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끌린다는 것
액자 속 환하게 웃고 있는 한 남자의 사진 위로 흰색 연기가 피어올랐다.
재혁의 아버지 강태수의 10주기 제사.
아들의 사진 앞에 바르게 절한 강 회장은 침통하고 무거운 표정으로 일어섰다.
아들의 영정 사진에 절하는 아비의 심정을 누가 알 수 있을까?
그것도 자신을 쏙 빼닮아 후계자로 생각하고 있던 큰아들이라면….
“무심한 놈….”
안타까운 마음에 튀어나온 쓴소리가 주위 분위기를 더욱 무겁게 만들었다.
아들이 떠난 지 10년이 지났지만, 그의 아픔은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다.
먹먹한 마음으로 서 있던 강 회장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문득 재혁이 보고 있다는 생각에 강 회장은 눈가를 훔치며 옆으로 비켜섰다.
자식을 잃은 아비의 마음만큼, 아비를 잃은 자식의 마음도 아플 것이니까.
강 회장이 옆으로 물러서자, 재혁이 아버지의 영정 사진 앞에 섰다.
그는 사진 앞에 담담하게 절을 했다.
강 회장은 어느덧 자신보다 훌쩍 커 버린 손주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아들을 쏙 빼닮아 늠름한 체격에 머리도 좋은 손자.
그를 볼 때마다 불쌍함에 마음이 아리면서도, 듬직하게 자란 손주가 자랑스럽기도 했다.
절을 마치고 일어난 재혁은 다시 한번 아버지의 영정 사진을 바라보았다.
보고 싶다는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할아버지가 슬퍼하실 것 같아 그 말을 마음에 꾹꾹 눌러 담았다.
‘보고 싶네요. 아버지.’
제사가 끝나고, 강 회장의 집 거실에서는 여느 때와 같은 설전이 벌어졌다.
부회장 자리를 노리는 정수가 강회장과 다툼을 벌이고 있었다.
“아버지! 언제까지 죽은 형 뒤꽁무니만 쫓고 계실 건데요!”
“….”
“이제 새롭게 시작해야죠! 저희 명성 그룹, 언제까지 재계 3위에 머물게 하실 겁니까?! 네?!”
“그래서 네놈이 부회장이 되면, 우리가 1위로 치고 올라간다던?”
“그건 아니지만!! 언제까지 형의 부회장 자리를 공석으로 두실 수는 없는 노릇 아닙니까?!”
“됐어! 넌 네 형의 반의반도 못 해! 알아?!”
“….”
“다시는 그딴 소리 꺼내지 마! 넌 상무로 충분해!”
강 회장의 책망에 분노한 정수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는 재혁의 방이 있는 2층을 노려보고는 강 회장에게 협박하듯 말했다.
“만약. 저 두고 재혁이 생각하시는 거면 저 가만히 안 있을 겁니다. 만약 아버지가 돌아가셔도, 절대 안됩니다! 아셨어요?”
“너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는 거야?!”
말을 마친 정수는 그대로 몸을 돌려 강 회장의 집을 나갔다.
둘째 아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강 회장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들이 죽은 해부터 매년 반복되는 일이었다.
그 역시 언젠가 정수에게 후계자 자리를 내줘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강 회장은 안타까운 표정으로 2층 계단을 바라보았다.
계단에 서서 이야기를 듣고 있던 재혁은 방문 뒤로 몸을 숨겼다.
밤 늦은 시간이 되자 재혁은 강 회장 몰래 집을 빠져나왔다.
아버지의 죽음 이후, 작은아버지는 자신을 정치적인 걸림돌로만 보고 있었다.
재혁의 마음 안에 사람에 대한 불신이 생겨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집을 나선 재혁은 ‘블랙 룸’이라는 카페로 향했다.
그가 마음이 답답할 때마다 찾는 곳이었다.
적어도 그곳에서는 자신의 외모나 배경으로 판단받지는 않으니까….
***
“제임스입니다.”
“제니예요.”
제니.
왠지 이름과 잘 어울리는 목소리라고 재혁은 생각했다.
그녀의 말에서 복숭아 향이 느껴지는 듯했다.
“향기가 좋으시네요.”
“감사합니다. 그쪽도 향기가 좋으세요.”
찾아온 침묵이 어색할 만도 했지만, 어쩐지 어색하지 않고 편안했다.
‘그녀는 어떤 모습일까?’
이곳에서 한 번도 해 본 적 없는 생각이었다.
향기 때문에? 아니면 목소리 때문에?
이유는 모르겠다.
확실한 것은, 얼굴도 모르는 여자에게 재혁은 끌리고 있었다.
마음을 먼저 열어 보인 것은 이나였다. 재혁이 내민 음료수를 마신 뒤 이나가 말했다.
“사실, 오늘 여기 안 오려고 했어요.”
“그런데 여기 있으시네요?”
“친구들한테 억지로 끌고 왔어요.”
“이런 곳에 억지로 끌려온 거라면, 혹시 차였습니까?”
“어떻게 아셨어요?”
“대부분 그러더군요.”
“배신당했거든요. 남자 친구가 바람을 피웠어요. 저한테 거짓말까지 하고.”
이나는 자신이 지금 왜 이런 말을 하고 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처음 만나는 남자에게 속에 있는 이야기를 한다니.
잠깐의 침묵 뒤에 재혁이 말했다.
“힘들었겠네요.”
“….”
재혁의 말에 이나는 마음이 뭉클해졌다.
이 얘기를 들은 모든 사람은 모두 영인의 욕을 하기 바빴다.
나쁜 놈이다, 그냥 잊어라, 네가 아깝다 등등.
하지만 그를 욕한다고 이나의 마음이 편해지는 것은 아니었다.
나쁜 사람일지언정 그는 이나가 진심으로 사랑했던 사람이었다.
누군가 그를 욕할 때면, 이나는 그를 사랑했던 모든 시간을 부정당하는 것 같아 더 슬퍼지곤 했다.
“네… 힘들었어요.”
“지금은 어떻습니까?”
“아직도 힘들어요.”
“그렇군요.”
“….”
“처음 만났지만, 제니의 상처가 빨리 낫길 바라죠.”
이나는 그의 목소리에서 어렴풋한 슬픔을 느꼈다.
그녀가 물었다.
“제임스는요?”
“….”
이나의 질문에 그는 잠시 생각하는 듯했다. 그리고 조심히 말을 꺼냈다.
“오늘, 아버지의 기일입니다.”
“아….”
“다 말할 수 없는 사정들이 있지만, 누군가와 대화하고 싶어서 왔습니다.”
“잘됐네요. 저도 사실 대화가 그리웠거든요.”
“….”
이나의 말에 재혁은 예상하지 못한 위로를 받았다.
문득, 달콤한 향기가 났다. 그녀의 입술에서 나는 향기였다.
재혁은 복숭아를 떠올렸다. 그리고 그녀의 붉은 입술을 상상했다.
어둠 속,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그는 알 수 있었다.
따스한 위로를 건넬 줄 아는 이 여자의 입술은 분명 달콤할 거라는 걸.
***
샴푸 향이 났다.
아니면 비누 향일지도 모르겠다.
시원하고 매력적인 냄새였다.
이나의 머릿속에 남자의 거친 피부가 떠올랐다.
손을 뻗어 그의 볼을 만지면 거친 회색의 수염 자국이 따갑게 손을 괴롭힐 것만 같았다.
그때, 그의 손이 이나의 볼을 감싸 쥐었다. 손가락이 길고 부드러운 손이었다.
이나가 깜짝 놀라 어깨를 들썩이자, 재혁이 말했다.
“이런 느낌이군요. 제니는.”
“….”
그의 손끝이 이나의 미간을 지나 오뚝한 그녀의 코를 훑고 아래로 내려갔다.
그의 부드러운 손길이 입술에 닿는 순간, 이나의 등 뒤로 짜릿한 전기가 흘렀다.
이나 역시 손을 뻗어 그의 얼굴을 만졌다. 생각보다 피부가 부드러웠다. 높게 솟은 콧날이 먼저 만져졌다. 이나는 조심스럽게 그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어느덧 이나의 손은 콧날을 지나 그의 입술에 닿았다.
부드럽지만 강인한 인상을 주는 입술이었다.
손끝에 느껴지는 그의 입술 주름 하나하나가 그녀의 관능을 자극했다.
“쓰읍-”
재혁이 숨을 들이마시자, 그의 입술 사이로 이나의 손가락이 빨려 들어갔다.
손끝 반 마디가 그의 이빨과 혀 사이에 닿았다.
이성적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본능적인 끌림이 서로를 강렬하게 잡아당기고 있었다.
그 거부할 수 없는 끌림에 서로의 입술이 닿았다.
살짝 닿는 것만으로도 온몸이 간질거리고 하늘로 몸이 붕 뜨는 것 같았다.
재혁의 손이 이나의 두 볼을 감싸 쥐었다.
끝없는 키스의 진공 상태 속에, 어느덧 1시간이 지났음을 알리는 벨 소리가 났다.
그 소리에 재혁의 입술이 그녀의 입에서 살짝 떨어졌다.
두 사람은 떨어지기 싫다는 듯 이마를 맞대고 있었다.
재혁이 말했다.
“오늘… 나랑 있을래요?”
얼굴조차 알지 못했지만 상관없었다. 서로를 향한 끌림은 애초에 외모 때문이 아니었으니까.
이나가 수줍게 대답했다.
“알았어요.”
“나가서 오른쪽 골목에서 기다릴게요.”
“혹시….”
이나의 말을 알아채고 재혁이 웃으며 말했다.
“얼굴 보고 도망가지 말라구요?”
“네.”
“걱정말아요. 맹세해요.”
“….”
재혁이 몸을 일으켰다.
어둠 속에서 그의 몸이 멀어졌다.
‘어떤 사람일까?’
그녀의 마음은 설렘으로 뛰고 있었다.
***
이나는 부푼 기대를 안고 재혁이 기다리는 골목으로 향했다.
건물을 돌자, 어둠 속에 키가 큰 남자가 서 있었다.
“제임스?”
이나의 목소리에 벽에 몸을 기대고 있던 남자가 몸을 일으켰다.
“제니?”
“저예요.”
가로등 불빛 두 사람은 드디어 서로의 얼굴을 확인했다.
두 사람은 기대감에 부풀어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제임스는 그녀가 기대했던 것보다 잘생긴 남자였다.
하지만 제임스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내 얼굴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일까? 그리고 그녀의 표정 역시 경악으로 물들었다.
두 사람의 입에서 동시에 말이 튀어나왔다.
“그 싸가지?!” , “그 싸가지?!”
뜨겁게 달아오른 마음에 찬물이 뿌려졌다.
우연도 이런 우연히 있다니,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
이나는 놀란 중에도 그날 자신이 했던 잘못이 생각나 그에게 먼저 사과했다.
“그때는 미안했어요.”
조심스러운 이나의 말에 차가운 대답이 돌아왔다.
“그렇군요.”
“지갑은 잘 받았어요.”
“돌아오지 않아서 보냈습니다.”
“미안해요. 그날은,”
“더 설명할 필요 없어요. 내 착각이었습니다.”
“착각?”
“조금 전, 내가 그쪽과 비슷하다고 느낀 거.”
“….”
“아까 말한 건 없던 일로 합시다.”
어느덧 재혁의 눈빛은 처음 봤었던 그때처럼 차갑워져 있었다.
이나가 대꾸할 사이도 없이 그는 그녀에게서 돌아섰다.
그의 뒷모습에 이나는 울컥하는 마음이 올라왔다.
그날의 행동으로 날 다 안다고 할 수 있나?
그에게 매달리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었다. 하지만 억울했다. 자신에 대해 함부로 말하는 그가 미웠다.
이나가 그를 향해 소리쳤다.
“잘나셨네요. 저도 그쪽처럼 사람 쉽게 판단하는 사람은 싫어요!”
그녀의 외침에도 재혁은 한 걸음씩 착실하게 그녀로부터 멀어졌다.
“그날, 그놈이 떠났다고! 그때 내가 어떤 기분이었는데…! 그쪽에게 조금 무례하게 대했다고 이런 취급받을 이유는 없다구요!”
멈칫-
그녀의 말이 재혁의 발길을 붙잡았다.
그는 고개를 돌려 이나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이나의 두 눈에 맺힌 눈물을 보며, 재혁은 아까 그녀와 나눈 대화를 떠올렸다.
‘배신당했거든요. 남자한테.’
‘바람을 피웠어요. 저한테 거짓말까지 하고.’
‘힘들었겠군요.’
그녀의 말에 그는 진심으로 공감했다. 그런데 지금은?
자신이 가지고 있던 선입견이 그녀에 대한 생각을 일순간에 바꾸어 놓았다.
그녀는 어둠 속에서 그의 심장을 뛰게 했던 그 모습 그대로일 것이다.
마주치는 시선에 복잡한 감정들이 오고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