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불어나는 소문 (2)
재혁은 김 선생을 향해 다짜고짜 주먹을 날렸다.
커다란 덩치가 재혁의 주먹을 맞고 바닥에 뒹굴었다.
이나는 충격을 받은 듯 자리에 가만히 서있었다.
재혁이 그녀에게 다가서며 걱정스러운 듯 물었다.
“괜찮습니까?”
“….”
“회사 팀장?”
깜짝 놀란 듯한 김 선생님의 목소리가 들렸다.
재혁은 혐오스러운 눈빛으로 그를 보며 말했다.
“당장 내 눈앞에서 사라져.”
하지만 김 선생은 사랑에 배신당한 남자처럼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설마설마했는데… 둘이 그렇고 그런 거였어?”
“맞아. 그렇고 그런 사이야. 죽고 싶지 않으면 앞으로 내 여자 앞에 나타나지 마.”
“내가… 내가 얼마나 사랑했는데… 다른 남자를 만나다니.”
“미쳤군.”
갑자기 김 선생님이 재혁을 향해 달려들었다.
“너야말로 내 이나 씨에게서 떨어져!”
재혁은 이나를 끌어안으며 그를 향해 발을 뻗었다.
퍽-
재혁의 발길질에 김 선생님은 다시 바닥에 처박혔다.
“으….”
그는 분한지 바닥을 주먹으로 치며 소리쳤다.
“사랑한다고! 왜 내 맘을 몰라주는 건데!”
재혁은 분노와 혐오가 섞인 목소리로 김 선생을 향해 말했다.
“오늘 당신 와이프 때문에 이 여자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아나?”
“그래서 사과하러 왔다고!”
“용서받고 싶은 마음에 무턱대고 하는 사과는 사과가 아니고 폭력이다.”
재혁이 분노를 터트리자, 이나가 그의 팔을 잡아끌었다.
“그만 가요.”
주위에는 아파트 주민들이 세 사람을 지켜보고 있었다.
재혁은 하는 수 없이 이나를 부축해 안으로 들어갔다.
홀로 남은 김 선생은 바닥에 누워 고래고래 소리쳤다.
“사랑한다고! 정이나! 사랑한다고!”
그의 목소리가 아파트에 울리며 이나가 들어간 내부에 까지 들려왔다.
화가 난 재혁이 뒤돌아 달려가려는데, 이나가 어지러운 듯 벽에 기대섰다.
“괜찮아요?”
이나는 재혁의 손길을 거부하며 그를 노려보았다.
“왜 나서요? 내 일에?”
“그럼 나보고 지켜만 보라는 겁니까?”
“그래요! 나한테 그런 거지, 팀장님한테 그런 건 아니잖아요!”
“네 일을 어떻게 지켜만 봐!”
“내 일이니까 지켜만 보셨어야죠.”
재혁은 뭔가 더 말하려다가 이내 말을 삼켰다.
지금 상태에서 그녀에게 하는 말들은 모두 상처로 돌아갈 것만 같았다.
“미안하군. 다음부터 조심하지.”
이나는 눈물이 곧 떨어질 것 같은 그렁그렁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다가 휙 돌아섰다.
돌아서는 그녀의 볼을 따라 눈물한 방울이 떨어지는 것이 보였다.
안타까워하는 재혁을 자리에 두고, 이나는 계단을 올라갔다.
그와 함께 엘리베이터에 타는 것이 죽기보다 싫었다.
계단을 올라가며 눈가에 맺혀있던 눈물들이 주루륵 흘러내렸다.
그녀는 소매로 눈물을 닦으며 계속해서 계단을 올랐다.
그녀에게는 너무나 버겁고 힘든 하루였다.
차라리 하루 종일 계단을 오르는 것이 덜 힘들 것만 같았다.
얼마나 올랐을까?
이마에 땀이 흐르고 더 이상은 올라가지 못할 것처럼 다리가 후들거렸다.
그녀는 더 올라가지 못하고 계단에 주저앉았다.
눈물은 아까부터 멈추지 않고 흘러내렸다.
“흑. 흑.”
서글픈 이나의 울음소리가 계단 복도에 울려 퍼졌다.
처음에는 작게 들려오던 울음소리는 점점 더 커졌다.
재혁은 한층 아래에서 그녀를 따라 올라오고 있었다.
이나의 울음소리를 듣고 재혁은 그 자리에 멈춰 섰다.
다가가 안아 주고 싶었지만, 지금은 혼자 있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그녀가 계단에서 울자, 아파트 주민이 화를 내며 복도로 나왔다.
“이 시간에 누가.”
재혁은 밖으로 나온 아파트 주민에게 손을 뻗었다.
“금방 들어가겠습니다.”
아파트 주민은 심각한 상황인 걸 확인하고 조용히 안으로 들어갔다.
이나는 그 자리에서 두 시간을 더 울었고, 재혁은 그녀가 보이지 않는 곳에서 그녀를 지켜 주었다.
***
다음 날 아침, 이나는 어떻게 잠들었는지도 모르게 선잠을 자고 깨어났다.
8시가 넘어가고 있었지만, 출근하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이 상황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어차피 계약직이니까 그냥 그만둬 버릴까? 하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다.
‘그래. 그게 나을지도 몰라.’
그때, 밖에서 엄마가 이나를 불렀다.
“정이나! 회사 안 가? 요즘 얘가 왜 이래?”
엄마의 성화에 이나는 힘겹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난 1년 6개월 동안 정규직이 되기 위해 이를 악물고 버텨 왔다.
그동안 했던 고생을 생각하면 여기서 무너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 버티자, 이나야. 끝까지 버텨.’
이나가 사무실에 나타나자 갑자기 대화가 사라졌다.
복도를 가로질러 자리까지 가는 길, 자신을 따라오는 사람들의 시선에 이나는 숨이 막혀 죽을 것만 같았다.
이런 시선을 견딜 수 없다는 생각에 자리에 멈춰 서는데, 뒤에서 재혁의 목소리가 들렸다.
“뭐 합니까? 안 들어가고.”
이나가 대답없이 돌아보자 재혁이 다시 말했다.
“안 들어갈 거면 좀 나옵시다. 나 들어가게.”
“아니요. 들어가요.”
재혁의 말에 이나는 어쩔 수 없이 다시 발걸음을 뗐다.
자리로 가는 길, 뒤따라 걸어 들어오는 재혁이 왠지 든든하게 느껴졌다.
그녀가 자리에 앉자 재혁은 그대로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자리에 앉아 이나를 빼꼼 보고 있던 박 과장이 이나에게 말을 걸었다.
“정이나 씨… 잠깐 나 좀….”
박 과장이 말끝을 흐리며 그녀를 불렀다.
자리에서 일어나는데, 뒤에 앉아 있는 지영의 코웃음 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이나가 당한 일이 아주 고소한 모양이었다.
이나는 화가 나는 것을 참고 박 과장 앞에 다가섰다.
박 과장은 난처한 듯, 시선을 이리저리 굴리며 말을 운을 뗐다.
“이런 경우는 또 처음이라서, 어디서부터 이야기해야 할지 모르겠네?”
“….”
“그러니까 오해 말고 잘 들어. 회장님 특별 지시로 말이야. 정이나 씨 부서가 호텔 서비스 팀으로 옮겨졌거든…. 왜, 새로 오픈하는 썬라이즈 해운대 호텔 있잖아.”
“….”
이나는 말문이 막혔다. 본사 사무직에서 갑자기 호텔 서비스직으로의 이동이라니. 그것도 서울도 아닌 부산으로, 이것은 그만두라는 말과 다를 바가 없었다.
박과장 역시 말도 안 되는 인사라는 것을 아는지 난처하다는 듯 말을 이었다.
“어떻게 들어갔는지 모르겠지만, 어제 일, 회장님 귀에 들어간 모양이야. 회사에 그런 남사스러운 일이 있으면 되냐시면서 노발대발하셨다 그러더라구. 그런데 계약 기간은 아직 좀 남아 있고 하니까. 아씨, 나도 모르겠다. 아무튼 그래.”
이나는 눈앞이 깜깜해졌다. 블라디보스토크 일을 잘 마쳤으니까 혹시 정직원으로 전환되지는 않을까 하는 희망을 품었었는데… 이건 가혹해도 너무 가혹한 처사였다.
순식간에 차오른 눈물에 시야가 흐려졌다.
급기야는 눈물 한 방울이 눈치 없이 뚝 하고 떨어지고 말았다.
당황한 이나가 얼굴을 돌리자, 박 과장은 안쓰럽다는 듯 그녀에게 휴지를 건네며 말했다.
“에휴…. 내가 정이나 씨 생각해서 하는 말인데, 거기 가느니 그냥 그만두는 게 나을 것 같아. 그래도 1년 넘게 일했으니까 퇴직금도 조금 나올 거고, 실업 급여도 탈 수 있게 배려해 줄 테니까….”
자신이 벌이지도 않은 일로 인해 당하는 부당한 처사가 사무치게 억울했다. 그리고 그것보다 더 억울한 것은,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녀는 계약직이니까.
그녀는 깊은 한숨으로 눈물을 삼킨 후 대답했다.
“생각해 보겠습니다.”
“그래, 잘 생각해 봐.”
이나가 눈물을 참고 뒤돌아서자, 그녀를 보고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게 눈 감추듯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녀는 뚜벅뚜벅 걸어와 자리에 앉았다.
뒤에서 지영의 들으라는 듯한 말이 들렸다.
“그러게, 왜 불륜을 저질러서. 쯧.”
그 말을 들은 이나의 속에 참을 수 없는 불이 일었다.
내가 대체 뭘 잘못했는데 이렇게까지 하는 걸까?
기왕 이렇게 된 거, 한번 제대로 뒤엎어 버리자는 생각이 들었다.
이나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자 의자가 와당탕 소리를 내며 넘어졌다.
사무실 사람들이 일순간 긴장했다.
지영 역시 이나가 일어나는 것을 느꼈는지, 긴장하며 그녀를 향해 뒤돌아 앉았다.
이나가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지영을 향해 휙 뒤도는데, 갑자기 팀장실 방문이 벌컥 열렸다.
쾅-
얼마나 세게 열었는지 사무실이 울릴 정도로 큰 소리가 났다.
재혁이 성큼성큼 사무실을 가로질러 다가왔다.
이나는 점점 다가오는 재혁의 표정을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은 마치 악마의 모습 같았다.
그렇게 그는 이나를 지나쳐 그대로 사무실을 빠져나갔다.
마치 누군가와 결판을 내러 가는 듯이.
***
재혁이 나간 후, 이나는 자리에 앉아 앞으로 벌어질 일들에 대해 생각했다.
갑자기 회사를 나간다고 생각하니 앞길이 막막해 눈앞이 캄캄해지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무턱대고 해운대 호텔로 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정직원이 될 수 있다는 희망이 있다면 모를까….
‘그래, 그만둬야 한다면 빨리 그만두자….’
결심을 한 이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박 과장의 자리로 갔다.
“저, 과장님.”
“어, 이나 씨.”
“저, 그만두겠습니다.”
이나의 말에 박 과장은 안타까운 척 말했다.
“아, 그럴래? 그간 고생했어.”
계약직 직원이었기에 사표도 없이, 그냥 말 한마디로 퇴사가 결정되었다.
1년 6개월의 직장 생활이 허무하게 끝나는 순간이었다.
“그럼 가 보겠습니다.”
“그래, 내가 팀장님께 말씀드릴 테니까. 오늘은 빨리 퇴근해.”
박 과장의 말에서 껄끄러워하는 뉘앙스가 느껴졌다.
기분은 좋지 않았지만, 이나 역시 최대한 일찍 퇴근하는 것이 좋을 거 같아서 담담하게 네, 하고 대답하고는 돌아섰다.
사무실 직원 모두 이나의 말을 들었지만, 누구도 다가와서 그녀를 만류하거나 위로의 말을 전하지 않았다.
절로 나오는 한숨을 내뱉고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일이 이렇게 되니, 억울함보다 차라리 잘됐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이런 대우를 받으며 일을 하는 것은 그녀에게도 좋지 않았으니까.
회사 탕비실에서 꺼내 온 문구류를 빼고 나니 정작 그녀의 짐은 많지 않았다.
여름에 쓰는 휴대용 선풍기와 커피잔, 휴대 전화 충전 케이블이 짐의 전부였다.
그녀가 사용한 물건을 정리하고 있을 때, 박 과장의 놀라는 목소리가 들렸다.
“뭐야, 이거?!”
깜짝 놀란 박과장은 이나를 보고 있었다.
“이나 씨, 잠깐 일루 좀.”
박과장이 다급하게 이나를 불렀다.
이나는 의아해하며 그에게 다가갔다.
“왜 그러시죠?”
박 과장이 방금 도착한 공문을 내밀었다.
“뭐야, 낮에 내려온 공문이 잘못됐다는데? 해운대로 가는 건 똑같은데 내용이 좀 다르네. 읽어 봐.”
박 과장이 내민 서류는 인사팀에서 온 공문이었다.
인사 발령
발령처 : 해운대 썬라이즈 호텔 비서실
내용 : 계약 기간을 1년 연장하며 계약 종료 후 정직원으로 전환된다.
*장거리 파견을 고려하여, 회사에서 사택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