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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그를 처음 만난 날 (22/72)

22. 그를 처음 만난 날

재혁의 입술이 덮쳐 오자 이나는 본능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재혁은 그녀를 강렬한 눈빛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왜 날 거부하는 거지?”

이나는 그에 벗어나려 했다. 하지만 허리를 두른 재혁의 팔은 그녀를 놓아주지 않았다.

재혁이 물었다.

“왜 망설이는거지?”

“놔요 이거.”

벗어나려 하면 할수록 더욱 깊게 파고드는 올가미처럼 몸부림칠수록 그의 품에 더욱 깊게 파묻혔다.

“늦었어. 거부하려면 아까 했어야지.”

말과 동시에 재혁의 입술이 그녀의 입술을 덮었다.

그를 밀어내던 이나의 손과 발은 저돌적인 키스에 힘을 잃었다.

뜨겁게 달아오른 그의 성난 몸을 그녀는 감당할 수 없었다.

입 안으로 재혁의 혀가 거칠게  파고들었다.

정신을 차릴 틈도 없이 이나는 재혁의 몸에 짓눌린 채로 소파 위에 누워 있었다.

당황과 그를 향한 욕구가 이리저리 섞여 이나의 머리를 어지럽게 하고 있었다.

옷 속으로 파고드는 재혁의 손길이 느껴졌다.

이대로 모든 것을 놓아 버릴 것 같은 그때, 재혁의 움직임이 갑자기 멈췄다.

속사포처럼 쏟아지던 키스도, 그녀의 몸을 탐하던 손길도 모든 것이 일순간에 멈췄다.

어둠 속에 고요가 찾아왔다.

모든 행위를 멈춘 재혁은 지그시 이나를 바라보았다.

지독한 욕망을 한 줄기 이성이 간신히 막고 있는 듯한 눈빛이었다. 

그때,

톡-

이나의 가슴 위 첫 번째 단추가 풀어졌다.

살짝 벌어진 셔츠 사이로 이나의 하얀 속살이 드러났다.

머릿속에 찌릿한 전기가 귀를 타고 등 뒤로 흘렀다.

숨죽이는 사이 모든 단추가 풀어졌다.

창으로 흩뿌린 듯 들어오는 달빛 아래 이나의 나신이 보였다.

성나 있던 그의 몸이 더욱 달아올랐다.

그는 얼굴을 이나의 가슴에 파묻었다.

그의 축축한 숨결을 느끼며 정신을 못차리는 동안, 그는 이나에게 들어올 준비를 마쳤다.

물밀듯 재혁이 이나의 안으로 파고들자 이나의 입에서는 쾌락의 신음 소리가 흘러나왔다.

“흡….”

밀려오는 쾌락과 함께 이나의 머릿속에 6년 전의 기억이 물감 번지듯 퍼져 갔다.

***

6년 전.

“헤어지자.”

갑자기 튀어나온 영인의 말에 이나는 어리둥절해서 물었다.

“어?”

그런 이나를 보며 영인은 쐐기를 박듯이 조금 전 말을 다시 한번 반복했다.

“헤어지자고.”

“갑자기 왜?”

“….”

“거짓말이지?”

“진심이야, 이나야.”

“그게 무슨 말이야?”

“갑자기도 아니고 거짓말도 아니야. 오래전부터 생각했던 거야.”

“이유가 뭔데?!”

영인은 답답한 듯 한숨을 푹 내쉬었다.

“취업 준비를 해야 할 거 같아.”

“그거랑 헤어지는 거랑 무슨 상관인데?”

“연애하면서 너무 많은 시간이 들어, 돈도 마찬가지고. 남들은 목숨 걸고 취업 준비하는데, 이렇게 해서 취업이 되겠어?”

“시간이 없으면 조금 덜 만나면 되잖아…. 돈은 내가,”

“아버지가 암이셔.”

말없이 고개를 숙이는 영인의 모습에 이나는 뒷말을 삼켰다.

“남들처럼 그냥 세월 좋게 놀 수가 없어…. 나는 사랑보다 가족이 더 중요해.”

스물두 살. 아직은 어린 나이지만 그의 말이 지닌 의미를 모를 리 없었다.

이나의 눈에 눈물이 차올랐다. 

죽어도 안된다는 말이 목에 걸려 나오지 않았다. 그 대신 울음 섞인 대답이 흘러나왔다.

“알았어.”

“미안해.”

“대신… 기다리는 건 하게 해 줘.”

“이나야….”

“그 정도는… 할 수 있어야 오빠를 보내 줄 수 있을 거 같아.”

이나의 말끝이 흐려졌다.

영인은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고마워.”

“다른 사람 만나도 돼. 진심이야.”

영인은 이나를 보며 애써 웃었다.

그 미소에, 억지로 가둬 놓은 이나의 눈물이 흘러내렸다.

이나는 당황하며 고개를 숙였다.

자신의 눈물이 영인에게 짐이 되는 것을 원치 않았으니까.

“오빠… 먼저 가.”

“그래 먼저갈게. 미안.”

고민 없이 일어선 영인이 이나는 야속했다.

“갈게.”

그는 짧은 한마디만을 남겨 두고 이나의 곁을 떠났다.

그는 이나가 처음 만난 남자였다.

처음 마음을 주었고, 처음 몸을 허락했다. 그런데 이별이라니….

“끅… 끅….”

터져 나오는 울음을 억누르는 이나의 눈에 창밖으로 카페를 나서는 영인의 뒷모습이 보였다.

멀어지는 뒷모습에 참고 있던 이나의 슬픔이 터져 나왔다.

“오빠… 영인 오빠!”

이나는 안되는 줄 알면서 그를 향해 달려갔다.

마지막으로 딱 한 번만 안아보고 싶었다.

정신없이 달려가던 이나는 카운터를 돌아 나오던 남자와 부딪쳤다.

충격에 남자가 들고 있던 커피가 쏟아져 옷을 더럽혔다.

“죄송합니다. 금방 돌아올게요. 죄송합니다.”

이나는 울멱이며 카페를 뛰어나갔다.

그때, 남자가 이나의 손목을 잡아당겼다.

강렬한 눈빛의 남자.

그 시절 재혁이었다.

그는 화가 난 듯 이나를 노려보며 말했다.

“사과하려면 제대로 해야 하는 거 아닌가?”

“죄송해요. 이거 좀 놔주세요. 금방 올게요.”

“그쪽이 바쁜 걸 내가 이해해 줘야 할 필요는 없는 것 같은데?”

눈빛처럼 재혁은 톡 쏘는 말투로 말했다.

이나의 시선이 다급하게 입구로 향했다. 

그녀의 머릿속은 온통 영인을 놓치면 안 된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녀는 가방에서 지갑을 꺼내 그의 품에 던지듯 넘겨주었다.

“다시 돌아올 테니까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정말 죄송해요.”

그의 팔에서 벗어난 이나는 급하게 영인을 향해 달려갔다.

카페를 나온 이나는 영인이 사라진 방향으로 미친 듯이 달렸다.

남자와 잠깐의 실랑이를 벌이는 사이 영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안 돼…. 이렇게 보낼 수는 없어.”

영인을 부르며 도로 쪽으로 뛰어나가는데, 대로변에 서 있는 영인의 모습이 보였다.

“오빠….”

그때, 영인의 앞에 날렵한 스포츠카 한 대가 멈춰 섰다.

영인은 스포츠카에 올라탔다.

열려있는 창문으로 영인이 운전석에 앉은 여자와 키스하는 모습이 보였다.

충격에 이나는 우두커니 서서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영인을 태운 스포츠카가 떠나고 나서도 그녀는 차마 발걸음을 떼지 못했다.

조금 전 두 눈으로 본 그 모습이 믿기지 않았다.

조금 전까지 세차게 흐르던 눈물은 어느덧 말라 있었다.

“뭔가 오해가 있을 거야…. 영인 오빠는 그럴 사람이 아니야.”

이나는 다급하게 휴대 전화를 꺼내 영인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화를 받을 수 없어….”

이나의 눈에 아까와는 다른 의미의 눈물이 흘러내렸다.

“전화 좀 받아, 오빠.”

그날, 영인은 끝내 전화를 받지 않았다.

***

배신이 남기고 간 상처는 쉽게 잊히지 않았다.

그날 이후 영인과는 아무런 연락도 닿지 않았다.

혹시나 하는 기대는 더 큰 상처가 되어 그녀를 아프게 했다.

학교도 빠진 채 집에만 처박혀 지내기를 며칠. 우편으로 그녀의 지갑이 배송되었다.

“아.”

지갑을 보자 그날 있었던 일이 떠올랐다.

거친 눈빛의 남자였다. 유독 찡그린 표정과 거친 말투가 선명하게 떠올랐다.

안을 살펴보니 쪽지 하나가 들어 있었다.

[세탁비 오천원 가져갑니다.]

지갑 안에 들어 있던 만 원짜리 지폐 한 장이 오천 원짜리로 바뀌어 있었다.

평소였으면 미안하다는 생각을 가졌겠지만, 그녀에게 그만한 심리적인 여유가 남아 있지 않았다.

이나는 귀찮은 듯 지갑을 던져두었고 남자에 대한 기억은 서서히 잊혀갔다.

그렇게 며칠 후, 이나는 친구들의 손에 이끌려 어디론가 향하는 중이었다.

친구들은 목적지도 알려 주지 않은 채 이나를 무작정 끌고 나갔다.

도착한 곳은 ‘블랙 룸’이라는 이름의 카페였다.

“여기 뭐 하는 데야?”

이나의 질문에 친구 한 명이 대답했다.

“밀실 카페.”

“밀실 카페?”

“그래. 불빛이 하나도 없는 밀실에서 남자랑 단둘이 대화하는 곳이야.”

“단둘이?”

“응, 보이지도 않고 서로 만지지도 않고, 그냥 목소리랑 느낌만으로 상대랑 대화하는 거지.”

“….”

“너 아까 한 말 기억하지? 오늘은 우리가 하자는 대로 하기로 한 거!”

“응….”

“무조건 해. 딱 한 시간이니까. 가서 있다 와.”

“한 시간 동안 모르는 남자랑 무슨 얘기를 해….”

“그건 네가 알아서 할 일이고! 우리도 각자 다른 방에 들어가 있을 거니까. 알아서 해. 가자.”

“야 미혜야!”

친구들은 이나만 두고 각자의 방으로 흩어졌다. 내키지 않았지만 혼자 돌아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이나는 하는 수 없이 카페직원의 안내에 따라 컴컴한 방으로 들어갔다.

직원은 이나를 테이블 안쪽에 앉힌 후 방 밖으로 나갔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 어둠 속에 앉아 있자, 자그마한 공포가 그녀의 마음에 슬며시 고개를 치켜들었다.

‘나갈까?’ 고민하고 있을 때, 문 쪽에서 누군가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곧이어 누군가 앞자리에 앉았다.

“규칙을 알려 드리겠습니다. 서로 터치하시면 안 되시구요, 서로를 부를 때는 가명을 사용하시면 되겠습니다. 그럼 즐거운 시간 보내세요.”

‘뭐야…. 그냥 저렇게 나가는 거야?’

생소한 방식에 이나가 조금 당황할 때, 앞쪽에서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렸다.

“제임스입니다.”

낮고 굵은, 동굴에서 울리는 것 같은 목소리였다.

어둠 속에서 듣는 낯선 남자의 목소리는 어딘가 묘한 기분을 불러일으켰다.

뭔가 현실 감각이 떨어져 멍하니 있던 이나는 대답을 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급하게 말했다.

“제니…예요.”

“반가워요. 제니 씨.”

“네… 저두요.”

잠시 말이 끊어지자 이나는 어색함에 앞에 놓인 아이스티잔을 만지작 거렸다.

컵 표면에 맺힌 물방울이 시원해 긴장을 조금 풀어주었다.

문득 시원한 향기가 느껴졌다.

남자의 향수 냄새인 것 같았다.

참 섹시한 향기라고 이나가 생각하고 있을 때, 앞에 앉은 남자가 말했다.

“무슨 향수 쓰시죠?”

“짜넬이요.”

“향기가 참 좋네요.”

“감사합니다. 그쪽도 향기가 좋으세요.”

서로 향기가 좋다고 칭찬하는 것이 어딘가 우스우면서도 신기한 경험이었다.

‘나쁘지 않은 거 같아….’

얼음이 유리컵에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그가 음료를 마시는 모양이었다.

이나도 앞에 놓인 음료로 손을 뻗었다.

하지만 보이지 않는 탓에 컵을 엎지르고 말았다.

“앗!”

컵이 쓰러지자, 이나는 본능적으로 손을 뻗었다.

그때, 남자와 손이 닿았다.

남자도 손을 뻗은 모양이었다.

깜짝 놀란 이나가 급하게 손을 거두자 남자가 민망한 듯 말했다.

“컵을 치우려고 했습니다.”

“저두요.”

“완전히 엎어졌나요?”

“네 그런 거 같아요.”

“괜찮으시면 제꺼 좀 드릴까요?”

이나는 잠시 망설였다.

그가 다시 말했다.

“저는 빨대로만 먹었습니다. 제니는 컵에 입을 대고 마셔요.”

“네, 알겠어요.”

테이블 위로 그가 컵을 미는 소리가 났다.

이나가 손을 뻗는데, 그가 이나의 손을 덥석 잡더니 컵을 손에 쥐여주었다.

“자요.”

보이지 않는 밀실.

묘한 설렘이 이나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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