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4. 사랑의 시작 (24/72)

24. 사랑의 시작

그날 새벽, 이나는 아무런 말도 없이 사라졌다.

재혁과 이나가 다시 만난 것은 한 달의 시간이 흐른 후였다.

그날도 재혁은 동아리방에 앉아 필름 카메라를 이리저리 만지고 있었다.

재혁은 이리저리 카메라를 살피다가 렌즈에 눈을 대고 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때, 동아리장인 정태가 벌컥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는 문을 열자마자 흥분한 듯 격양된 목소리로 소리쳤다.

“자~ 드디어 모셔 왔다! 이번 공모전 모델로 활약해 주실, 연극영화과 정이나 학우!”

정태가 비켜 서자, 재혁의 카메라에 수줍게 서 있는 이나의 모습이 가득 담겼다.

재혁은 믿기지 않는다는 듯 천천히 카메라를 내리고 이나를 바라보았다.

그러던 중 이나와 눈이 마주쳤다.

이나 역시 놀랐는지, 당황하여 재혁을 바라보았다.

시간이 멈춘 듯, 서로를 바라보는 그 찰나의 순간 수많은 감정이 시선을 타고 오갔다.

벌써 세 번째 우연한 만남.

안 좋은 인상만 남겼던 카페에서의 첫 만남과 설렘 가득했던 두 번째 만남. 그리고… 운명처럼 찾아온 세 번째 만남까지.

우연히 만들어 낸 운명의 장난에 재혁이 실소하자, 이나는 그에게 멈추었던 시선을 다급하게 돌렸다.

정태가 이나를 재혁의 앞으로 데려갔다.

“자, 강재혁, 이번에 너의 모델이 되어 주실 분이야. 인사해.”

재혁은 대답 없이 이나를 향해 시선을 던졌다.

그의 침묵과 함께 강렬한 시선이 이어지자 묘한 기류가 흘렀다.

이쯤 되자 정태 역시 뭔가 잘못됐다고 생각했는지, 당황하며 재혁에게 물었다.

“야… 왜 그렇게 무섭게 쳐다봐? 아는 사이야?”

정태의 물음에 재혁은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얼굴은.”

“그래?”

정태는 고개를 돌려 이나를 바라보았다.

이나는 죄인이 된 것처럼 조금 주눅 들어 있었다.

재혁이 일어나 이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강. 재. 혁입니다.”

재혁은 꼭 기억하라는 듯 이름 한 자 한 자를 강조하며 말했다.

이나가 재혁의 손을 잡았다.

이나는 애써 재혁의 눈을 똑바로 보며 대답했다.

“이나예요. 정이나.”

***

재혁이 동아리방을 나와 복도를 걸어갔다.

잠시 후, 뒤따라 나온 이나가 재혁을 불렀다.

“저기요!”

이나의 외침에도 그는 뒤돌아보지 않고 빠르게 멀어졌다.

“강재혁 씨!”

이나가 다시 한번 힘껏 부르자 재혁이 그녀를 돌아보았다.

이나는 성큼성큼 걸어 그에게 다가갔다.

“혼자 가면 어떡해요.”

재혁은 무심하게 시계를 보더니 말했다.

“두 시간 안에 끝냅시다.”

“저기요. 강재혁 씨.”

“고궁 촬영을 해야 하니 12시까지 이동해서.”

“저기요! 원래 그렇게 자기 할 말만 해요?”

“굳이 다른 대화를 할 필요가 있나?”

“….”

“속도 맞추기 불편하니 따로 갑시다. 지금 11시 30분이니까, 경복궁에서 12시에 보면 되겠군요. 그럼 이따 봅시다.

“강재혁 씨…!”

재혁은 더 이상 대화하기 싫다는 듯 돌아섰다.

이나는 다시 그를 부르려다가 말을 삼켰다.

***

궁에는 다양한 꽃들이 봄을 알리듯 만발해 있었다.

담벼락을 뒤덮은 노란 개나리와 수줍은 듯 꽃잎을 오므린 흰색 목련, 그리고 보기만 해도 마음이 설레는 연분홍의 수양벚꽃까지….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가던 재혁은 경회루 호숫가에 핀 수양벚꽃 아래 멈춰 섰다.

“여기서 하도록 하죠. 컨셉은 알고 있습니까?”

재혁이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네. 문화관광부에 제출하는 한국 문화 알리기 맞죠?”

“맞아요. 젊은 층에도 고궁이 매력적인 장소로 보이게 사진을 찍도록 하죠.”

“어떻게 하면 되죠?”

“지금 나랑 데이트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네?”

“남자 친구가 찍어 주는 사진이라고 생각해요. 그런 감정으로, 그런 표정을 지으면 됩니다.”

“….”

별다른 의미 없는 재혁의 말에 이나는 괜히 가슴이 뛰었다.

남자 친구가 찍어 주는 사진이라…. 어떤 포즈로 서야 할까? 표정은?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그녀가 만났던 남자라고는 영인이 다였고, 영인은 사진을 찍어 주는 다정한 남자는 절대 아니었으니까.

그사이 재혁은 멀찍이 떨어져 카메라 앵글을 확인하고 있었다.

그는 못마땅한지 카메라를 내리고 말했다.

“그건 좀 실연당한 사람 같은데.”

“….”

재혁의 말에 그녀는 표정을 환하게 바꾸었다.

호숫가 난간에 몸을 기대고 하늘을 바라보자 재혁이 말했다.

“너무 밝은 척하는 느낌인데요. 릴렉스하죠.”

“….”

차가운 그의 말투가 야속하다고 생각하며 이나는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해 보았다.

남자 친구를 기다리는 여자의 표정은 어떨까? 마냥 기쁘기만 할까? 설렐까? 그 남자는 어떤 남자일까?

찰칵-

셔터 소리에 이나가 재혁을 바라보았다.

어떤 남자면 좋겠냐는 물음의 답안지처럼 재혁이 그녀의 앞에 서 있었다.

울렁이는 설렘이 떨어지는 봄꽃처럼 살랑이며 마음에 스며들었다.

남자 친구가 저런 남자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자 그를 바라보는 이나의 눈빛이 바뀌었다.

마침 그녀의 얼굴을 클로즈업해서 보고 있던 재혁은 그녀의 눈빛을 보고 당황해 버렸다.

이제는 너무 오래되어 기억 속에서 사라진 기억이 그녀의 눈빛을 통해 되살아났다.

언제나 그를 그윽하게 바라보던 엄마의 눈빛.

이나의 눈빛은 그것을 닮아 있었다.

카메라를 살짝 내려 맨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자, 이나는 수줍은 듯 귀 뒤로 머리를 넘기며 먼 곳을 바라보았다.

마침 봄빛을 가득 담은 바람이 불어와 그녀의 머리칼이 공중에 흩날렸다.

어느 순정 만화의 한 장면처럼, 그 순간이 재혁의 마음속에 사진으로 찍혔다.

그가 오히려 넋을 놓고 있자, 이번에는 이나가 그에게 말했다.

“별론가요?”

그 질문에 가출했던 재혁의 정신이 돌아왔다.

그는 짧게 고개를 털고는 자세를 고쳐 잡았다.

“그대로 있어요.”

찰칵-

카메라에 담긴 이나의 모습은 아름다웠다.

푸른 하늘과 흩날리는 수양벚꽃, 한 폭의 그림 같은 풍경 아래 이나가 서 있었다.

두근-

이러면 안 된다는 이성의 외침을 외면한 채, 재혁의 심장은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그는 알 수 없는 이 감정을 애써 무시하며 카메라에 눈을 갖다 댔다.

찰칵-

***

다음 날. 재혁이 동아리방에 도착했을 때 이나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잠시 자료를 정리하며 앉아 있는데, 정태가 동아리방에 나타났다.

그의 뒤에는 처음 보는 여자가 수줍은 표정으로 서 있었다.

“자, 주목. 어제 함께했던 정이나 학우는 개인 사정 때문에 함께하지 못하게 됐어! 그래서 영상 작업은 여기 있는 최아영 학우님과 함께할 거야! 자, 박수!”

“….”

***

공모전이 끝난 것은 그로부터 한 주의 시간이 흐른 뒤였다.

며칠 전부터 뒤풀이에 꼭 참석하라고 정태가 성화를 부려서, 재혁은 할 수 없이 뒤풀이에 참석했다.

뒤풀이 장소는 학교 근처의 작은 술집이었다.

“으아~!! 자자, 수상합시다! 건배!”

“건배!!”

재혁은 상황을 보며 언제 나갈지만 생각하고 있었다.

그때, 한 무리의 사람들이 술집 안으로 들어왔다.

무심하게 소리가 나는 곳으로 시선을 돌리던 재혁은 술집 안으로 들어오는 이나를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시선을 돌리다 재혁을 발견한 이나는 모른 척 시선을 돌렸다.

그들은 재혁의 무리 옆으로 자리를 잡았다.

재혁이 불편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데, 정태가 이나를 발견하고 재혁에게 귓속말했다.

“재혁아. 정이나다, 정이나.”

재혁은 대답 없이 술잔을 채웠다.

이후 묘한 술자리가 이어졌다.

재혁은 이나가 앉은 쪽으로, 이나는 재혁이 앉은 쪽으로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하지만 두 사람의 신경은 온통 서로에게 향해 있었다.

한 교수가 이나의 옆으로 다가왔다.

“정이나라고?”

그는 옆에 앉아 있던 그녀의 동기를 다른 자리로 보내더니, 이나에게 바짝 붙어 앉았다.

여자 선배들이 조심하라고 했던, 평판이 좋지 않은 교수여서 이나는 순간 바짝 긴장했다.

“네. 교수님.”

“뭘 그렇게 긴장하고 그래? 자자, 한잔 받아.”

“네.”

이나가 술잔을 내밀자, 그는 이나의 어깨를 감싸며 술을 따랐다.

“!!”

“평소에 내가 눈여겨봤거든. 연기 좋더라고?”

“가… 감사합니다.”

“잘 알겠지만, 내 동기 중에 김환이라고, 알지? 내면의 열정 찍은 감독. 걔가 괜찮은 애들 없냐고 나한테 그렇게 물어보고 그런다? 우리 이나에게도 기회가 잘~ 돌아가면 좋겠는데 말이야.”

그는 음흉한 눈빛을 보내며 이나를 바짝 끌어당겼다.

예술 분야의 위계 때문인지, 남자 선배들은 그 모습을 보고도 모른 척했다.

이런 경험이 처음이었던 이나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당황하며 몸을 움츠리는 것밖에 없었다.

“그래서 말인데.”

교수는 이나의 허벅지 위에 손을 얹었다. 이나는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주위로 도움을 바라는 눈길을 보내 보았지만, 다들 모른 척했다.

“나랑 말이지… 악!!!”

그 순간, 어느덧 다가온 재혁이 교수의 손을 꺾어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교수님!”

남학생들은 넘어진 교수에게 달려갔고, 여학생들은 꼴좋다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너 뭐야!!”

학생들의 부축을 받은 교수가 일어나며 재혁에게 소리쳤다.

“개만도 못한 놈.”

“뭐?”

재혁은 교수를 향해 욕을 하고는 그를 부축하고 있는 학생들을 보며 똑같이 욕을 내뱉었다.

“가만히 보고 있던 네놈들도 똑같은 놈들이야.”

하고는 이나의 손목을 잡고 술집을 빠져나갔다.

갑자기 일어난 소동에 모두 어안이 벙벙했고, 교수는 창피함에 얼굴이 붉어져서 소리쳤다.

“야 이 새끼야! 너 무슨 학과야!”

밖으로 나가던 재혁은 그를 죽일 듯한 표정으로 노려보며 말했다.

“알 거 없고. 당신 이제 학교 못 나올 거야.”

“뭐?”

재혁과 이나가 나가자, 한 학생이 다가와 그에게 귓속말했다.

“저, 교수님… 쟤, 명성 그룹 손자입니다….”

“!!”

***

술집을 나오니 길에는 행인들로 북적였다.

그에게 붙잡혀 한참을 끌려가던 이나는 그의 손을 뿌리치며 말했다.

“뭐 하는 거야!”

그러자 이나를 향해 휙- 몸을 돌린 재혁이 그녀에게 화를 냈다.

“왜 가만히 있는 거지?! 싫으면 싫다고 왜 말을 못 해!”

“왜 이렇게 오지랖이 넓어요? 대체 왜 끼어드는데?”

“그게 중요한가, 지금?”

“그럼 뭐가 중요한데요? 당신 때문에 얼마나 곤란해졌는지 알기나 해요?”

“곤란해졌다고? 그럼, 네 몸에 손을 대는데, 가만히 있으라는 건가?”

“내 몸에 누가 손을 대든 말든! 무슨 상관인데! 당신이 내 남자 친구라도 돼?! 왜 원치 않는 일에 나서냐고!”

“그림 네 남자 친구 하면 되잖아!”

“뭐라고요?”

“네 남자 친구 하겠다고!”

그의 눈빛이 이나의 마음을 꿰뚫었다.

하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흔들리는 이나의 눈빛을 재혁은 집요하게 바라보았다.

“그때 왜 도망갔는지 묻지 않을 테니까. 이제 그만 도망가.”

“….”

재혁은 아무런 대답 없는 이나를 향해 걸어갔다.

이나는 땅에 뿌리가 박힌 듯 한 발짝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재혁은 너무나 자연스럽게 이나의 볼을 감싼 뒤 입술을 머금었다.

그들의 성급한 사랑은 그렇게 시작됐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