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나한테 오면 안 되나?
재혁은 아침부터 밀려드는 결재 서류에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대표님, 엘리베이터 공사 변경 건입니다.”
“대표님, 건물 상층부 인테리어 건입니다.”
“대표님….”
정신이 없는 상황에서도 그는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모든 일을 완벽하게 처리해 나갔다.
“대표님, 오늘 비서는 어디 갔습니까? 방문자 스케줄 정리 좀 해 주면 좋은데….”
결재판을 가져온 지배인이 아쉬운 듯 말하자 서류를 내려보던 재혁이 고개를 들었다.
“병가입니다. 내일부터 출근할 겁니다.”
“네….”
가볍게 대답하고 서류로 다시 시선을 던지는데, 문득 잠들어 있던 이나의 모습이 떠올랐다.
자신의 헐렁한 셔츠를 몸에 걸친 채 지쳐 잠들어 있던 모습을 떠올리자 그의 얼굴에 살며시 미소가 찾아왔다.
“저… 뭐가 잘못되었나요….”
재혁이 갑자기 웃자 총지배인이 놀라며 물었다.
“아. 아닙니다. 좋네요. 이대로 진행하세요.”
“네, 알겠습니다.”
총지배인이 돌아설 때, 재혁이 그를 다시 불렀다.
“지배인님?”
“네, 대표님.”
“저번에 말했던 여수 호텔 방문 건 말입니다.”
“아, 네. 답사 가신다고 하셨죠.”
“그거, 내일 갔다 오죠.”
“알겠습니다. 그럼 준비해 놓도록 하겠습니다.”
“아니요. 정 비서가 알아서 할 겁니다.”
“네, 알겠습니다.”
지배인이 나가고 재혁은 다시 일에 집중했다.
문득 이나 생각이 나서 시계를 보니 그녀가 일어날 시간이 지나 있었다.
그는 잠시 고민하다가 이나에게 문자를 보냈다.
[깼나?]
문자를 보내고 휴대 전화를 내려놓자마자 답장이 왔는지 궁금해졌다.
확인해 보니 아직 답장은 오지 않았다.
‘안 봤나?’
문자를 하는 것이 답답하다고 느껴져 이나에게 전화를 걸려했다.
그때 이나에게 문자가 왔다.
[네.]
[몸은?]
[괜찮아요.]
그다음에는 무슨 말을 할까?
이런저런 문자를 쓰고 지우던 재혁은 그냥 생각나는 말을 쓰기로 하고 답장을 보냈다.
[오늘 밤도 봅시다.]
[오늘은 너무 힘들어요.]
그녀가 보낸 답장을 재혁은 다시 따라 읽었다.
“오늘은 너무 힘들어요….”
그럴 만했다.
이나의 체력이, 평소 운동으로 체력을 관리해 온 자신과 같은 상태일 수는 없을 테니까.
“그럼 맛있는 거를 사 줘야겠네.”
[알았어. 그럼 집에 있어. 저녁 같이 해.]
문자를 보내고 나니 이나가 거절할 것 같았다.
재혁은 이나가 답장하기 전에 다시 문자를 하나 더 보냈다.
[오늘 안 건드리는 대신이야.]
[알겠어요.]
“알겠어요.”
그는 만족한 표정으로 휴대폰을 내려 놓았다.
남들처럼 문자를 주고받는 것도 나쁘지 않은 기분이었다.
“좋군.”
그의 마음에 바람이 불었다.
차가운 마음을 따뜻하게 감싸는, 사랑의 봄바람이었다.
***
오후 5시 30분 재혁에게 문자가 왔다.
[내려와.]
예상보다 이른 시간이라 이나는 준비가 덜 된 상태였다.
[잠시만요.]
이나는 급하게 메이크업을 마무리하고 아파트 입구로 향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마자 문 앞에 서 있는 재혁의 차가 보였다.
대표 전용차가 아닌, 서울에서 타고 다니던 재혁의 개인 자가용이었다.
이나가 차에 오르자 재혁이 먼저 인사말을 건넸다.
“푹 쉬었나?”
“죄송합니다. 앞으로 이런 일 없도록,”
“걱정마, 나도 앞으로는 이번처럼 격하게는 안 할 테니까.”
재혁의 말에 이나는 얼굴을 붉혔다.
재혁은 그런 이나를 귀엽다는 듯 바라보며 말했다.
“그럼 몸보신 하러 가볼까?”
재혁은 차를 몰아 부산을 빠져나갔다.
처음에는 근처로 가겠거니 했던 이나는 차가 한참 달리자 의구심이 들었다.
“어디로 가는 거예요?”
“바다보러.”
“바다요? 집 앞이 바다인데….”
“바다라고 다 같은 바다가 아니니까. 조금만 기다려 다 왔어.”
해가 뉘엿뉘엿 지는 가운데, 멍하니 앉아 있으니 이나는 눈꺼풀이 조금씩 무거워졌다.
“피곤하면 자. 도착하면 깨울 테니까.”
“괜찮아요. 다왔다면서요.”
하지만 말과 다르게 이나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잠이 들었다.
그 사이 재혁의 차는 멈추지 않고 고속도로로 진입하고 있었다.
***
“정이나씨. 일어나지?”
잠결에 들려오는 재혁의 목소리에 이나는 눈을 떴다. 해가 져서 주위는 어둑했고, 그녀가 알지 못하는 곳이었다.
“다 왔어. 일어나.”
이나는 눈을 비비며 재혁에게 물었다.
“어디예요?”
이나의 질문에 재혁은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여수.”
마치 가까운 공원에 놀러 온 것 같은 말투였다.
“아…. 여수구나. 잠깐, 여수요?!”
여수라는 말에 이나는 깜짝 놀라 벌떡 몸을 일으켰다.
“가자. 식사시간이 늦었네.”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요! 저녁 먹으러 여수까지 온다고요?!”
“밥 먹으러 여수 오는 게 이상한가?”
“당연히 이상하죠! 두 시간도 넘는 거리인데!”
재혁은 시간을 확인하며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두 시간 하고 15분쯤 걸렸네.”
“왜 여기까지 와요?”
“맛있는 한정식집이 있어.”
“그런 건 부산에도 있잖아요!”
“부산은 여수가 아니잖아. 일단 내리자고, 여기까지 왔는데 그냥 갈 수는 없잖아?”
재혁이 차에서 내리자 이나가 그의 뒤를 따라 내렸다.
“대표님!”
“정이나 씨 좋아하는 사람 부를 때 목소리가 커지는 거 같아?”
“뭐라고요?!”
“나를 부를 때마다 그렇게 큰 소리로 부르니까.”
“빨리 돌아가요. 왜 여수까지 와서.”
할 때, 눈치 없는 이나의 배꼽시계가 꼬르륵- 소리를 냈다.
이나의 꼬르륵 소리에 재혁이 몸을 돌려 이나를 바라보았다.
“거봐 배고프잖아. 여기까지 왔는데 그냥 가는 거도 이상하지 않나.”
이나가 별다른 대꾸를 못 하자, 그는 웃으며 돌아섰다.
목적지가 어딘지 말해 주지 않을 때부터 의심했어야 했다.
멀리 가 봤자 부산 외곽일 거로 생각했는데 여수라니. 대체 무슨 꿍꿍이로….
두 사람이 들어간 곳은 여수의 유명한 한정식집이었다.
이나는 방 안에 마련된 저녁상을 보고 입이 떡 벌어졌다.
커다란 방을 절반은 채운 상 위에 온갖 반찬들이 상다리가 부러질 정도로 차려져 있었다.
“이… 이걸 다 먹자구요?”
이나가 놀라서 묻자, 재혁은 그녀에게 젓가락을 내밀며 태연하게 말했다.
“아까 천둥소리가 울리는 거 보니까 다 먹을 수 있을 거 같은데?”
재혁의 말에 이나가 그를 흘겨보았다.
“농담이야. 싸움은 밥먹고 하자고.”
이나가 수저를 받자 재혁은 흰쌀밥을 한 숟갈 가득 퍼서 입에 넣었다.
밥을 맛있게 먹는 재혁의 모습에 이나는 시장끼가 돌았다.
그녀는 재혁을 노려보는 것을 멈추고, 자신의 앞에 놓인 재첩국을 떠 입에 넣었다.
“!!”
그 순간 침샘이 폭발한 이나의 식사가 시작되었다. 재혁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맛있지?”
이나는 자존심이 상해 재혁의 말에 대답하지 않고 식사를 이어나갔다.
굴비구이와, 궁중떡갈비, 온갖 나물 무침들과 짭조름한 잡채까지.
반찬 하나하나가 너무 맛있어서 젓가락질을 멈출 수가 없었다.
“하…!”
마지막 숭늉 그릇을 내려놓을 때, 이나의 입에서는 만족의 탄성이 흘러나왔다.
재혁은 싹싹 비워진 그릇을 보며 놀란 표정으로 말했다.
“정말 다 먹었네?”
“흠…. 맛있긴 하네요….”
이나는 민망함에 말을 돌렸다.
“그나저나 정말 밥 먹으러 여기까지 온 거예요?”
“그럴 리가. 여수에 있는 경쟁업체 답사차 온 거야.”
“그럼.”
“맞아. 오늘 여기서 자고 갈 거야.”
“잠깐만요! 왜 얘기가 그렇게 되는 건데요?”
“몰랐던 건 오늘 출근 안 한 이나 잘못이지.”
“대표님이 출근하지 말라면서요.”
“어쨌든 그렇게 됐어. 방은 두 개 잡아놨으니까 걱정하지 말고.”
“그런 문제가 아니잖아요. 오늘은 어쩔 수 없겠지만, 제 개인 스케줄도 있으니 다음부터는 언질이라도 주셔야죠.”
“그건 사과하지. 자, 다 먹었으면 빨리 일어나지, 이러다 시간 놓치겠어.”
“또 어디 가는데요?”
“배를 채웠으니 바다를 보러 가야지.”
식당을 나온 두 사람은 케이블카가 있는 돌산 공원으로 향했다.
주차장에 내리자, 마지막 케이블카 탑승 시간이 다 되었다는 방송이 나오고 있었다.
“마지막 케이블카 탑승 시간은 9시, 9시입니다.”
시간을 확인하니 8시 55분이었다.
“빨리 갑시다.”
재혁은 이나의 손을 잡고는 케이블카 탑승장을 향해 달려갔다.
얼떨결에 그의 손을 잡고 달리다 보니 매표소 창구의 셔터가 내려가는 모습이 보였다.
“잠깐!”
두 사람은 간발의 차이로 마지막 탑승권을 구매할 수 있었다.
표를 구한 재혁은 다시 이나의 손을 잡고 계단을 올라갔다.
숨이 차고 땀이 뻘뻘 흐르는 중에도 재혁은 이나의 손을 놓지 않았다.
“헉헉….”
케이블카에 올르자 마자 이나는 지쳐서 눈을 감았다.
그러자 재혁이 말했다.
“아래 한번 봐.”
“후.”
이나는 재혁을 원망의 눈초리로 바라보고는 아래로 시선을 돌렸다.
“와아.”
이나의 입에서 자연스럽게 탄성이 흘러나왔다. 두 사람의 발아래로 아름다운 여수 밤바다의 야경이 펼쳐져 있었다.
높게 솟은 돌산대교에는 형형색색의 조명이 반짝였고, 그 아래로는 지나가는 차들이 아름다움을 더했다.
또한 항구에 늘어서 있는 상점들은 관광객들을 유혹하며 한가로운 여름밤을 수놓았다.
이나가 넋을 놓고 야경을 구경할 때, 재혁이 말했다.
“예쁘네.”
“네, 정말로요.”
“바다 말고.”
재혁은 그윽한 눈빛으로 이나를 보며 뒷말을 이었다.
“너.”
두근-
이나는 왠지 부끄러운 마음에 그의 시선을 피했다.
그러자 재혁이 이나의 얼굴을 자신 쪽으로 돌렸다.
눈이 마주치자 이나는 심장이 떨어질 것처럼 철렁 내려 앉았다.
두 사람만의 공간.
주변이 너무 조용해 심장 소리가 귓가를 왕왕거리며 울렸다.
그 고요 속에서 재혁이 말했다.
“정이나. 복잡하게 생각하지 말고 나한테 오면 안 되나?”
그의 눈빛은 어느 때보다 진지했다.
“다른 거 생각하지 말고. 그냥 나만봐줘.”
재혁의 간절한 눈빛이 이나를 향해 쏟아졌다.
이나는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한 채로 말을 얼버무렸다.
“저….는.”
그때, 재혁이 이나에게 고백했다.
“사랑해. 정이나.”
“….”
심장이 떨어져 나갈 듯 다시 내려앉고 설렘에 속이 울렁였다.
그의 얼굴이 아주 천천히 그녀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재혁의 입술이 다가올수록 심장은 터질 듯 빠르게 뛰었다.
이나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여수 밤바다 위, 그의 입술이 그녀의 입술을 애틋하게 머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