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 같은 극의 자석처럼. (19/72)

19. 같은 극의 자석처럼.

솨아아-

뿌연 수증기 사이로 조각 같은 몸매 언뜻 드러났다. 그 위로 샤워기에서 쏟아진 물들이 계곡을 이루며 흘러내렸다.

떨어지는 물줄기 아래 서서 재혁은 조금 전 이나와의 대화를 생각했다.

‘당신 만나기 전에 만났던, 그때 그 남자예요.’

재혁은 화를 참지 못하고 맨주먹으로 벽을 내리쳤다.

‘그 남자의 아이이라고?’

예상하지 못한 것은 아니었지만, 실제 이나의 입에서 들으니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충격이 컸다.

찬이 누구의 아들인지 보다, 그녀의 입에서 그 남자가 나왔다는 것이 그를 더욱 분노케 하고 있었다.

그때 초인종 소리가 들렸다.

재혁은 수건을 몸에 두르고 현관으로 나갔다.

아직 닦지 않은 물방울들이 바닥으로 뚝뚝 떨어졌다.

철컥-

문이 열리자마자 이나는 깜짝 놀라서 몸을 뒤로 휙 돌렸다.

“왜! 그러고 계세요.”

이나는 당황한 듯 몸을 돌린 채로 가져온 서류를 내밀었다.

“이거요! 제가 원하는 부분만 고쳐 봤어요. 확인해 주세요.”

재혁이 서류를 받자마자 이나는 서둘러 집으로 들어갔다.

재혁은 이나가 남기고 간 서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서류의 모든 줄은 검은색으로 그어져 있었고, 그 아래로 빼곡한 글씨들이 쓰여 있었다.

새로 작성한 것과 다름없는 내용이었다.

***

그렇게 30분 뒤, 이번에는 이나의 집 초인종이 울렸다.

딩동-

이나는 아주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재혁의 상태를 살폈다.

다행스럽게도 재혁은 멀쩡한 평상복 차림을 하고 있었다.

“집에서 내 마음대로 입고 있는 게 비정상입니까?”

아까 이나의 반응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재혁이 대뜸 물었다.

“아니요. 정상이죠. 하지만 손님이 왔을 때 그 상태로 문을 여는 건 비정상이죠.”

“내 비서가 상식이 풍부한 사람이라 다행이군요.”

“제 상사가 상식이 부족하신 분이어서요.”

“말대꾸 좀 안 하면 안 됩니까?”

“원하신다면 그렇게 하겠습니다. 대표님.”

“수정본은 잘 읽어 봤습니다.”

재혁은 이나가 넘겨줬던 서류를 다시 내밀었다.

안에는 그녀가 수정한 내용마다 전부 X 표시가 되어 있었다.

이나가 이게 뭐냐는 듯 재혁을 바라보자 재혁이 말했다.

“전부 수용할 수 없는 내용이더군요. 다시 검토하세요.”

말을 마친 재혁은 몸을 휙 돌려 집으로 들어가 버렸다.

쾅-

이나는 굳게 닫힌 문을 바라보며 전의를 다졌다.

“어디 한번 해보자는 거지?”

잠시 후, 이번에는 재혁의 집 초인종이 울렸다.

딩동-

재혁이 문을 열고 나가 보니, 문 앞에 덩그러니 서류만 놓여 있었다.

재혁은 그녀의 집 문을 노려보며 혼잣말을 했다.

“어디 한번 해보자, 이거로군요.”

띠링-

이번에는 초인종이 울리지 않고 이나에게 문자가 왔다.

[서류 가져가요.]

문자를 확인한 이나의 눈에서 불꽃이 일었다.

“이제 나오기도 귀찮다? 좋아! 어디 한번 해보자고!”

이나는 벌떡 일어나 집 밖으로 나가 재혁의 집 초인종을 눌렀다.

딩동-

잠시 후, 재혁이 문을 열었다.

이나는 그를 노려보며 날카롭게 말했다.

“좀 유치하시네요. 대표님!”

이나가 손을 내밀자, 재혁은 안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테이블 위에 올려놨습니다. 가져가요.”

“제가 왜 대표님 집에 들어가야 하죠?”

“그럼 내가 정이나씨 집에 들어갈까요?”

이나가 눈살을 찌푸렸다. 도저히 유치해서 말이 안 통하는 상대였다.

화를 내는 사람이 지는 게임. 이나는 표정을 풀고 차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럴 리가요.”

이나는 성큼성큼 걸어가 테이블 위에 놓여 있는 서류를 집어 들었다.

“나머지는 내일 보고하겠습니다.”

그녀가 재혁을 애써 무시하며 말하는데, 갑자기 그녀의 위로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웠다.

이상함을 느낀 이나가 조심스럽게 뒤를 돌았다. 재혁의 얼굴이 그녀의 눈 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짝! 소리가 별안간에 울려 퍼졌다.

이나의 손은 재혁의 뺨에 맞닿아 있었고, 재혁은 얼이 빠진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너무나 본능적으로 나온 행동에 그녀 역시 당황했다.

2~3초쯤 마주 보고 서 있는데 재혁이 말했다.

“이거 떼어 내려고 한 겁니다.”

재혁의 손에 기다란 머리카락이 들려 있었다. 이나의 어깨에서 떼어 낸 모양이었다.

“헉!”

이나가 실수를 깨닫고 그의 뺨에서 손을 뗐다. 재혁의 뺨에는 새빨간 손자국이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죄송합니다.”

이나는 민망함에 아무렇게나 인사하고 그의 집을 빠져나갔다.

쾅-

이나가 나간 후, 재혁은 뺨 위에 손을 올렸다. 얼마나 세게 맞았는지, 뺨이 아직도 얼얼했다.

***

다음 날 아침, 6시 29분. 

재혁은 평소처럼 알람이 울리기 1분 전에 눈을 떴다.

몸을 일으키자 이불이 맨 몸에서 미끄러지며 기분 좋은 소리를 냈다. 

침대에 앉은 그의 모습은 막 잠에서 깬 사람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완벽했다.

재혁은 머리맡에 두었던 아날로그 시계의 알람을 끄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때 문자가 왔다.

이나에게서 온 문자였다.

[운동 가실 시간입니다.]

아날로그 시계의 분침이 29에서 30으로 바뀌자마자 칼같이 도착한 문자였다.

처음 받아 보는 이나의 연락에, 재혁의 입가에는 작은 미소가 피었다.

단순 업무의 일환이었지만, 그녀가 아침을 깨워 준다는 것은 꽤 괜찮은 기분이었다.

재혁은 얼굴에 핀 미소와는 다르게 딱딱한 말투로 답장을 보냈다.

[15분 후, 엘리베이터 앞. 운동복 차림으로.]

띠링-

잠시 후 문자가 도착하자, 그는 기다렸다는 듯 휴대 전화를 확인했다.

[네.]

***

[15분 후, 엘리베이터 앞. 운동복 차림으로.]

문자를 확인한 이나의 미간이 틈이 없을 만큼 좁아졌다.

아침 운동 필참이라는 항목이 같이 운동하는 것인 줄은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나는 [아니요.]라고 누르고 싶은 충동을 가까스로 이겨 내며 [네.]라고 답장했다.

“후….”

아무리 상사로만 보기로 했다지만, 완전 민낯으로 나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가벼운 기초화장을 하기 위해 거울 앞에 앉자 어제 그의 뺨을 때렸던 일을 떠올랐다.

창피함에 그녀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그냥 아프다고 할까?’

그녀는 한참을 고민하다가 어쩔 수 없이 집을 나섰다.

두 집의 문이 동시에 열리며 두 사람은 눈이 마주쳤다.

재혁은 이나를 보자마자 다짜고짜 인상을 구겼다.

그녀는 어제 일 때문에 그런다고 생각해서 곧바로 재혁에게 고개를 숙였다.

“죄송해요. 어제는 제가 너무 성급했습니다.”

재혁은 별다른 말 없이 이나를 바라보며 엘리베이터 앞에 섰다.

재혁이 인사를 받지 않자, 이나는 뻘쭘해하며 고개를 들었다.

재혁의 뜨거운 시선이 이나를 향해 쏟아지고 있었다.

시선을 견디다 못한 그녀가 다시 한 번 사과했다.

“제가 잘못했….”

그때, 재혁이 차가운 말투로 말했다.

“정이나 씨.”

“네, 대표님.”

“운동 나올 때는 운동 복장으로 나옵시다.”

“네?”

이나는 엘리베이터 문에 비친 자기 모습을 살펴보았다.

질끈 올려 묶은 머리에 조금 헐렁한 반팔 티, 그리고 짙은 감색의 레깅스까지.

이나의 차림은 누가 보아도 조깅을 나가는 모습이었다.

그녀가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라서 잠시 고민하는데, 재혁이 말했다.

“뛸 때 편한 옷으로 입고 나와요. 펑퍼짐한 옷으로.”

때마침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고, 재혁은 이나의 대답을 듣지 않고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별걸 다 트집 잡는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나는 그냥 수긍하기로 했다.

“주의하겠습니다.”

그 사이, 재혁은 문에 비친 이나의 모습을 슬쩍 훔쳐보았다.

그녀의 모습에 어제 있었던 일은 머릿속에서 사라지고 질투심이 불쑥 올라왔다.

완벽했다. 자꾸만 눈이 갈 정도로. 저 모습으로 조깅을 나가면 다른 남자들이 이나의 몸매를 훔쳐볼 것이 뻔했다.

 아무리 싸운 사이라지만 딱 달라붙은 레깅스를 입채로 나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재혁은 한숨을 푹 쉬더니, 땀을 내기 위해 입고 있던 얇은 아웃웨어를 벗어 이나에게 건넸다.

“허리에 둘러요.”

“네?”

이나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받지 않자, 재혁의 두 팔이 이나의 허리로 쑥- 들어왔다.

갑작스러운 재혁의 행동에 이나는 깜짝 놀라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그녀가 당황하는 사이, 재혁은 들고 있던 옷을 이나의 허리에 둘러 앞으로 매듭지었다.

그녀의 레깅스가 가려지자 재혁은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명심해요. 운동하기 편한 펑퍼짐한 옷.”

“….”

***

40분 정도의 운동이 끝나고 재혁이 말했다.

“가볍게 샤워하고 우리 집으로 건너와요. 아침 먹읍시다.”

“괜찮아요. 그냥 저 혼자,”

“그냥 아침 먹으려는 거 아닙니다. 어제 얘기하던 거 마무리하죠.”

“알겠습니다.”

“30분이면 되겠습니까?”

“네. 충분해요.”

“그럼 이따 봅시다.”

집으로 들어온 이나는 간단하게 샤워를 마치고 재혁의 집으로 향했다.

그녀의 손에는 어제 협상을 끝내지 못한 비서 매뉴얼이 들려 있었다.

초인종을 누르자 안에서 재혁의 목소리가 들렸다.

“들어와요.”

재혁은 가벼운 흰색 셔츠 위에 앞치마를 두른 채로 요리를 하고 있었다.

“식탁에 잠깐 앉아 있어요. 거의 다 끝났으니까.”

언제 씻고 요리까지 하고 있었을까?

그녀는 재혁이 참 대단하다고 생각하며 식탁에 앉았다.

잠시 후, 이나의 앞에 바삭하게 구운 크루아상과 메이플 시럽, 그리고 토마토 오믈렛과 베이컨이 차례로 놓였다.

재혁은 이제 막 내린 따뜻한 커피를 이나의 앞에 놓으며 자리에 앉았다.

“언제나 아침은 이렇게 먹습니다. 정이나 씨는?”

“저는 보통 걸러요.”

“그렇군요. 아침을 먹어야 두뇌 회전이 빨라집니다. 자, 들어요.”

“저….”

이나가 말을 꺼내려는데, 재혁이 아무렇지도 않게 먼저 말했다.

“정이나 씨 원하는 대로 합시다.”

“네?”

“다 들어주겠다는 말입니다.”

재혁은 이나의 접시에 오믈렛을 덜어주며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식사해요.”

갑자기 변한 재혁의 태도에 이나는 의심의 눈초리로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

“왜요?”

“뭐가 말입니까?”

“갑자기 왜 그러시죠?”

“굳이 따질 필요 없겠더군요. 당신이 내 비서이기만 한다면 말이죠.”

“….”

“계약 기간만 준수해요. 나머지는 괜찮으니까. 밥 먹어요. 같이 밥 먹고 싶어서 부른 겁니다.”

달칵-

그녀는 조심스레 식탁에서 일어나더니 재혁에게 말했다.

“어제 제가 원하는 부분을 적어서 붙여 놨습니다. 살펴보시고 결재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럼 이따 뵙겠습니다. 대표님.”

이나는 인사를 마친 후 곧바로 그의 집을 나갔다.

서류의 첫 장에 붙어 있는 노란 쪽지가 보였다.

재혁은 그것을 떼어 읽어 보았다.

[말씀하신 모든 업무를 수행하겠습니다. 단, 사적인 거리는 지켜 주시길 바랍니다. 그 거리가 깨지면, 바로 그만두겠습니다.]

쪽지를 읽은 재혁은 허탈한 듯 웃었다.

두 사람 사이가 같은 극의 자석처럼 느껴졌다.

한발 다가가면 딱 그만큼 물러나는 사이.

그는 밤새 이나의 말에 대해 생각했다.

다른 남자의 아이라는 말. 

그에게는 아무런 상관없는 말이었다.

중요한 것은 이나를 향한 자신의 마음 뿐.

재혁은 쪽지를 구기며 혼잣말을 했다.

“한번 붙여 보지. S극과 S극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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