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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여기가 우리집 입니다. (18/72)

18. 여기가 우리집 입니다.

“그건 말도 안 돼요! 동의할 수 없어요.”

이나의 발끈하는 외침에 재혁은 계약서의 서명을가리키며 말했다.

“이 사인의 의미는 동의한다는 말입니다. 정이나 씨.”

“아니요. 그런 조항이 있는 줄 알았다면 사인하지 않았을 거예요.”

“그럼 제대로 읽어 봤어야겠죠.”

“노동청에 고소할 거예요.”

“명성 그룹에 속해 있는 최고의 변호사들이 정이나 씨와 소송전을 벌일 겁니다. 최선을 다해서.”

“….”

“억울할 거 없어요. 사인을 한 그쪽 잘못이니까.”

“대체 저에게 왜 이러시는 거죠?”

“왜 이러는 거 같습니까?”

“장난하지 마시고요!”

“아까부터 내 말이 장난처럼 들리나 본데. 지금 나랑 장난치는 건 그쪽 아닌가?”

“뭐라구요?”

“블라디보스톡에서부터 지금까지 날 계속 외면하고 있었을 텐데?”

“….”

벌떡-

재혁은 테이블 위에 계약서를 놓아두고 이나의 앞으로 걸어갔다.

“또 나 가지고 장난친 거 아니였나? 6년 전 그때처럼.”

“….”

“계속 물러나는 이유가 뭐야?”

“없어요. 이유.”

“그래?”

재혁의 손이 이나의 턱을 오롯이 감싸 쥐었다.

“잘 들어. 넌 장난일지 몰라도, 난 진심이야.”

그의 얼굴이 이나를 향해 다가왔다.

교통사고처럼 피할 수 없는 찰나의 순간이었다.

“!!”

그와 입술이 닿아 있는 동안, 이나는 온몸이 굳어 손가락 하나 꼼짝할 수가 없었다. 한 호흡 정도의 시간이 지나고 재혁의 입술이 떨어졌다.

멀어지는 그의 입에서 뜨거운 숨이 느껴졌다.

재혁은 주먹 하나 떨어진 거리에서 이나를 지긋이 바라보다가 휙 돌아 자리로 돌아갔다.

그는 책상 위에 서류 뭉치 하나를 툭 던지더니 말했다.

“업무 매뉴얼입니다. 1억이 없으면 숙지해서 내일까지 출근해요.”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평온한 말투였다.

키스 후에 냉정한 말투라니.

이나가 말 없이 서있자, 재혁이 그녀에게 말했다.

“나한테서 도망치려고 한 벌입니다. 1억을 가져와요. 나한테 벗어나고 싶으면.”

“….”

“나가 봐요.”

재혁은 빤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 눈빛이 싫어서, 이나는 할 수 고개를 숙이고 방을 나섰다.

방문을 나서자마자 이나는 자리에 멈춰섰다.

수많은 생각과 감정들이 마음을 뒤흔들고 있었다.

어떻게 해야 될까? 하는 생각보다, 어떻게 벗어날까? 하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1억을 가져와요. 나한테 벗어나고 싶으면.’

1억.

결국 재혁 역시 돈이면 다 된다고 생각하는 재벌과 다를 바 없었다.

“뜻대로 되지는 않을 거야. 강재혁.”

그녀는 마음을 다잡으며 복도를 걸어갔다.

그냥 이대로 그의 뜻에 순순히 따를 생각은 눈곱만치도 없었다.

***

집으로 돌아온 이나는 소파에 앉아 재혁이 준 서류를 넘겨보았다.

서류 첫 장에는 ‘대표 이사 개인 비서 매뉴얼’이라는 글씨가 보였다.

“개인 비서….”

개인 비서라는 단어가 왠지 그녀의 눈에 불편하게 걸렸다.

이나는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첫 장을 넘겼다.

1. 소속 : 귀하는 썬라이즈 호텔 대표 이사 강재혁의 개인 비서로 소속은 대표 이사 개인에 속한다.

첫 조항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인내심을 갖고 끝까지 읽어 보기로 했다. 

하지만 그녀의 인내심은 그리 길게 가지 못했다.

2. 근무 형태 : 주·야간에 귀속되지 않는 유연 근무 형태이며, 대표 이사가 필요로 할 시 즉각 대응한다. 하루 근무 시간 7시간이 초과할 경우에는 기본급의 1.5배의 추가 수당을 수령한다.

2-2. 추가 근무 : 상시로 주말 근무가 있을 수 있으며, 주말 근무 시에도 위와 동일한 1.5배의 추가 수당을 수령한다. 

3. 근무 내용 : 대표 이사의 스케줄 관리, 의복 관리, 식단 관리, 손님 응대 및 사생활 관리가 주 업무이며, 그 외 대화, 식사, 문화생활, 관광 등 대표 이사와 함께하는 모든 일을 업무로 간주한다.

3-2. 본 업무라 생각되지 않는 내용의 업무를 수행할 시 위와 동일한 1.5배의 추가 수당을 수령한다.

3-3 필수 업무 : 조깅과 아침 식사 필참. 출근길 필참. 점심 식사 필참. (외부 미팅 시 제외) 한 달에 한 번 업무 일지 제출. (서식 자유)

계약 연애용 계약서라고 해도 믿을 내용에 이나는 기가 찼다. 그리고 마지막 항목에 이르렀을 때, 그녀는 끝내 폭발하고 말았다.

4. 주의 사항 : 불편 사항 및 요구 사항은 언제든지 보고할 것.

특히 업무 중 대표 이사에게 특이 감정(이성에 대한 끌림 포함)을 느낄 시 지체 말고 보고할 것.

이런 장난스러운 서류 말고 진짜 서류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위아래로 뒤집어 보았지만, 내용은 이것이 다였다.

어이없는 내용에 헛웃음과 함께 욕지거리가 튀어나왔다.

“정말 미친 거 아니야?”

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러는 걸까?

휴대폰이 울렸다.

재혁이었다.

전화를 받자 재혁 특유의 사무적인 말투가 전화기 너머에서 들려왔다.

“읽어 봤습니까?”

“네.”

“어떻습니까?”

“장난 같네요.”

“그거 말고 다른 건 없습니다.”

“진심이신가요?”

“아까부터 계속 진심이냐고 묻는 이유가 뭡니까?”

“하긴 처음부터 장난으로 벌인 일이니, 계약서도 이 모양이겠지요.”

“불만입니까?”

“네.”

“말해봐요.”

“하나부터 끝까지, 전부 받아들일 수 없어요.”

“수정하고 싶은 부분을 말해봐요.”

“수정이요? 수정하고 싶은 거 없어요! 전부 못합니다. 여자가 필요하시면 어디 다른 데 가서 구하시죠. 저는 팀장님 가짜 애인 행세할 생각 전혀 없으니까요!”

“호칭. 제대로 하라고 말했을텐데요?”

“지금 그게 중요해요? 됐고요. 저는 일할 생각 없으니까 마음대로 하세요.”

“만나서 얘기합시다.”

“됐어요. 필요 없습니다. 끊습니다.”

“어차피 지금 거의 다 왔습니다.”

“우리 집에요? 미치셨어요?”

“미치진 않았고, 내가 사는 집에 온 겁니다.”

“무슨!”

그때, 문밖에서 초인종 소리가 들렸다.

“후. 잠깐만요!”

이나는 재혁이 왔다는 상상조차 하지 못하고 무심코 문을 열었다.

“누구세요?”

문 앞에 재혁이 휴대 전화를 들고 서 있었다.

“여긴!! 어떻게!!”

이나가 놀라 묻자 재혁은 앞집을 가리키며 말했다.

“여기가 우리 집입니다.”

이나가 멍하니 있는 사이, 재혁은 이나를 비집고 집 안으로 성큼 들어와 버렸다.

“팀장님! 아니, 대표님!”

재혁은 방 안을 둘러보며 말했다.

“시키는 대로 잘해 놨는지 확인 중입니다. 뭐, 나쁘지 않군요.”

“시키는 대로…?”

그의 뒤를 따라 들어가던 이나의 발걸음이 멈췄다.

“이 집도 팀장님이 준비하신 건가요?”

“그럼 누가 준비했을 거라 생각한 겁니까?”

그의 말에 이나의 마음이 차갑게 식다 못해 얼어붙었다.

“돈이면 내 마음을 살 수 있을거라고 생각했어요?”

이나는 기분 나쁜 표정으로 방 안에 들어가더니 짐을 싸기 시작했다.

“1억 있습니까?”

“네 있어요. 1억 드리죠. 여기서 일 못 하겠습니다.”

“혹시, 날 돈이면 다 되는 줄 아는 속물로 보는 겁니까?”

“잘 아시네요.”

“어이가 없군요. 정이나 씨, 그거 자격지심입니다.”

“뭐라구요?”

이나와 재혁의 시선이 허공에 충돌했다.

“모든 호의를 병적으로 거부하는 거. 그게 자격지심이 아니면 뭡니까?”

“정말 오만하시네요. 이런 걸 하기 전에 받는 상대 생각부터 하셔야 하는 거 아닌가요? 팀장님에게는 아무것도 아닐지 몰라도,”

“호칭 제대로 하라고!”

이나가 말하는 중 재혁이 갑자기 언성을 높였다.

벼락같은 소리가 가시자, 두 사람 사이에 차가운 침묵이 맴돌았다.

이나는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

“왜 그렇게 호칭에 집착하세요? 대표 자리에 오른 게 그렇게 자랑스러우신가요?”

그의 입에서는 이나가 예상하지 못한 대답이 흘러나왔다.

“팀장으로는, 널 지킬 수 없으니까.”

“그게 무슨….”

“이제 사랑하는 여자가 상처받는 모습을 바라만 보지 않아.”

“….”

재혁의 눈에 언뜻 후회의 빛이 지나가고 있었다. 그 눈빛에는 6년 전 이나를 놓쳤던 그의 아픔이 깃들어 있었다.

진심이 전해진 것일까? 이나는 마음이 무거운 듯 한숨을 푹 쉬며 말했다.

“더 다가오지 말아요. 부탁이에요.”

“아이 때문인가?”

“….”

이나는 차마 대답하지 못했다.

이나의 침묵에 재혁은 이전부터 갖고 있던 질문을 꺼냈다.

“그 아이. 누구 아인데?”

쿵-

재혁의 말에 이나의 심장에 돌덩이 하나가 내려앉았다.

점점 사색이 되어 가는 이나의 표정을 보고, 재혁의 의심은 확신으로 변했다.

하지만 이나가 사색이 된 이유는 재혁이 생각하는 것과 다른 것이었다.

그를 떠나야만 했던 이유….

그의 마음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그 이유가 회오리처럼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흔들리면 안 돼.’

지금 여기서 흔들리는 모습을 보인다면 그에게 여지를 주는 것밖에 안 될 것 같았다.

그녀가 정색하며 말했다.

“무슨 상관이시죠?”

“내 아이가 아니냐고 묻는 거야.”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아 몇 초의 틈이 생겼다.

그녀는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상상력이 풍부하시네요.”

“그럼, 누구 아이지? 그때 나 말고 다른 남자를 만난건가?”

재혁의 집착 가득한 말에 이나는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재혁을 물러나게 하기 위해서는 거짓말을 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녀는 마음을 다잡고 입을 열었다.

“당신 만나기 전에 만났던, 그때 그 남자 아이예요.”

재혁의 동공이 지진이 난 듯 흔들렸다. 그는 마음을 들키고 싶지 않았는지 이나에게서 돌아섰다.

깊은 한숨이 새어 나오는 걸 가까스로 참으며, 재혁이 침착한 말투로 말했다.

“수정하고 싶은 부분 체크해서 가져와요. 난 앞집에 있으니까.”

말을 마친 재혁은 찬 바람이 불 정도로 차갑게 돌아섰다.

문을 나서던 그는 무언가 생각났는지, 문을 잡고 서서 말했다.

“그리고 뭔가 착각하고 있나 본데, 내가 돈으로 꼬실 거였으면 이 정도로 안 합니다.”

철컥-

재혁이 떠난 후, 홀로 남은 이나는 자리에서 한 발짝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내 아이가 아니냐고 묻는 거야.’

재혁이 남기고 간 말과 함께, 6년 전 어느 날의 기억이 그녀를 괴롭혔다.

‘나, 아이 가졌어.’

눈물을 흘리며 내뱉은 말 뒤에 왔던 차가운 시선은 6년이 지난 지금도 머릿속에 생생하게 떠올랐다.

그날 그녀는 모든 것을 잃었다.

사랑하는 사람과, 평생을 간직했던 그녀의 꿈까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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