아닌가?”

재혁이 서류를 내밀며 말했다.

투자 항목에 관한 세부 사항이 적인 서류였다.

“대형 드라마 기획치고 투자금이 많은 건 아니야.”

“장소 대여 때문에 추가로 발생하는 영업적 손실도 고려해야지.”

“개장 전부터 촬영 시작하니까, 최대한 스케줄 맞추라고 요구하면 될 거야. 그리고 오히려 개장 초기에 드라마 촬영을 하면 사람이 몰려들 텐데, 호텔이라고 영업 투숙객에게만 영업 이익을 기대하는 건 아니잖아?”

“….”

“그걸 모를 리가 없을 테고. 그냥 마음에 안 드나 봐?”

“아니, 마음에 들어, 다만.”

“다만?”

“출연진이 빈약해.”

서울을 방문했을 때, 현준은 유리에게 사업 계획서 하나를 전달했다.

그가 썬라이즈 대표 자리에 오른다는 가정하에서 시작된 드라마 기획이었다.

썬라이즈를 배경으로 하는 호텔리어들의 삶을 그린 드라마로, 사업에 재능이 없는 현준이 기획한 프로젝트치고는 제법 효용성이 괜찮은 프로젝트였다.

물론 유리는 그 뒤에 숨겨진 현준의 꿍꿍이를 알 리 없었다.

설마, 숨겨둔 애인 때문에 시작한 사업이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한 것이다.

이유야 어찌 되었든, 드라마의 배경이 된다는 것은 지역을 대표하는 관광지로 발돋움할 좋은 기회이기도 했다.

물론 투자 비용을 회수하기 위해서는 드라마가 대박을 터트려 줘야 했다.

“이 배우들은 너무 위험한 거 아닌가?”

“대본에 돈이 많이 들어갔어. 김혜숙 작가 작품이니까.”

“그래도 배우 구성이 좋지 않아. 특히 남자 주연 배우가 약해.”

“명성에서 투자하는 엔터 쪽 배우잖아.”

“그렇다고 일부러 밀어줄 필요는 없지.”

“김 작가가 콕 찍었어.”

유리의 말에 재혁의 눈썹이 진짜냐는 듯 치켜 올라갔다.

“진짜야.”

“그런 거라면 할 수 없긴 하겠군.”

“그럼, 바로 진행해?”

“하루만 더 생각해 보자.”

“알았어. 그럼 확인해 보고 다시 연락 줘.”

“그래.”

유리가 나가고도 재혁은 한참 동안 서류를 들여다보았다.

“이 드라마, 하는 게 맞는 걸까?”

그가 바라보는 서류 위로 남자 배우의 이름이 보였다.

“장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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