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새로운 조건
너무나 파격적인 내용에 이나는 같은 내용을 반복해서 읽었다.
박 과장 역시 내용이 충격적이었는지, 건너편에 앉아 있던 김 대리를 불러 공문을 보여 주었다.
“야, 김 대리야. 이거 좀 봐 봐.”
“왜요 뭔데요?”
공문을 본 김 대리 역시 놀란 목소리로 말했다.
“우와… 이렇게 정직원으로 전환된 사례가 없을 텐데…. 거기다가 사택 지원까지?”
박 과장은 짚이는 데가 있다는 눈초리로 이나에게 물었다.
“이나 씨, 뭐 혹시 빽 썼어?”
“빽이요?”
“빽 없이 이렇게 되나?”
그때, 외출했던 재혁이 사무실로 들어왔다.
박 과장은 재혁을 보고는 화들짝 놀라며 자세를 고쳐 앉았다. 이나에게 빽이 있다면 재혁밖에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농담이고, 어떻게 할 거야? 내가 보기에는 나쁘지 않아 보이는데?”
박 과장의 말이 맞았다. 1년 후 정직원 전환이 보장된다면 나쁘지 않은 조건이었다. 거기에 사택까지 제공한다니….
“내일까지 생각해 보겠습니다.”
“그래, 썬라이즈 오너가 누가 될지 몰라도, 이 정도면 가는 게 좋아 보이네.”
갑작스러운 변화에 이나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돌아섰다.
자리로 향하는 이나의 눈에 굳게 닫힌 팀장실 문이 보였다.
뭔가 께름칙한 기분이었다.
무서운 표정을 하고 사무실을 나서던 재혁의 모습이 떠올랐다.
‘혹시… 팀장님이?’
이나는 곧바로 재혁의 방으로 향했다.
문을 두드리자마자 재혁의 목소리가 들렸다.
“들어와요.”
이나의 모습에 재혁은 의아하다는 듯 그녀를 바라보았다.
“무슨 일입니까?”
“팀장님. 오늘 발령 건에 대해 드릴 말씀이,”
“안타깝게 됐습니다. 정이나 씨. 회사에서 내린 결정이라 어쩔 수가 없군요.”
“저, 그게 아니라,”
“그곳에 가서도 회사를 위해 열심히 일해 주길 바랍니다. 소문으로는 오너도 좋은 사람이라더군요.”
“저 여쭤볼 게 있는,”
“지금 바빠서 나중에 얘기합시다. 처리할 일이 많군요. 나가 보세요.”
재혁이 계속 말을 끊는 통에 이나는 단 한마디도 끝까지 하지 못했다.
이나가 그만하라는 듯 언성을 높이는데 이번에도 재혁이 그녀의 말을 잘랐다.
“제 말 좀,”
“아, 깜박했군.”
그는 갑자기 일어나더니 이나를 자리에 두고 팀장실을 나갔다.
“팀장님!”밖으로 나간 재혁은 박 과장에게 다가갔다.
“박 과장님, 러시아어 공부는 잘 하고 있습니까?”
“그게, 열심히는 하고 있는데,”
이나가 보기에 그의 행동은 대화를 피하려는 행동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언제까지 그렇게 있을 겁니까?”
박 과장과 대화하며 재혁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알게 하면 안 되지.’
그는 조금 전 회장실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
“회장님, 강재혁 팀장이 찾아왔습니다.”
“들어오라고 해.”
강 회장의 말끝에는 숨길 수 없는 노기가 서려 있었다.
평소에는 불러도 바쁘다며 잘 나타나지도 않던 놈이, 그 정이나인지 뭐인지 하는 여자 일에는 쪼르르 달려온 것이다.
“고얀….”
잠시 후, 문이 벌컥 열리며 재혁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
재혁은 잔뜩 화가난 표정이었다.
강회장은 기가 막혔다. 정작 화난 사람은 본인인데, 저렇게 할아버지를 잡아먹을 듯 노려보는 꼴이라니….
적반하장도 유분수에 똥 싼 놈이 성내는 격이다.
“뭘 그렇게 봐! 일단 앉아.”
재혁은 성큼 걸어가 강 회장의 맞은편에 자리했다.
재혁이 앉자, 강 회장이 불편한 심기를 잔뜩 드러내며 말했다.
“아침부터 웬 난리야.”
“공문 뭡니까?”
“뭐? 공문 뭡니까? 이 자식 말이 왜 이렇게 짧아!”
“네. 블라디보스톡에서 큰 성과를 거둔 직원입니다. 갑작스러운 인사이동은 납득이 되지 않습니다.”
재혁의 태도가 강 회장의 화를 돋우었다.
아침부터 부리나케 찾아온 것도 모자라 계약직 여자를 두둔하는 꼴이라니.
강회장은 재혁의 꼬투리를 잡으며 말했다.
“너, 주주 총회 때까지 회사에서 잡음 나오지 않게 하라고 했지! 너 그여자랑 블라디보스톡 갔다며?!”
“업무상 출장이었습니다. 그게 왜 문제가 되는 거죠?”
“같은 방 썼다며!”
“….”
“거기다가, 유부녀? 너 유리랑 파혼한 것도 그 여자 때문이야?! 할애비에게 반항하는 거야, 뭐야?”
강회장의 말에 재혁은 불쑥 방항기가 치밀었다.
“맞습니다. 반항. 아시면서 뭘 그렇게 화내시죠?”
“너 이 자식! 정말 회사 쫓겨나고 싶어?”
“저, 회사 그만둘까요?”
재혁의 말에 강 회장은 움찔했다.
그는 알고 있었다. 자신이 움찔하는 순간, 조부와 손자 사이의 승부는 끝이 났다는 것을 말이다.
하지만 곧바로 꼬리 내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강 회장은 헛기침을 하며 마지막 자존심을 내세웠다.
“이놈이 할애비를 협박하고!”
“현준이가 말했습니까?”
한 번 더 뜨끔한 강 회장이 급하게 시선을 돌렸다.
재혁의 머릿속에 전날, 사무실을 방문했던 현준의 기분 나쁜 얼굴이 떠올랐다.
“아무튼, 블라디보스톡 설계 변경 건으로 말들이 많아. 더 이상 이사회에 안 좋은 이미지 만들지 말고 조용히 있어!”
재혁은 말 없이 생각에 빠졌다.
이 상황에서 할아버지의 기를 꺾어 이나를 복직시킨다고 하더라도 회사에 떠도는 소문은 막을 수 없을 것이다.
김 선생이라는 사람의 일은 차지하더라도, 자신이 블라디보스톡에서 이나에게 벌인 일 때문에….
그럴 거면
‘차라리 옆에 두자!’
재혁이 생각에 빠져 있는 사이, 강 회장은 불안한 표정으로 재혁을 바라보았다.
저렇게 생각할 때면 재혁은 꼭 예상 못한 돌발 행동들을 벌이고는 했다.
애가 탄 강 회장이 되려 재혁에게 큰소리를 쳤다.
“왜 대답이 없어! 알았어?!”
재혁이 휙 고개를 치켜들자, 강 회장은 순간 깜짝 놀라 자신도 모르게 움찔해 버렸다.
“왜! 왜왜!”
재혁은 그를 바라보다가 의미심장한 목소리로 강회장을 불렀다.
“회장님.”
“왜.”
“썬라이즈 오너로 가겠습니다.”
“뭐?!”
“필드로 나가고 싶어졌습니다. 회장님 말씀대로, 후계자 수업에 필드 경험만큼 좋은 건 없으니까요.”
후계자 수업이라는 말에 강 회장의 눈빛이 번쩍였다.
“진심이냐…?”
“물론이죠. 할.아.버.지.”
재혁은 강 회장을 구워삶을 때 보이는 필살의 미소와 할아버지라는 호칭을 이용해 강 회장을 무너뜨렸다.
팔불출 손주바라기 강 회장은 재혁의 비즈니스 미소에 끔뻑 넘어가 버렸다.
재혁의 아버지가 죽은 후, 강 회장은 손자를 후계자로 만들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하고 있었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재혁은 회사 후계에는 도무지 관심을 보이지 않고 있어서 속을 썩이던 참이었다.
그런 재혁이 회사 일에 전면으로 나선다니, 오히려 쌍수를 들고 환영할 만한 일이었다.
강회장은 애써 관심 없는 척 몸을 살짝 비틀더니 재혁을 떠보듯 물었다.
“그럼, 주주 총회도 참석하는 거지?”
“그럼요.”
재혁의 대답에 강 회장이 몸을 일으키며 물었다.
“진짜야?”
“제가 거짓말하는 거 보셨어요?”
“없지!”
“원하시는대로 하죠.”
“잘생각했다!”
“단 조건이 있습니다.”
“말해 봐.”
“그곳의 일은 전적으로 저에게 맡기셔야 합니다.”
“좋아. 가서 마음껏 능력 발휘해. 네가 그렇게 나온다니, 그 여자 일도 없었던 걸로 해 주마.”
“그 여자는 제가 비서로 채용할 겁니다.”
“뭐?!”
“방금 했던 말 잊지 않으셨죠? 그곳의 일은 전적으로 저에게 맡기신다구요.”
“….”
그 순간 강회장은 머릿속에서 계산기를 두드렸다.
‘그래, 어차피 여자는 금방 질릴 테니까. 적당히 처리하면 되겠지.’
생각을 마친 강 회장이 시원하게 대답했다.
“그래, 약속하마. 네 마음대로 해봐!”
***
“엄마, 나 지방으로 발령 났는데….”
이나는 빨래를 개키고 있는 엄마를 향해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그래? 어디? 멀어?”
“좀 멀어.”
“어딘데?”
“부산.”
“부산?”
“응….”
이나는 엄마가 당연히 반대할 거라 생각하며 말끝을 흐렸다.
그러나 엄마의 반응은 그녀가 생각한 것과 정반대였다.
“좋네, 부산. 그래, 기왕 회사에서 보내 준다는데, 갔다 와.”
“어?”
“같이는 못 가~ 시장 점포 자리를 얼마를 주고 들어갔는데, 그거 본전은 뽑고 가야지. 여기 집 이사 온 지도 얼마 안 됐고.”
“그런데, 멀기도 하고, 찬이도 있고
“찬이를 왜데려가, 누가 보려고? 내가 데리고 있을 테니까. 혼자 갔다 와.”
“에이, 찬이를 어떻게 엄마가 데리고 있어.”
“너 야근하면 어쩌려고? 찬이는 너보다 나랑 있는 게 나아.”
엄마는 흰색 티셔츠의 먼지를 탁탁 털면서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엄마가 너무 쉽게 생각하는 것 같아 이나는 서운한 마음이 들었다. 그녀가 조금 퉁명스럽게 물었다.
“진심이야?”
“진심은 무슨, 그럼 여기서 거짓말 하니?”
“그래도 찬이는….” 할 때, 마침 찬이 눈을 비비며 방에서 나왔다.
“엄마~”
“우리 찬이 깼어? 시끄러웠나 보다.”
이나가 찬에게 손을 벌리자, 찬이 품에 안겼다.
그녀는 찬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엄마에게 말했다.
“그래도 찬이는 내가 데리고 갈게.”
“찬이도 싫어할걸?”
이나는 어림도 없다는 듯 찬에게 물었다.
“찬아. 엄마랑~ 저~어기 가서 살까?”
이나의 예상과 달리 찬은 고민도 하지 않고 거절했다.
“싫어.”
찬이의 대답에 이나는 충격을 받았다.
“싫어? 왜?”
“흠… 비밀이야.”
비밀이라는 찬의 대답에 이나에게 다시 한번 충격을 주었다. 무엇이든 쪼르르 달려와서 재잘거리며 말하던 아이였는데….
이나가 충격에서 헤어나오지 못할 때, 엄마가 ‘요것 봐라?’ 하는 눈빛으로 찬을 보며 말했다.
“여자친구 어딜가겠지 그치, 정찬?”
“여자친구?”
“소희라고 있어.”
“소희? 정말이야, 찬아?”
이나의 물음에 찬이 해맑게 대답했다.
“응!”
“너 몇 살인데 벌써 여자친….”
“우리 뽀뽀도 했어!”
찬의 말에 이나가 화들짝 놀라며 소리쳤다.
“찬아! 뽀뽀는 어른 돼서 하는 거야!”
“왜? 나 엄마랑 할머니랑 다 뽀뽀하는데?”
“엄마랑 할머니는 말고, 여자 친구랑 할 때는!”
“하지만 이미 뽀뽀했는걸?”
“입술에…?”
“응!”
허걱! 이나는 머리에 번개가 치는 기분이었다.
이 쪼그마한 게 누구 닮아서 벌써 여자친구를 만든 걸까?
충격과 공포 속에 머리가 띵했지만 지금은 찬을 설득하는 것이 더 중요한 문제였다.
“하지만 찬아, 엄마랑 안 가면 한~~참 동안 엄마 못 보는데? 괜찮아?”
“괜찮아.”
“정말 하안~~~참 동안 못 보는데도 괜찮아?”
“응! 잘 갔다 와, 엄마!”
찬에게 당한 첫 배신에 이나는 완전히 녹다운됐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엄마는 뭐가 그리 좋은지 키득거리며 말했다.
“봐라. 새끼든 놈이든, 남자들은 다 똑같다~ 찬이는 내가 데리고 있을 테니까 내려가. 주말마다 올라오면 되니까. 가서 남자 친구도 좀 사귀고, 그치 찬아?”
“응! 엄마도 남자 친구 만들어서 우리 더블데이트하자!”
“더블데이트? 너 그런 말은 어디서 배웠어?”
“소희가 그랬어! 옆 반 승찬이랑 인주랑 같이 놀이터에서 더블데이트하자고!”
“….”
억지로라도 찬이를 데리고 가야 하나 생각하는 이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