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 각자의 사정
한순간의 쾌락이 물러나자, 현준은 몸을 돌려 여자의 옆에 축 늘어졌다.
그는 동공이 풀린 채로 옆에 놓인 담배를 물었다.
현준이 내뱉은 담배 연기가 허공에 흩어지자 토라져 있던 여자가 몸을 돌려 그의 품에 안겼다.
“오빠, 좋았어?”
찢어진 눈에 유난히 오뚝한 코, 긴 금발에 태닝한 진한 피부가 도드라지는 그녀는 슈퍼 모델 황보라였다.
그녀의 아양에도 현준은 목적을 잃은 사람처럼 허무한 표정으로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오빠 오늘 정말 끝내줬어.”
“뭔데.”
현준의 말에 보라의 눈빛이 바뀌었다.
처음부터 이 말을 하고 싶어서 현준을 만난 그녀는 두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저번에 말한 배역, 되는 거야?”
현준의 인상이 구겨졌지만 보라는 질문을 멈추지 않았다.
“아니, 소문에 썬라이즈 오너가 바뀌어서 드라마 투자 안 한다고.”
현준의 신경질적인 대답이 돌아왔다.
“누가 그래?”
“그냥 어디서 들었어.”
“소문 믿지 마. 오너 금방 다시 바뀔 거니까.”
현준이 몸을 돌려 테이블에 담배를 비벼껐다.
보라는 확실히 확인하려는 듯, 현준에게 몸을 바싹 붙이며 물었다.
“정말이지?”
“너 나 못 믿어?”
“믿지! 믿는데… 그 강재혁이라는 사람,”
“야!”
“깜짝이야!”
“내 앞에서 강재혁 얘기 꺼내지 말랬지! 어차피 아빠도 없는 고아 자식이야. 회장님이 좀 예뻐한다고 뭐 할 수 있는 놈 아니라고. 알았어?”
“알지. 오빠 아버님이 부회장님이시잖아. 오빠, 그럼 그 배역 꼭 약속한 거다?”
“나 강현준이야.”
“알지~ 그런 의미에서 우리 와인 한잔할까?”
보라는 요염한 표정으로 현준을 바라보며 와인쪽으로 걸어갔다.
현준은 보라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군살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완벽한 보라의 몸매였다.
그의 얼굴에 아쉬움이 묻어났다.
‘이제 슬슬 정리해야 하는데.’
유리와 약혼하기 전부터 은밀하게 이어져 오던 밀애를 이제는 마무리해야 했다.
하지만…
“자, 받아.”
현준이 잔을 받자, 보라가 그의 잔에 와인을 채웠다.
“우리의 사랑을 위해.”
자신을 유혹하는 매력적인 눈웃음에 현준은 다시 욕망이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현준은 보라의 손을 당겨 자신의 몸 위로 올리며 생각했다.
‘조금만 더 즐겨도 되겠지!’
***
밀애를 즐긴 뒤 서울로 돌아가는 길.
스포츠카 옆자리에는 보라가 곤히 잠들어 있었다.
현준 역시 눈꺼풀이 무거워 계속 눈을 비비며 운전했다.
밀애 장소에 기사를 데려올 수도 없는 노릇이어서 오랜만에 하는 운전이었다.
차도 차명으로 빌린 것이어서 그의 운전은 어딘가 서툴러 보였다.
그렇게 사거리를 지날 때, 현준을 가로지르며 다가오는 차를 보지 못하고 지나갔다.
“어엇!”
뒤늦게 다가오는 차를 발견한 현준이 급하게 핸들을 꺾어 보았지만 이미 늦은 후였다.
쾅!!
현준의 차는 도로에 긴 타이어 자국을 내며 십여 미터를 더 미끄러져 가다가 가로수에 처박혔다.
앞 범퍼가 완전히 부서질 정도의 큰 사고였다.
“으….”
정신이 없는 중에도 그는 보라를 들키면 안된다는 생각 뿐이었다.
“야… 일어나.”
“아… 나, 나 목 아파 오빠.”
“일어나라고!”
그는 유리창이 전부 깨진 보조석의 문을 열더니 보라를 밖으로 밀었다.
“빨리 나가.”
“나 아프다니까.”
“배역이고 뭐고 다 끝장나고 싶어? 야, 여기서 걸리면 너도 나도 다 끝이야!”
“….”
“빨리 가. 근처 병원에서 치료받고 있어. 내가 연락할 때까지 먼저 연락하지 말고. 알았어?”
보라는 경멸의 눈빛으로 현준을 보면서도 어쩔 수 없이 몸을 일으켰다.
차에서 내린 보라는 비틀거리며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
재혁은 이른 아침부터 공항으로 향했다.
‘우애 있게 지내라고 했지!’
서울에 올라가지 않겠다고 하자마자 떨어진 강 회장의 불호령에 재혁은 어쩔 수 없이 서울행 비행기에 올랐다.
공항에 도착하니 유리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재혁은 말도 없이 자신의 비행기 티켓까지 끊은 유리의 행동에 화가 나 있었다.
그녀의 행동이 자꾸 여지를 만드는 것처럼 느껴져서였다.
유리가 다가왔지만, 재혁은 그녀를 모른 척하며 게이트로 향했다.
인사를 무시하는 재혁의 냉대에 유리의 미간에 주름이 졌다.
그녀는 재혁의 뒤를 바짝 쫓으며 말했다.
“같이 일해야 하는데 계속 이럴 거야?”
“일하는 사이면 일하는 사이답게 굴어.”
“일하는 사이답게 구는 게 뭔데?”
재혁이 가던 걸음을 멈추고 뒤따라오던 유리를 돌아보았다.
그녀는 지지 않고 재혁을 노려보며 말했다.
“대체 나한테 뭘 바라는 건데?”
“바라는 거 없어. 너도 나에게 뭘 안 바랐으면 좋겠고.”
“아예 서로 모른 척하자는 거야?”
“감정 빼고 일 만해. 오늘처럼 네 멋대로 스케줄 잡는 짓 다음부터는 용서 안 하니까.”
“과민반응에 과대망상인 건 아니?”
“그럼 다행이네. 네가 나에게 미련 갖는 거보다 내가 과대망상인 게 나으니까.”
재혁의 말에 유리의 얼굴이 붉어졌다.
유리는 재혁을 노려보고는 몸을 돌려 게이트로 향했다.
재혁은 할아버지를 향한 짜증에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리 명성그룹 회장이라 할지라도 유리에 관한 인사를 마음대로 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이 상황에 짜증이 몰려오는 것까지 막을 수 없었다.
빨리 유리 문제를 해결해야겠다고 생각하며 그는 유리의 뒤를 따라갔다.
***
띠링-
문자 알림음이 울리자, 현준이 침대맡에 놓인 휴대 전화를 낚아챘다.
손과 발에 깁스를 한 사람치고는 재빠른 몸놀림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보라의 문자였다.
[아까 기자들이 한바탕 몰려왔어.]
문자를 본 현준은 옆쪽에 앉아 있는 아버지의 눈치를 보며 인상을 구겼다.
[그래서 뭐라고 했어? 잘 대답했어?]
[아 몰라, 답답해. 나가고 싶어.]
[정신 안 차릴래?]
[아 모르겠고. 나 여기 오래 안 있을 거야. 오빠, 저번에 말했던 배역이나 챙겨 줘. 기자들 계속 와서 힘들어, 나.]
‘이게 감히 어디서?’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지금은 보라를 달래야 할 때였다.
그가 답장을 보내려는데, 갑자기 병실 문이 열리며 유리가 들어왔다.
깜짝 놀란 현준은 당황한 나머지 휴대 전화를 바닥에 떨어트렸다.
“현준 씨, 괜찮아?”
그 모습을 본 유리가 다가와 현준의 휴대 전화를 주웠다.
“어? 어. 왔어? 아 손이 미끄러졌네, 고마워.”
재혁은 한발 늦게 병실로 들어왔다.
재혁을 본 현준의 표정이 굳어졌다.
‘뭐야. 부산에서부터 같이 온 거야?’
불쑥 질투심에 사로잡혔던 현준은 아차 싶었는지 서둘러 표정을 바꾸었다.
“유리야. 어떻게 여기까지 왔어.”
현준의 말에 유리는 선한 미소를 띠며 대답했다.
“당연히 와야지. 아버님, 안녕하셨어요?”
“어, 그래. 먼 길 오느라 고생 많았다. 재혁이 너도 왔구나.”
“네, 작은아버지.”
인사를 주고받는 재혁과 정수 사이에 작은 불꽃이 튀었다.
“좀 어때?”
유리가 현준의 곁에 다가앉으며 물었다.
“아, 그 자식들이 갑자기 들이받아서 짜증 나게 됐지, 뭐.”
“몸은?”
유리의 질문에 현준은 우물쭈물하며 대답했다.
“다리는 부러졌고 팔도 인대가 늘어나서….”
“얼마나 있어야 한대?”
“깁스만 3개월.”
“….”
“걱정하지 마! 깁스하고서라도 약혼식은!”
“현준 씨 아픈데 어떻게 그냥 강행해. 나는 괜찮으니까 조금 미루자.”
“아니야. 그냥 예정대로 다음 달에,”
“아니. 내 약혼식에 깁스하고 찍은 사진 남기고 싶지 않아.”
언뜻 보기에 상냥해 보이는 그녀의 미소 안에는 날카로운 가시가 담겨 있었다.
“….”
현준이 선뜻 대답하지 못하자 유리는 정수를 보며 말했다.
“아버님, 괜찮으시죠? 저희 집에는 제가 말하겠습니다.”
“그래, 그러려무나.”
고개를 끄덕이는 정수는 어딘가 심기가 불편해 보였다.
“자, 그럼 두 사람 대화 좀 나누라고 하고, 재혁이는 나랑 얘기 좀 하자.”
재혁은 고개를 끄덕이고 정수를 따라 나갔다.
재혁과 정수가 나가고, 둘만 남은 병실 안에는 냉랭한 기운이 맴돌았다.
유리는 팔짱을 끼고서 감정 없는 시선으로 현준을 바라보았다.
현준은 찔리는 것이 있는지 유리의 시선을 피했다.
유리가 차가운 말투로 물었다.
“어디 갔었어?”
“그게….”
“여자랑 있었니?”
“유리야! 그게 무슨 말이야! 내가 너를 두고 왜 그러겠어!”
“차명으로 랜트한 차에, 기사도 없이 운전하고. 그것도 새벽에.”
“네가 오해하는 그런 거 절대 아니야! 알잖아. 양평 쪽에 새로 오픈할,”
“알지. 그런 알리바이 하나 없이 움직였겠어?”
“….”
“나한테 걸리지 마.”
“절대, 절대 아니야. 나 못 믿어?”
현준은 유리를 달래려는 듯 힘겹게 손을 뻗어 그녀의 손을 잡았다.
유리는 물끄러미 현준의 손을 바라보더니 작게 한숨을 내쉬고 말했다.
“그래, 알았어. 오후에는 바로 부산으로 내려가 봐야 해.”
“벌써? 온 김에 좀 더 있다 가지….”
“오픈 전이라 바쁜 거 알잖아. 비행기 시간까지는 여기 있을게.”
“그래.”
그는 다른 병원에 입원해 있는 보라를 떠올리며 생각했다.
‘절대 들켜서는 안 돼…. 절대.’
***
“바쁜데 왔구나?”
어딘가 비꼬는 듯한 정수의 말투에도 재혁은 동요하지 않고 대답했다.
“회장님이 부르셔서요.”
“빈말이라도 걱정돼서 왔다는 말은 못 하는구나.”
“빈말도 마음이 있어야 하죠.”
“….”
서로를 바라보는 눈빛에 진한 적의가 느껴졌다.
한참 동안 재혁을 노려보던 정수가 입을 열었다.
“나랑 약속한 거 잊었니? 회사에 관심 없다고 분명 네 입으로 말했던 거 같은데.”
재혁은 지금도 회사에는 관심이 전혀 없었다.
눈앞에 있는 이 남자를 통해, 인간의 탐욕이 얼마나 추악한지 분명히 알게 되었으니까.
하지만 정수가 적의를 드러낼 때면 재혁은 그의 욕심을 꺾어 버리고 싶은 충동이 일곤 했다.
재혁이 정수를 도발했다.
“사람 마음은 변하는 거 아니겠습니까.”
재혁의 대답에 정수는 미간을 좁혔다.
“후계 자리에 도전하겠다는 말처럼 들리는구나?”
“글쎄요.”
“뭐?”
“걱정되시면 조금 더 분발하셔야겠네요. 현준이 능력이 후계자가 되기에는 좀 아쉬운 건 사실이니까요.”
“재혁아. 예전부터 말했지만, 꼭 네가 아니어도 이 회사는,”
재혁은 정수가 말하는 도중 자리에서 일어났다.
“바빠서 먼저 나가 보겠습니다.”
재혁은 가볍게 고개를 숙이고는 휴게실을 빠져나갔다.
확 달라진 재혁의 태도에 정수는 당황스러운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재혁이 자신을 싫어하고 있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적의를 드러내는 것은 처음이었다.
그는 복도 끝으로 사라지는 재혁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무슨 수를 써야겠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