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썬라이즈의 젊은 오너
“엄마아!!! 가지 마 엄마아!!”
막상 이나가 떠나는 아침이 되자, 집 앞은 눈물바다가 되었다.
“찬~ 엄마가 토요일, 일요일마다 올게. 우리 찬이 착하지?”
“싫어엉! 엄마아 가지 마아!”
찬의 닭똥 같은 눈물 앞에 이나는 마음이 약해졌다.
이나가 갈등하는 모습을 보자마자, 엄마가 찬을 이나에게서 떼어냈다.
“찬아~ 찬아~ 엄마 열 밤만 자면 온대~ 소희 보러 가야지~”
“싫어~ 소희 싫어~ 소희 우찬이랑 놀았단 말이야!! 엄마아!!”
아… 그런 거였어? 묘한 배신감을 느끼며 이나는 찬을 달랬다.
“찬아~ 엄마가 다섯 밤만 자고 올게! 응? 약속!”
“시러~ 싫어어어! 엄마아!”
“그럼 엄마가 올 때, 바다 탐험대 옥토넛 사다 줄게.”
“옥토넛…?”
“그래~ 저번에 찬이가 가지고 싶어 하던 큰~거 있잖아.”
“그거, 그거 잠수함 뿡뿡하는 거?”
“그래 그거~ 그러니까.”
“그래!”
“어?”
“대신 꼭 사다 줘야 해!”
이렇게 쉽게?
“어… 그래… 찬아, 엄마 가도 괜찮아?”
“응!”
찬은 언제 울었냐는 듯 싱글벙글 웃으며 이나를 배웅했다.
아들의 계속 되는 배신에 씁쓸함을 느끼며 이나는 부산으로 출발했다.
택시를 타고 역에 도착해 곧바로 기차에 올랐다.
멀어지는 서울의 풍경을 바라보며 이나는 이런저런 생각에 빠졌다.
그녀가 출발하기 며칠 전부터 재혁은 어디론가 출장을 가 있는 상태였다.
결국 작별 인사 조차 하고 오지 못했다.
그가 출장을 가는 날 마지막으로 한 말이 떠올랐다.
‘정이나 씨, 또 봅시다.’
또 보자니… 무슨 말이었을까?
멍하니 창밖을 보며 재혁을 떠올리던 이나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마음을 다잡았다.
블라디보스토크에 갔다 온 이후 계속 재혁에게 마음이 끌리고 있던 그녀였다. 이대로 시간이 흘렀다면 걷잡을 수 없는 사태에 직면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부산에 가게 된 것이 잘 된 것일지도 모른다.
그에게도 자신에게도.
***
부산에 도착한 이나는 해운대의 한 아파트 앞에 서 있었다.
예상과는 너무 다른 아파트의 풍경에 그녀는 이곳이 사택에 맞는지 한참 동안 주소를 확인했다.
“뭔가… 이상한데…?”
하늘을 찌를 듯 우뚝 솟은 고층 에 전면이 유리로 되어 있는 고급스러운 외관 디자인, 그리고 여유로운 단지의 풍경과 입구에서부터 느껴지는 철저한 보안 시설까지. 일반 직원에게 제공하기에는 너무나 값비싼 아파트였다.
그녀가 갸웃거리며 입구 앞을 서성이자, 보안 요원이 그녀를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았다.
눈초리를 느낀 이나는 자신 없는 표정으로 전날 우편으로 도착한 마스터키를 보안 장치에 갖다 댔다.
다행히도 굳게 닫혀 있던 단지의 문이 열렸다.
이곳이 맞는다는 것을 확인하며 그녀는 안으로 들어갔다.
아름답게 조경이 된 화단들과 그 사이사이를 장식하고 있는 조각상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 사이를, 한눈에 보기에도 여유로워 보이는 사람들이 걸어 다녔다.
내부의 모습은 겉에서 본 것보다 고급스럽고 풍요로워 보였다.
단지 안을 걸으면서 이나는 왠지 있으면 안 되는 곳에 있다는 기분이 들었다.
그때, 이나의 눈에 익숙한 뒷모습이 보였다.
“어?”
저 멀리 재혁을 닮은 남자가 걸어가고 있었다.
너무 멀어서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분명 익숙한 재혁의 뒷모습이었다.
이나가 자세히 보기 위해 눈살을 찌푸릴 때, 남자가 시야에서 사라졌다.
본능적으로 뒤를 따라가던 이나는 갑자기 발걸음을 멈추었다.
‘여기에 있을 리가 없잖아.’
자신이 한심스럽게 느껴졌다.
이제 생각하지 않기로 해 놓고, 비슷한 사람만 봐도 재혁이라고 착각하다니.
이나는 한숨을 푹 쉬고는 그를 따라가던 발걸음을 돌려 사택으로 향했다.
“우와….”
아파트에 들어선 이나의 입에서 감탄사가 흘러나왔다.
아파트는 겉에서 보는 것보다 훨씬 잘 꾸며져 있었다.
마치 명성 그룹의 호텔 객실처럼 아파트 내부는 이미 인테리어까지 마친 상태였고, 필요한 온갖 가전제품들이 구비되어 있는 상태였다.
“대체… 이 회사는 돈이 얼마나 많은 거야. 비서한테도 이런 집을 주고.”
물소 가죽으로 보이는 고급 소파에 앉으며 혼잣말을 하고 있는데, 밖에서 희미하게 앞집의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났다.
앞집의 문소리를 듣자 재혁이 떠올랐다.
어느 날 갑자기 그가 이사 왔던 때를 떠올리자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문을 나설 때마다 괜히 그를 마주칠까 기대했던 것도 사실이다.
‘인사라도 하고 올 걸 그랬나?’
재혁을 생각하던 이나는 깜짝 놀라며 몸을 일으켰다.
재혁 생각은 하지 말자고 그렇게 다짐했으면서도 시도 때도 없이 재혁 생각만 하고 있다니!
“정신 차려 정이나! 정신!”
그녀는 휴대 전화를 꺼내 찬에게 전화를 걸었다. 재혁을 잊는 데는 찬이 직방이었으니까.
“어 찬아~ 엄마 잘 도착했어~”
“엄마! 보고 싶어.”
울먹이는 찬이의 목소리에 이나는 마음이 뭉클해졌다.
“엄마도 찬이 보고 싶어. 우리 찬이 유치원 잘 갔다 왔어?”
“응! 엄마는 잘 도착했어?”
찬이와 대화하면 이나는 마음 한편의 쓸쓸함을 잊어갔다.
그렇게 부산에서의 첫날이 지나고 있었다.
***
다음 날 아침, 이나는 깔끔한 정장을 차려입고 썬라이즈로 향했다.
썬라이즈는 높은 건물이 많은 해운대에서도 홀로 우뚝 솟아 있었다.
다음 달 개장을 앞둔 호텔은 입구에서부터 분주한 느낌이었다.
문을 지키고 있는 안내원에게 비서실 위치를 물으니 친절하게 알려 주었다.
“오너룸으로 바로 오시라는 명령이 있었습니다. 오너 전용 승강기를 이용하시면 됩니다.”
오너 전용 승강기? 별게 다 있다는 생각을 하며 이나는 구석에 있는 전용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엘리베이터에는 62층, 단 한 층의 버튼밖에 없었다.
62층 버튼을 누르자 순식간에 해당 층에 도착했다.
오너룸으로 이어진 새하얀 벽의 복도에는 고급스러운 미술품들이 일정한 간격으로 걸려 있었다.
개중에는 이름만 들어도 바로 알 수 있는 유명 작가의 작품들도 보였다.
복도를 걸어 안쪽으로 들어가자, 비서의 자리로 보이는 프런트가 있었고 그 뒤로는 오너룸이라는 글씨가 쓰여 있는 방이 보였다.
문 앞에 서자 괜히 긴장되었다.
그녀는 깊은숨을 쉬며 긴장을 풀고 가볍게 문을 두드렸다.
잠시 뒤, 안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와요.”
분명 아는 목소리였지만, 이나는 긴장한 탓에 익숙하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조심스레 문을 열고 들어가니, 커다란 모니터 뒤에 한 남자가 등을 돌린 채 앉아 있었다.
이나는 그의 앞으로 다가가 90도로 허리 숙여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본사에서 새로 임명된 정이나입니다.”
이나의 인사에도 그는 여전히 등을 돌린채로 대답했다.
“반갑습니다.”
동굴의 울림처럼 낮고 굵게 울리는 목소리에 이나는 이상함을 느꼈다.
‘설마…’하는 생각으로 천천히 고개를 들었을 때, 그 역시 몸을 돌렸다.
그리고 오너의 얼굴을 확인한 이나는 경악했다.
그곳에는 본사에 있어야 할 재혁이 매력적인 미소를 지으며 앉아 있었다.
그는 놀란 이나의 얼굴을 바라보며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에게 다가왔다.
“잘 부탁합니다. 썬라이즈의 새로운 오너, 강재혁입니다.”
“여긴 어떻게….”
“손이 떨어질 거 같은데, 일단 악수부터 하지 않겠습니까?”
“….”
이나는 일단 그가 내민 손을 잡았다.
커다란 손이 이나의 손을 완전히 덮고는 쓰윽 빠져나갔다.
“놀랄 거 없습니다, 정이나 씨. 그냥 하던 대로 하면 됩니다.”
그는 아무일도 아니라는 듯 말했다.
하지만 이나에게도 아무 일도 아닐 리 없었다.
“지금 뭐 하시는 거죠?”
“뭐가 말입니까?”
“제가 여기 있는 이유가, 혹시 팀장님 때문인가요?”
“일단 호칭부터 고칩시다. 이제 팀장은 아니니까. 대표님이라고 불러요.”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요!”
이나가 발끈하자 재혁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럼, 뭐가 더 중요합니까?”
뻔뻔한 재혁의 대답에 이나는 할 말을 잃었다.
그는 이 모든 상황이 당연하다는 듯 행동하고 있었다.
그래서 오히려 그녀가 화를 내는 것이 이상하게 여겨질 정도였다.
그 여유가 이나를 더욱 화나게 했다.
그가 자신을 갖고 놀고 있다는 느낌 때문이었다.
이나는 차분하게 호칭을 고쳐 다시 물었다.
“제가 여기 있는 이유가 대표님 때문인지 물었습니다.
이나가 호칭을 고쳐 대답하자 재혁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정이나 씨가 여기 있는 이유는 나 때문이기도 하고 아니기도 합니다.”
“혹시 저랑 장난하시려는 거는 아니시죠?”
“장난? 지금 내가 장난하는 거로 보입니까?”
“솔직히 말씀드리면, 네. 그냥 부잣집 도련님의 장난으로밖에 안 보입니다.”
“정이나 씨다운 표현이군요.”
“진지하게 대답해 주시죠.”
“진지하게 대답한 겁니다.”
“….”
“뭐 더 궁금한 거 있습니까? 없으면,”
“그만두겠습니다.”
“방금 뭐라고 했습니까?”
“이런 자리인 줄 모르고 왔어요. 다른 사람 구하세요.”
이나는 미련 없이 돌아섰다.
얼마나 가볍고 하찮게 보였으면 이렇게 가지고 노는 걸까?
돌아서는 이나의 등 뒤로 재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안타깝게도 못 그만둡니다.”
“아니요. 전 그만둘 거예요.”
그때, 재혁이 이나를 향해 종이 한 장을 들어 보였다.
“계약 위반 시 회사 측에 위약금 1억 원을 지불한다. 기억 못 하나 보군요?”
“무슨 말씀이시죠? 저는 그런 계약서에 사인한 적 없습니다.”
“그럼 밑에 이 사인은 뭡니까?”
재혁이 가리킨 계약서 하단에는 큼지막한 이나의 서명이 보였다.
재혁은 악마 같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정이나 씨, 새로 작성한 근무 계약서를 읽어 보지도 않았군요.”
“설마?!”
재혁의 말에, 이나의 머릿속에는 며칠 전의 일이 떠올랐다.
해운대 전출이 확정된 다음 날, 전자 메일로 계약서 한 부가 날아왔었다.
계약직 직원 특성상 3개월 또는 6개월 단위로 계약서를 갱신하는 일이 잦았기 때문에 이나는 별다른 생각 없이 계약서에 사인했다.
그런데 그런 내용이 있었다고?
“말도 안돼요. 근로 계약서에 그런 계약금을 넣는다니요?”
“잘 읽어보지 않은 정이나씨 잘못이지요.”
“이봐요! 강인혁씨!”
“당신 아직 그만둔 거 아닙니다. 호칭 제대로 합시다.”
이나는 분노에 가득차서 그를 노려보았다.
벗어나려 해도 자신을 놓아주지 않는 저 집착 가득한 남자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