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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키스할거야 눈 감아. (21/72)

21. 키스할거야 눈 감아.

재혁의 얼굴이 가까이 다가오는 순간, 이나가 고개를 비켜 돌렸다.

“대신, 마음을 원하지 않겠다고 맹세해요.”

“….”

“그럼 줄게요. 당신이 그토록 원하는 내 몸.”

재혁은 곧은 시선으로 이나를 바라보았다.

그 시선을 받으며 이나는 생각했다.

그에게 끌리는 이 감정을 사랑이라고 부르지 말자.

사랑이 아니라 계약이라고 부르자.

심장을 뒤흔드는 나지막한 소리가 들렸다.

“그러지.”

“….”

지독한 적막이 두 사람 사이에 맴돌았다.

이상했다.

분명 몸을 나누자 약속했는데, 이나는 몸이 아닌 마음이 들끓고 있었다.

재혁의 눈에 긴장한 이나의 모습이 보였다.

깜박이는 눈꺼풀이 보였고, 붉게 상기된 볼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긴장한 듯 움찔거리는 입술과 침을 삼키는 목의 움직임도 보였다.

모든 것이 허락된 이 순간.

그녀를 잡고 있던 손이, 당장이라도 그녀를 유린하려는 듯 강하게 그녀를 잡아당겼다.

이나는 두 눈을 감으며 그에게 몸을 맡겼다.

이나의 몸이 재혁의 품 안에 포근하게 들어갔다.

그러나 재혁은 그저 이나를 안을 뿐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

이나의 등 뒤에서 재혁은 낮게 읊조렸다.

“아까 말했잖아. 근무 시간이라고.”

“….”

“혹시 더한 걸 기대한 건 아니겠지?”

그는 고개를 내려 품 안에 안겨 있는 이나를 지그시 바라보며 말했다. 그러고는 그녀의 볼에 가볍게 키스했다.

재혁이 그녀를 놓아주자, 이나가 그에게서 한발 뒤로 물러났다.

“갑시다.”

재혁은 그녀를 귀엽다는 듯 바라보고는 돌아섰다.

예상하지 못한 재혁의 행동에 이나는 묘한 감정에 사로잡혔다.

재혁에게 놀림받은 것 같아 화가 났지만, 그보다 더한 아쉬움이 마음을 뒤흔들고 있었다.

“안 갑니까?”

승리감에 도취된 듯한 묘한 그의 표정이 얄미워 보였다.

이나는 대답 없이 재혁의 곁을 지나쳐 나갔다. 

그런 이나를 바라보는 재혁의 얼굴에 옅은 미소가 머물렀다.

***

“아, 대표님! 다 둘러보셨습니까?!”

재혁과 이나가 객실 밖으로 나오자,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지배인 다가왔다.

“좋네요.”

“다행입니다. 부대표님께서 도착하셨다는 연락이 왔습니다.”

“부대표?”

“네, 대표님께 인사드린다고 하셨습니다.”

강 회장에게 기타 인사 발령에 관한 얘기를 듣지 못한 터라 재혁은 부대표가 누구인지 알지 못했다.

“그렇군요. 그럼 대표실로 올라오라고 하세요.”

“네, 알겠습니다.”

말을 마친 재혁은 앞장서서 복도를 걸어갔다. 1층으로 내려와 다른 직원들이 흩어졌다.

재혁과 이나는 전용 엘리베이터에 올라 대표실로 향했다.

엘리베이터에서 재혁이 말했다.

“비서실 인원 충원해요. 혼자서 다 할 수는 없을 테니까.”

“네.”

“혹시 오해할 것 같아서 하는 말인데, 내 개인 업무는 오직 정이나 씨만 하는 겁니다.”

“….”

“대답 안 합니까?”

“알겠습니다.”

띵-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마자 재혁은 대표실로 들어갔다.

이나는 로비 카운터에 마련된 그녀의 자리에 앉았다.

자리에 앉자 드디어 본업을 찾은 기분이었다.

책상 위에는 강 회장 비서실에서 보내 준 이번 달의 일정표와 기본적인 비서 지침이 놓여 있었다.

비서 지침 첫 장에는 개인 비서 주의 사항이 적혀 있었다.

“상사와의 개인적인 감정 교류는 지양한다…?”

첫 장에 버젓이 쓰여있는 말에 이나는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선이고 나발이고 다 집어치우고 돌격하는 자신의 상사 때문에 지금 정신이 없는 와중이니까.

그녀는 비서지침과, 관련된 업무를 익히느라 정신이 오전을 보냈다.

몇 시간이 흘러 이제 곧 점심시간이 다가올 때, 복도 끝에서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사람은 여자인 듯, 간결한 하이힐 소리가 복도를 타고 들려왔다.

부대표의 방문에 대해 들은 터라 이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를 맞았다.

“안녕하십니까. 부대표님.”

복도에서 나타난 사람은 유리였다.

 유리는 신기하다는 듯 선글라스를 슬쩍 내려 이나를 바라보았다.

“자기구나? 안 좋은 소문 때문에 쫓겨났다는 그, 비서.”

유리는 대뜸 이나를 알고 있다는 듯 말했다.

“….”

유리의 도발에도 이나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고 고개를 숙였다.

속이 쓰렸지만, 첫날부터 부대표와 부딪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사이 유리가 이나의 눈앞까지 다가왔다.

그녀는 이나의 이름표를 보며 말했다.

“정이나씨. 비서 일만 해요. 무슨 말인지 알아들어요?”

“….”

계속되는 도발에 이나는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그 모습이 반항처럼 보였는지 유리가 미간을 좁혔다.

감히 비서 따위가? 라는 표정이었다.

유리가 이나에게 한마디 하려는 그때, 안쪽에서 문이 열리며 재혁이 나왔다.

“….”

재혁을 보자 유리는 재밌다는 듯 웃으며 인사했다.

“오랜만이네 재혁오빠?”

재혁은 꽤나 놀란 듯 잔뜩 미간을 좁힌 채로 말했다.

“여긴 어쩐일이야?”

“부대표 미팅하기로 하지 않았어?”

“그거랑 너랑 무슨 상관… 설마?”

“맞아. 내가 그 부대표야.”

“….”

“들어가. 나 다리 아파. 그리고 너, 앞으로 그런 건방진 눈빛은 용납 안 해.”

유리는 이나에게 쏘아붙이고는 재혁을 지나쳐 방 안으로 들어갔다.

재혁이 인상을 구긴 채로 서 있을 때, 이나가 말했다.

“다과 준비하겠습니다.”

재혁은 탕비실로 사라진 이나를 뒤로하고 대표실 안으로 들어갔다.

유리는 대표실 가운데 마련된 소파에 다리를 꼬고 앉아 있었다.

재혁이 그녀의 맞은편에 앉자, 이나는 꼬았던 다리를 풀며 선글라스를 벗어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재혁은 다소 화가 난 목소리로 그녀에게 말했다.

“지금 이 상황은 뭐지?”

“뭐긴. TS조선이 썬라이즈 최대 투자자인 거 몰랐어?”

“….”

“오빠야말로 무슨 바람이 불어서 이러는 거야? 현준 씨한테 자리 주기가 아까웠나 보지?”

유리의 말에 재혁은 한 방 먹었다는 듯 말했다.

“예상 못 했군.”

“왜? 내가 부대표라니까 그만두고 싶어졌어?”

“아니, 널 물러나게 해야겠다고 생각 중이야.”

“못 해.”

“해.”

“그럼 오빠도 오너 자리 물러나야 할 거야. 최대 투자자를 잃어버리게 될 테니까.”

“….”

한참 재혁을 노려보던 유리가 대뜸 손을 내밀었다.

“기왕 온 김에 잘해 보자.”

재혁은 유리를 노려보기만 할 뿐, 손을 내밀지 않았다.

“공사 구분 정도는 하지? 오빠가 대표되기 전부터 내가 부대표였거든?”

그녀의 말이 맞았다.

오히려 자신이 굴러들어 온 돌이었다.

재혁은 하는 수 없이 유리가 내민 손을 잡았다.

그의 손을 잡은 채로 유리는 재밌다는 듯 말했다.

“정말 기가 막힌 인연이네. 연인에서 사촌 동생의 배우자, 이번에는 사업 파트너.”

“인사했으면 나가 봐.”

“아, 회장님이 나한테 오빠 당부하셨어. 회장님이 저 여자 때문에 걱정이신 모양이던데?”

유리가 문밖을 가리키며 말하자, 재혁의 표정이 굳어졌다.

“오빠가 저 여자 데려왔다며? 괜히 일 만들지 마, 이미지 안 좋아져.”

유리의 떠보는 듯한 말에 안 그래도 안 좋았던 재혁의 표정이 더욱 험악해졌다.

“맞아, 내가 데려온 거.”

“진심이야?”

“그래, 내가 저 여자 좋아하거든.”

“….”

“경고하는데, 일 이외에 나에 대한 어떤 관심도 보이지 마. TS조선이랑 명성 그룹이 갈라서는 꼴 보고 싶지 않으면.”

“그때 내가 했던 말 기억하지? 나 결혼 전에 누구도 만나지 않겠다고한거.”

“내가 했던 말은 기억 못 하나 보지? 네 말 들어줄 생각 전혀 없어.”

두 사람이 서로를 노려볼 때, 긴장을 깨는 노크 소리가 들렸다.

재혁은 여전히 유리를 노려보며 말했다.

“들어와요.”

이나가 다과를 들고 안으로 들어왔다.

다가온 이나가 두 사람 앞에 홍차를 내려놓을 때, 유리가 말했다.

“이봐.”

“네, 부대표님.”

유리는 재혁을 노려보며 앞에 놓인 홍차를 쟁반 위에 부어 버렸다. 

“엄맛!”

놀란 이나가 쟁반을 놓치자, 뜨거운 홍차가 바닥을 흥건하게 적셨다.

그 모습을 본 재혁이 유리를 향해 소리쳤다.

“무슨 짓이야!”

유리는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나 재혁을 보던 시선을 이나에게 돌리며 말했다.

“나 홍차 싫어하니까, 다음부터 다른 거 내와. 알았어?”

유리는 재혁을 한 번 쏘아보고는 그대로 대표실을 나갔다.

“괜찮나? 어디 다친 데 없어?”

“괜찮습니다. 닦을 거 좀 가져 올게요.”

***

유리가 돌아간 후, 첫날은 정신없이 지나갔다.

쏟아지는 업무 전화를 처리하며 스케줄을 정리하다 보니 어느덧 퇴근 시간이 되었다.

6시가 되자마자 재혁이 방에서 나왔다.

“퇴근합시다.”

재혁이 나오자 이나는 시계를 바라보았다.

퇴근 시간이 되었다는 것을 몰랐는지 이나가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의 표정을 본 재혁이 물었다.

“일이 남았습니까?”

“네, 첫날이라 정리가 늦었네요.”

재혁이 손목의 시계를 확인하자, 이나는 재빠르게 보고 있던 서류를 덮었다.

“정리하겠습니다.”

그러자 재혁이 말했다.

“기다릴 테니까 마저 해요.”

“아닙니다.”

“괜찮으니까 마저 해요. 나도 일이 좀 남았으니까.”

이나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재혁이 다시 방으로 들어갔다.

이나는 재빠르게 재혁의 뒤를 따라 들어갔다.

“저, 대표님. 지금 퇴근하시죠.”

“괜찮다니까.”

“비서의 가장 큰 역할이 대표님의 스케줄 관리입니다. 제 일 때문에 퇴근이 늦어지시는 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재혁이 골똘히 생각하더니 이나에게 물었다.

“그 말도 일리 있군요. 그럼 일은?”

“집에 가서 마무리하겠습니다.”

“집에 가면 일할 시간이 없을 텐데.”

“네?”

“아닙니다. 갑시다.”

재혁이 다시 대표실을 나갔다.

그의 뒷모습을 보며 이나는 의아한 듯 고개를 저었다.

“집에 가면 일 할 시간이 없을 거라고? 그게 무슨 말이지?”

***

차에서 내리는 이나의 양손에는 서류가 한가득 들려 있었다.

기사가 차를 몰고 떠나자마자 재혁이 그녀의 서류를 빼앗았다.

“내가 들어주죠.”

괜찮다고 말하기도 전에 그는 이미 엘리베이터 쪽으로 성큼 걸어가고 있었다.

이나는 하는 수없이 그의 뒤를 쫓았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두 사람은 서로의 집을 등진 채로 마주 섰다.

“그럼 오늘도 수고 많으셨습니다.”

이나는 깍듯 인사하며 손을 내밀었다.

재혁이 그녀가 내민 손에 들고 있던 서류더미를 올려놓았다.

이나는 서류를 받자마자 미련 없이 돌아섰다.

현관문 비밀번호를 누르는 동안 등 뒤로 재혁의 눈빛이 느껴졌다.

‘빨리 들어가자.’

아까부터 느껴지는 왠지 모를 불안감에 이나는 서둘러 집 안으로 들어갔다.

그녀가 안으로 들어간 후, 문을 당기는데, 문틈 사이로 불쑥 재혁의 발이 나타났다.

그리고 재혁이 불쑥 이나의 집 안으로 들어왔다.

“무슨 짓이세요?”

“아까 말한 거 잊었습니까?”

“무슨 말이요?”

“낮에 할 일이 아니라고 했지, 안 한다고는 안 했어.”

“?!”

말과 동시에 등 뒤로 문이 닫혔다.

“기회는 지나갔어요.”

이나의 말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재혁이 이나에게 다가왔다.

뒷걸음질 치던 이나의 손에서 서류들이 바닥으로 떨어져 흩어졌다.

곧이어 이나의 허리 뒤로 돌아온 재혁의 손이 그녀를 잡아당겼다.

주황색 현관 불빛 아래, 두 사람은 몸을 맞댄 채로 서 있었다.

재혁이 말했다.

“키스할 거야. 눈 감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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