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사방이 적
정수와의 대화를 마치고 병원을 나서자마자 누군가 재혁을 불렀다. 처음 보는 얼굴이어서 재혁은 누구냐는 듯 눈썹을 들어 올렸다.
“대표님. 회장님께서 보내셨습니다.”
재혁은 작게 한숨을 쉬었다. 사랑하는 손자가 몰래 도망갈 것을 우려해 사람을 보낸 것이다.
‘어련히 들를까. 그거 하나 못 참으시고.’
마음에 이는 작은 짜증을 느끼며 재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본사로 가려던 참이었다.
“그래요. 오래 기다렸습니까?”
“아닙니다. 방금 도착했습니다. 이쪽으로 모시겠습니다.”
재혁은 회장이 보낸 차를 타고 본사로 향했다.
멀지 않은 거리여서 금방 본사 건물에 도착했다.
재혁이 문을 열려는데, 누군가 빠르게 뛰어와 뒷문을 열어 주었다.
익숙하지는 않지만, 한 번쯤 본 얼굴들이 차 앞에 서 있었다.
‘총회 이사들?’
이익이 되는 일이 아니라면 꿈쩍도 하지 않는 능구렁이들이 대체 웬일이지?
재혁이 내리자 황 이사가 다가왔다.
“어서 오시죠. 강 이사님. 방문하신다는 소식 듣고 이렇게 나와 있었습니다.”
강 이사라는 호칭에 재혁은 눈썹을 살짝 찡그렸다.
이전까지 주주 총회에 참석한 적이 없기에, 누구도 자신을 이사라 호칭한 적이 없었다.
“회장님께서 말씀하신 겁니까?”
재혁이 묻자 황 이사는 최대한 공손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예. 인사드리라고 하셨습니다.”
“….”
정황을 보아하니, 자신을 본격적으로 회사 수뇌부와 연결하려는 듯 보였다.
썬라이즈 오너가 되는 순간부터 예견되어 있었던 일이었다. 그렇다고 이런 할아버지의 행동이 마음에 드는 것은 아니었지만.
재혁은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반갑습니다. 황 이사님. 박 이사님, 정 이사님두요.”
재혁은 한 번도 대화해 보지 않은 이사들의 이름까지 일일이 불러 가며 인사했다.
“이렇게 나와 주셨는데, 회장님을 뵈러 가야 할 것 같네요.”
“아, 물론이죠. 인사만 드리러 나온 겁니다.”
“그럼 또 뵙겠습니다.”
“네, 살펴 가시죠.”
재혁이 악수하고 지나가자 이사들은 90도로 허리를 숙였다.
건물 안으로 들어가는 재혁의 뒷모습을 보며 이사들은 묘한 기분을 느꼈다.
아무리 강 회장의 손주라지만, 자신보다 한참 어린 나이였다. 그런데 자신들을 이렇게 긴장시키다니….
재혁이 내뿜는 카리스마는 강 회장의 그것과 닮아 있었다.
재혁이 멀어지자 맨 뒤에 서 있던 정 이사가 후-하며 숨을 몰아쉬었다. 긴장한 모양이었다.
건물 안으로 사라지는 재혁의 뒷모습을 보는 황 이사의 눈빛에 왠지 모를 안도감이 묻어났다.
***
“나를 이렇게 만든 건 너야.”
강 회장의 방, 격정에 찬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은비야!”
“이거 놔!”
짝-!!
스피커를 찢을 듯한 타격음이 들리자, 강 회장은 카타르시스를 느끼며 탄성을 내질렀다.
“캬! 그래, 이거지. 잘한다, 김은비!”
강 회장은 모니터에 코를 박고 드라마를 보고 있었다.
세간에는 철인으로 불리는 강 회장이었지만, 사실 그는 누구보다도 드라마를 사랑하는 드라마 마니아였다.
똑똑-
밖에서 노크했지만, 강 회장은 드라마에 빠져 듣지 못했다.
“은비야!”
애간장을 녹이는 남자 주인공의 눈빛이 쏟아지고, 두 남녀의 뜨거운 키스 신이 이어질 때!
벌컥-
굳게 닫혀 있던 문이 열리며 재혁이 들어왔다.
“!!”
갑작스러운 재혁의 등장에 강 회장은 야한 동영상이라도 보다가 걸린 십대 소년처럼 허둥지둥 모니터 화면을 꺼 버렸다.
재혁은 당황한 강 회장의 모습과 애절한 OST가 흘러나오는 스피커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또 드라마 보셨네요.”
“너… 너! 누가 문을 벌컥 열고 들어오래! 노크도 몰라?!”
“드라마 본다고 외부 전화기 다 꺼 놓고, 인터폰까지 꺼 놓으신 분이 누구신데요. 노크도 세 번이나 했습니다.”
“흠흠….”
심각한 와중에 드라마의 대사가 눈치 없이 흘러나왔다.
“사랑해… 은비.”
“나두… 초이.”
대사를 들은 재혁이 피식 웃자, 강 회장은 서둘러 보고 있던 드라마를 꺼버렸다.
“왜 이리 빨리 왔어. 간 김에 현준이랑 대화도 하고 그러지.”
“할아버지 보고 싶어서요.”
재혁의 말에 강회장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그… 그래?!”
“농담입니다.”
“너 이 자식.”
“저한테 찔리는 거 없으세요? 문 앞에 이사분들 서 있던데.”
“아, 그래. 내가 인사해 두라고 시켰다. 앞으로 주주 총회에서 자주 볼 거니까.”
“제가 총회 이사라도 된 것처럼 말씀하시던데요.”
“참석만 안 했지, 이미 총회 이사 자격은 충분하고도 넘치지.”
“할아버지.”
“네가 내 손주여서 뿐만이 아니라, 실제로 능력도 그렇다는 거야. 내 말이 틀려?”
“….”
강 회장의 촘촘한 반박에 재혁은 튀어나오는 불만을 목 뒤로 삼켰다.
어쨌든 회사 전면에 나서겠다고 말한 사람은 자신이었다.
“네. 알겠습니다.”
평소와 다르게 순순히 대답하는 재혁의 태도에 강 회장은 적잖이 놀랐다.
이사들과 대면을 시킨 것은, 이제는 뒤로 뺄 생각하지 말라는 일종의 경고였다.
일 좀 가르칠라치면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가는 것이 특기인 놈이니 확실히 잡아 두려는 심산이었는데….
재혁의 태도를 보니 미심쩍었던 마음이 조금은 가시는 강 회장이었다.
재혁은 더 이상의 논쟁은 피하려는 듯 화제를 돌렸다.
“식전이시면 식사하시죠.”
“그래, 안 그래도 우미정에 자리 마련해 놓았다.”
“네.”
***
재혁과 강 회장이 도착하자 준비된 상차림이 두 사람 앞에 놓였다.
24첩 수라상을 방불케 하는 상차림에서 강 회장이 제일 좋아하는 것은 새우젓 중 으뜸이라는 추젓이었다.
그는 수많은 찬을 마다하고, 추젓 작은 종지 하나면 밥 한 그릇을 뚝딱 해치우곤 했다.
오늘도 강 회장은 종기에 든 새우젓을 한 숟가락 가득 퍼 밥 위에 쓱쓱 비벼 먹었다.
짭조름한 밥을 입 안에 한가득 넣고 만족스러운 표정을 짓는 강 회장의 모습에 재혁은 남모르게 마음이 놓였다.
언제 몸 어딘가가 고장 나도 이상하지 않을 연세였다.
식사를 맛깔나게 하는 것만으로도 감사할 일이다.
“유리랑 일하는 어떠냐?”
강 회장의 무심한 물음에, 재혁은 인상이 구겨지려는 것을 간신히 참았다.
“아직은 괜찮습니다.”
“귀띔하지 않아서 서운했든?”
“조금은요.”
“알면 안 갈 게 뻔한데, 내 입으로 말할 수는 없지.”
“그러실 거라 생각했습니다.”
“그래, 기완 간김에 얘기 안 나오게 처신 잘해. 앞으로 제수씨가 되니까.”
그럴 거면 보내지 마시죠. 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다.
“네.”
재혁의 대답에 잠시 말이 끊겼다.
멈췄던 식사를 하던 중, 강회장이 다시 입을 열었다.
“현준이 약혼식은 조금 미뤄질 거다.”
“그렇군요….”
“어째, 표정 보니까 안심하는 것 같구나?”
“그럴 리가요. 현준이 약혼식이랑 저랑 무슨 상관이 있다구요.”
“없긴 왜 없어. 약혼식까지 결혼할 사람 데려온다는 약속 잊은 건 아니지?”
“….”
“얼마 안 미뤄. 시간 있다고 넋 놓고 있지 말고 서둘러 준비해 놔. 아니면 세기 그룹 쪽하고 혼담 얘기해 볼 거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재혁의 대답에, 강 회장은 갑자기 이나 얘기를 꺼냈다.
“그 아이는 안된다.”
멈칫-
재혁의 눈매가 작게 떨렸다.
강 회장은 못을 박듯이 말을 이었다.
“알아봤어.”
“뭘 말씀이시죠?”
“정이나라는 그 아이 말이다.”
“….”
“그런 눈으로 보지 마라. 들었던 소문이 사실인지 확인한 것뿐이니까.”
“과하시네요.”
“과하긴, 이 녀석아. 애 딸린 여자랑 결혼하겠다고?”
강 회장은 답답한 듯 언성을 높였다.
재혁은 그런 강 회장의 말을 무시하며 음식에 손을 뻗었다.
“제가 결정합니다.”
“절대 안 돼.”
“소용없으세요.”
“놀아. 그냥 놀기만 해. 지금 네가 좋아 죽겠다는데 떼어 낼 생각 없으니까, 하지만 적당히 해, 그 불장난 정도면 그냥 둘테니까. 불길 거세지면 내 손으로 끌거야.”
재혁이 수저를 내려놓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지금 협박하시는 겁니까?”
재혁은 쌍심지를 켜고 강 회장을 노려보았다.
살기를 담은 손주의 눈빛에 강 회장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평소에 말을 안 듣는다 했지만, 그것은 귀여운 투정에 불과했다.
지금 손주는 자신을 향해 진심으로 이빨을 드러내고 있었다.
강 회장이 재혁을 향해 호통쳤다.
“너, 지금 나를 어떻게 쳐다보는 게야!”
“저까지 잃고 싶으신 것이 아니라면 그 여자 건드리지 마세요.”
“뭐? 너 그게 무슨 말이냐?!”
“협박하는 겁니다. 사랑하는 누군가를 잃는 건 한 번으로 족해요.”
“!!”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경험을 같이한 두 사람이었다. 재혁의 말은 비수가 되어 강 회장의 마음을 찔렀다.
‘그게 나에게 할 소리야, 이놈아….’
강 회장은 일단 한발 뒤로 물러나기로 마음먹었다.
지금 손주를 자극하기보다, 때가 되면 그 여자를 적당히 다른 곳으로 발령을 내 버리면 될 일이었다.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지는 법. 블라디보스토크처럼 먼 곳이면 더 좋겠지.
그는 노기 어린 표정을 거두고는 재혁에게 물었다.
“이 할아비에게 대들 만큼, 그렇게 좋아?”
강 회장의 질문에 재혁은 곰곰이 생각하더니 대답했다.
“네.”
“알아서 해. 그렇다고 허락한 건 아니야.”
“보시면 마음에 드실 겁니다.”
“그럴 일도 없고. 당장 떼어 내지 않겠다는 거야. 알았어?”
“….”
“내가 이 정도 물러났으면 너도 한발은 물러나야지.”
“그럼 저도 알았습니다. 지금은요.”
“한 마디도 안 지는구나. 지 애비 닮아서.”
“부전자전에 부전자전이니, 할아버지를 닮은 거겠죠.”
“먹자. 식는다.”
수저를 드는 강 회장을 바라보며 재혁은 씁쓸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작은아버지를 비롯해 사방이 적인 상황에서, 할아버지까지 적으로 만들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할아버지만은 제 편이면 좋겠습니다.’
문득 이나가 미치도록 보고 싶었다.
주말에는 서울에 있으려고 했는데, 안 되겠다.
일찍 내려가서 얼굴이라도 좀 보지 뭐.
이런 상황에도 이나 생각을 하니 피식 웃음이 흘러나왔다.
그런 재혁을 힐끔 바라보며 강 회장은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여자 고르는 것도 지 애비 닮아서, 쯧쯧.’
재혁의 아버지 태수가 결혼할 때, 강 회장은 두 사람의 결혼을 반대했다.
상대 집안은 평범한 회사원 집안이었고, 그 사실을 강 회장은 용납할 수 없었다.
태수가 죽은 후, 강 회장은 두 사람을 축복해 주지 못했던 것이 평생 한으로 남았다.
유리와의 파혼을 허락한 것에는, 아들에게 해 주지 못한 것을 해 주고 싶다는 마음이 있었다.
이제 어떤 여자를 데려와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는데, 하필 미혼모라니….
‘그건 안 되지…. 안 되고말고.’
두 사람의 동상이몽 속에 하루가 저물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