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마음이 안 된다면
부회장실로 향하는 현준의 발걸음은 그 어느 때보다 신경질적이었다.
부회장실에 도착한 그는 비서들의 허락도 받지 않고 벌컥 문을 열었다.
“아빠!”
문을 열자마자 느닷없이 유리컵이 그를 향해 날아들었다.
쨍그랑!
현준은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비틀어 유리잔을 피했다.
“힉! 이걸 던지면 어떡해! 죽을 뻔했네!”
현준의 눈에 기다란 부회장 명패를 집어드는 아버지 정수의 모습이 보였다.
생명의 위협을 느낀 현준은 그대로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었다.
“아부지! 아부지. 죄송해요! 잘못했어요.”
현준이 두 손으로 싹싹 빌자, 정수가 들고 있던 명패를 내려놓았다.
정수는 흐트러진 옷을 잡아당겨 정리하고는 현준을 노려보았다.
아버지의 살기 넘치는 눈빛에 현준은 고개를 숙였다.
“회장님께 뭐라고 한 거야.”
“벼… 별말 안 했어. 그냥 재혁이 형이 소문이 안 좋다고.”
“네가 일러바쳤어?”
“일러바쳤다기보단….”
“이 한심한 새끼!”
결국 정수의 손을 떠난 부회장 명패는 그대로 찬장으로 날아가 박혔다.
“힉!”
씩씩대며 숨을 몰아쉬는 정수의 눈에 명패에 새겨진 부회장이란 글자가 들어왔다.
저 ‘부’라는 글자를 떼고 ‘회장’이 되기 위해 그동안 얼마나 노력해 왔는가.
하지만 아버지의 머릿속에는 아직도 죽은 형밖에 없는 것 같았다.
현준으로 내정되어 있던 썬라이즈의 오너 자리를 재혁으로 바꾼 사건은 정수의 입지를 크게 흔들고 있었다.
문득 그의 머릿속에서 자신을 내려다보는 교만한 형의 얼굴에 그의 아들 재혁의 얼굴이 겹쳐 보였다.
건방지고 교만한 놈.
정수의 눈치를 보던 현준은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아빠. 그래도 강재혁이 오너 하는 건 아니잖아. TS조선에서 투자 끌어온 게 누군데.”
“입 다물어. 물어뜯을 거면 더 독하게 물어뜯었어야지. 어설프게 물어뜯으니까 반격당하는 거 아니야.”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유리까지 거기에 보낸 마당에 오너 자리를 손바닥 뒤집듯이 뒤집어 버리는 건….”
정수가 다시 노려보자, 현준은 다급하게 시선을 피했다.
분을 못 이겨 씩씩대던 정수는 깊은숨을 한 번 몰아 쉬며 감정을 다스렸다.
“가서 좀 기다려. 내가 회장님과 얘기해 볼 테니까.”
“….”
“더 이상 사고 치지 마! 두 번 말 안 한다.”
“알았어. 걱정하지 마.”
“뭐 해! 안 나가고!”
정수의 불호령에, 현준은 부리나케 일어나 부회장실을 나갔다.
부회장실을 나오자마자 현준은 욕을 내뱉었다.
“괜히 XX이야.”
문득 현준의 머릿속에, 썬라이즈 복도에서 재혁에게 소리치던 유리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상관없어. 내가 결혼하기 전에 오빠가 누구를 만난다면, 년이든 놈이든 무슨 수를 써서라도 헤어지게 만들 거야.’
쥐새끼처럼 복도 뒤에 숨어서 대화를 엿듣던 때가 떠오르자 현준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엿 같네.”
그는 다시 한번 욕을 내뱉으며 차에 올랐다.
그리고 기분을 풀기 위해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
8시 30분, 해운대 아파트 입구에는 검은색 벤츠 한 대가 대기 중이었다.
재혁을 뒤따라 나온 이나는 뒷좌석과 앞좌석을 두고 갈등에 빠졌다.
‘어디에 앉는 것이 더 비서처럼 보일까?’
“뭐 합니까. 안 타고.”
이나는 열려 있는 뒷문을 가볍게 닫고 앞자리에 몸을 실었다.
그녀가 자리에 앉자마자 무심한 목소리로 재혁이 말했다.
“다음부터는 내 옆에 앉아요.”
“아닙니다. 저는,”
“말대답 별로 안 좋아합니다.”
이나는 불쑥 튀어나오는 반항심을 억누르며 담담한 척 대답했다.
“네, 알겠습니다. 대표님.”
호텔로 향하는 몇 분 동안 재혁은 서류를 손에서 놓지 않았다.
이나 역시 침묵을 견디며 담담하게 앉아 있었다.
재혁이 별말 없는 것을 보니, 거리를 지켜 달라는 자신의 말을 들어줄 생각인 듯했다.
몇 분 후, 차가 썬라이즈 앞에 도착했다.
입구에는 호텔의 중진들이 문 앞까지 마중 나와 있었다.
재혁이 내리자, 50대 후반으로 보이는 깔끔한 정장 차림의 남자가 그에게 다가왔다.
“처음 뵙겠습니다, 대표님. 호텔 지배인 천명훈입니다. 어제 오셨다는 얘기를 못 들어서….”
“괜찮습니다. 몰래 온 거였으니까.”
재혁은 문 앞에 서 있는 임직원들을 쭉 훑더니 말을 덧붙였다.
“앞으로는 이렇게 나와 계시지 마세요. 여러분들 같은 고급 인력이 문 앞에 서 있는 건 인력 낭비입니다.”
직원들과 가볍게 인사한 후, 재혁은 호텔 안으로 들어갔다.
그 뒤를 지배인과 이나, 그리고 직원들이 뒤따랐다.
“공사 진행률은 어떻게 됩니까?”
재혁의 질문에 지배인이 바짝 따라붙으며 대답했다.
“공정률은 95%를 넘었습니다. 몇 구역의 안전시설 점검과 일부 인테리어만 하면 마무리됩니다.”
“공사 마무리하기 전에 오너 전용 엘리베이터 고쳐 놓으세요.”
“어떻게 바꾸어 놓을까요?”
“실용적으로 갑시다. 개방 층수를 늘리고 스위트룸 전용기로 꾸미세요.”
“아. 네, 알겠습니다.”
“오픈 행사는 확인했습니다. 조금 거창하긴 하지만 나쁘지 않더군요. 행사는 진행하시고 개장 할인 이벤트는 취소합니다.”
“그건 저희 명성 그룹의 관례인….”
재혁이 단호하게 말을 끊었다.
“스스로 가치를 떨어뜨리는 일입니다. 서비스 품질을 개선할 생각을 하세요. 명품은 할인하지 않는 법입니다.”
“네. 알겠습니다.”
“객실부터 살펴봅시다.”
“제가 모시겠습니다. 어디부터 살펴보시겠습니까?”
지배인의 물음에 재혁은 묘한 뉘앙스로 대답했다.
“로열 스위트룸부터.”
***
빠르게 올라가는 엘리베이터의 층계 숫자를 보며 이나는 께름칙한 기분을 감출 수가 없었다.
‘로열 스위트룸부터.’
이 말을 할 때 느껴진 재혁의 시선 때문이었다.
평범한 시선이었을 수도 있지만, 이나는 분명하게 느꼈다.
그 눈빛의 이면에 내재되어 있던 뇌쇄적인 관능을.
띠링-
55층에서 문이 열리자 재혁과 지배인, 그리고 다른 직원 한 명이 내렸다.
“안 내리시나요?”
멍하니 서 있던 이나에게 한 직원이 물었다.
“아니요. 내립니다.”
이나는 생각을 추스르며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직원의 안내로 들어간 로열스위트룸의 내부는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고급스러웠다.
재혁의 날카로운 시선들이 객실 곳곳을 향하자 총지배인이 바짝 긴장하며 재혁의 뒤로 따라붙었다.
“회장님께서 가장 신경 쓰신 객실입니다. 장담하는데, 전 세계 명성 그룹 체인 중에 최고 수준일 겁니다.”
굳어있던 재혁의 표정이 풀어지며 “좋네요.” 라는 말이 나오자 총지배인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재혁은 더 둘러보지 않고 곧장 소파에 앉았다.
총지배인과 직원들이 따라 앉으려는데 그가 말했다.
“이제 나가 보세요.”
“네?”
“손님들이 있을 때도 여기 계실 겁니까? 혼자 제대로 평가해 보죠.”
“아… 네. 알겠습니다. 자 다들 나가지.”
맨 뒤쪽에 서 있던 이나는 직원들과 함께 몸을 돌렸다.
그때, 재혁이 이나를 불렀다.
“정이나 씨는 어디 갑니까?”
“….”
“내가 여기 있는데 어딜 가냐는 말입니다.”
“하지만 지금 직원들 전부 나가라고.”
“비서는 예외입니다. 앞으로 명심해요.”
“네. 알겠습니다. 대표님.”
“좋습니다.”
그 사이 직원들이 나가고, 객실에는 재혁과 이나 두 사람만 남았다.
“여기 어떻습니까?”
“좋은 것 같습니다.”
“그 정도 감상이 끝입니까? 블라디보스톡의 객실과 비교해 어떤지 말해봐요.”
재혁은 질문을 던져 놓고 몸을 일으켜 와인 냉장고 쪽으로 걸어갔다.
“가격대가 다른 호텔이라 직접 비교는 어렵지만, 전통이 있는 호텔과 신축 호텔에서 나오는 차이가 있어 보여요.”
재혁은 와인장의 와인들을 이리저리 살피며 대답했다.
“계속해요.”
“오래됨이 가져오는 고풍스러움은 블라디보스톡의 호텔이 더 나았습니다. 하지만 썬라이즈는 세련되고 고급스러운 느낌입니다.”
“어떤 게 더 나은 거 같습니까?”
“어떤 게 더 나은 것은 없습니다. 그것은 누가 머물 방인지에 따라 달라지니까요.”
와인을 고르던 재혁의 손길이 멈췄다.
그는 의외라는 듯 이나를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와인 한 병을 골라 이나에게 다가왔다.
“정말 재밌군. 호텔경영을 공부한 사람도 아닌데 그런 얘기를 하다니.”
재혁이 이나에게 잔을 내밀었다.
이나는 그가 내민 잔을 사양했다.
“대표님, 근무 시간입니다.”
“압니다.”
재혁은 함께 가져온 와인잔에 천천히 와인을 따랐다.
거품을 내며 차오르던 와인이 잔의 중간쯤 차자, 재혁이 다시 잔을 건넸다.
“방금 한 말처럼 누가 어떤 용도로 이곳에 머무는지가 중요합니다. 그래서 경영자는 이 방에서 제공되는 모든 서비스를 알아야 합니다. 알아야 소비자의 입맛에 맞출 수 있으니까. 그런 의미에서 이것도 업무입니다.”
이나는 어쩔 수 없이 잔을 받았다.
그러자 재혁이 자신의 잔을 이나의 잔에 부딪쳤다.
재혁이 와인을 한 모금 마시고는 말했다.
“아까 서류에 붙여 둔 거, 받아들이죠.”
“감사합니다.”
“단, 일부만.”
“일부만이요?”
재혁이 다가왔다. 조금만 더 다가가면 몸과 몸이 붙을 만한 거리까지.
“마음은 정이나 씨 뜻대로 해 주죠. 대신 조항 하나를 더 넣읍시다.”
“뭐죠?”
“마음은 됐고, 몸만 나눕시다.”
“….”
“아무런 조건 없이. 바라는 것 없이. 그 이상도 이하도 없이 딱 몸만. 어떻습니까?”
“몸을 팔라는 말씀이신가요?”
“그게 그렇게 되나?”
“다를 게 있나요?”
“있지, 당신도 나한테 끌리니까. 이런 건 연애라고 봐야 하지 않나?”
“저는 대표님이 마음에 없는데요?”
이나의 말이 재혁은 콧방귀를 끼며 잔을 내려놓았다.
“거짓말.”
“방금 대표님의 제안은 제 상식에서는 이해가 되지 않는 말입니다. 몸만 주고받는 건 연애가 아니라 파트너죠. 파트너를 원하시는 거면 다른 데 가서 알아보시죠.”
“다른 데서 알아볼 수 없어.”
“그럼 돈으로 해결하시던가요.”
이나의 눈에 경멸의 빛이 깃들었다.
그와 동시에 그녀의 마음에는 정반대의 욕구가 꿈틀거리고 있었다.
예전부터 느끼고 있었던 재혁을 향한 육체적인 끌림….
그의 품 안에 넘어져, 망가지고 싶은 욕구가 그녀의 마음을 뒤흔들고 있었다.
그녀의 경멸은 그런 욕구를 느끼는 자신에게 향한 것이기도 했다.
재혁의 강렬한 눈빛이 그런 이나의 마음을 꿰뚫어 보았다.
그가 말했다.
“너 아니면 필요 없어.”
그리고 그녀의 팔을 잡았다.
“마음은 안 된다며. 그럼 몸이라도 갖겠다는 거야. 널 갖고 싶으니까.”
이나가 물었다.
“몸만 얻으면 그만인가요?”
재혁이 답했다.
“그래.”
그의 강렬한 눈빛을 보며 이나는 생각했다.
벗어나고 싶다.
이 남자에게서….
아니, 지독한 그의 집착에 사로잡히고 싶다.
“가져요. 그럼.”
말과 동시에 이나가 재혁의 셔츠를 잡아 당겼다.
그리고, 천천히 단추를 풀기 시작했다.
단추를 푸는 동안 이나는 재혁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뒤엉켜 스파크를 일으켰다.
재혁의 팔이 이나의 허리를 감더니 세차게 잡아당겼다.
그와 동시에 재혁의 입술이 이나를 덮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