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입술의 여운
이나는 평소보다 이른 시간에 눈을 떴다.
시계를 보니 알람이 울리기까지 30분이나 남은 시간. 잠자리가 불편했던 모양이다.
혹시라도 재혁과 마주쳤을 때 일어나자마자 거울로 상태를 확인했다. 대충 얼굴 상태를 정리한 뒤, 문을 살짝 열어 재혁의 방을 바라보았다.
재혁의 방에서는 아무런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아직 깨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가 일어나지 않은 것이 확인되자 그녀는 서둘러 거실에 있는 화장실로 향했다.
까치발을 들고 조심스럽게 다가가 문꼬리를 잡았다.
그런데 그때, 벌컥 문이 열렸다.
“엄맛!”
깜짝 놀라 소리친 이나의 눈에 상의를 탈의한 재혁의 모습이 보였다.
하얗게 오른 수증기 사이로 재혁의 가슴 근육이 꿈틀거리는 듯 했다.
“헉!”
머릿속이 하얗게 변해버린 이나가 석상처럼 자리에 굳어 있는 사이, 재혁은 심드렁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뭘 그렇게 봅니까?”
“죄송해요!!”
이나는 있는 힘껏 화장실 문을 닫고 방 안으로 들어갔다.
두근- 두근-
심장이 빠르게 뛰고 있었다.
이나가 방문을 등지고 서 있는데, 거실에서 재혁이 지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살그머니 문을 열고 밖을 보니 재혁은 방 안으로 들어가고 없었다.
이나가 슬그머니 눈치를 보며 화장실로 다시 향할 때, 재혁의 방문이 벌컥 열렸다.
그녀는 덜컹 열리는 소리에 심장을 부여잡으며 멈춰 섰다.
“화장실 쓸 때는 노크 좀 합시다.”
이나가 대답하기도 전에 재혁의 방문이 닫혔다.
“후.”
그녀는 한숨을 푹 내쉬며 다시 화장실로 들어갔다.
앞으로의 일정이 쉽지만은 않을 것 같다는 예감이 이나를 엄습했다.
***
이나와 재혁은 아침 일찍 블라디보스토크 공무원을 찾았다.
그는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두둑한 서류 더미를 가리키며 말했다.
“<시장님께서도 아주 긍정적으로 검토하고 계십니다. 몇 가지 법적인 절차만 끝나면 허가가 떨어질 겁니다.>”
재혁은 비굴하지는 않으면서도 감사의 마음을 가득 담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감사합니다. 블라디보스톡에서 보여 주신 우정, 마음 깊이 기억하겠습니다.>”
“<책정해 주신 부지 보상 금액이 커서 일이 쉽게 진행됐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네, 말씀해 주시죠.>”
“<부지 정중앙에 90세 노인이 살고 있는데, 집 팔기를 거부하고 있어요. 워낙 완강한 상태여서 시에서는 더 이상 손쓸 수 없는 상태입니다. 문제는, 이번 달 내에 호텔 부지 확보가 되지 않으면 허가가 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군요. 저희가 한번 찾아뵙도록 하죠.>”
“<그러는 게 좋겠습니다. 아무래도 사업자가 같은 민족이라는 것을 알면 마음이 풀릴 수도 있겠죠.>”
“<같은 민족이요?>”
“<그렇습니다. 그 사람은 일본 강점기에 연해주로 넘어온 한국계 러시아인입니다.>”
***
북한, 중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연해주 지역에는 일제의 강압을 피해 이주한 조선인들이 많이 살고 있었다.
역사의 아픔 때문에 삶의 터전을 잃고 타국에서 평생을 살아온 사람들.
공무원의 안내로 도착한 곳은 붉은 지붕의 작은 집이었다.
신축 건물들 사이에 홀로 서 있는 작은 벽돌집이었는데, 그 모습은 마치 영화에 등장하는 풍선 집 같았다.
“<100년도 더 된 건물인데, 저 집 주인 때문에 여태 있었다고 하더군요. 아주 성미가 고약한 노인입니다. 조심하세요.>”
녹이 잔뜩 슬어 있는 두꺼운 철문에는 갈매기 모양의 손잡이가 달려 있었다.
이나가 손잡이 모양이 익숙하다는 생각을 할 때, 재혁이 문을 두드렸다.
“<계십니까.>”
한참을 기다려 봤지만, 안에서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선생님, 한국에서 왔습니다. 계십니까.>”
이번에도 재혁의 말은 공허하게 울려 퍼졌다.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두드려 보자는 생각으로 문을 두드리려는데, 삐걱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그리고 작은 문틈으로 백발의 노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경계심 가득한 눈으로 재혁을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한국말로 물었다.
“한국에서 왔다고?”
“네, 어르신. 저희는.”
“들어와.”
노인은 재혁의 말을 다 듣기도 전에 안으로 들어갔다.
집 안은 어둠에 잠겨 있었다. 불빛이라고는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정오의 태양 빛이 전부였는데, 그마저도 높이 솟아 있는 빌딩 외벽에 반사된 빛이어서 오히려 집 안의 분위기를 음침하게 만들고 있었다.
벽면에는 오래된 흑백 사진들이 여기저기 붙어 있었다. 아마 노인의 젊은 시절 모습인 듯했다.
개중 한 사진이 이나의 눈길을 끌었다. 프로펠러 비행기 앞에 선 두 명의 군인을 찍은 사진이었다.
‘어디서 본 거 같은데….’
이나가 사진을 보며 생각할 때, 노인이 방금 우린 홍차를 내왔다.
지팡이에 몸을 의지한 채 테이블을 돌아간 노인은 힘겹게 두 사람의 맞은편에 앉았다.
아직 경계가 풀리지 않은 노인의 눈빛이 두 사람을 훑었다. 그 눈빛은 침략자를 바라보는 원주민의 눈빛 같아서 이나는 께름칙한 기분이 들었다.
잠시 후, 노인이 조선말과 러시아어가 뒤섞인 말로 두 사람에게 물었다.
“<이 먼 곳까지 어쩐 일로 오셨소?>”
표정과 달리 의외로 온화한 말투였다.
공무원에게 들은 것과 다르다는 생각에 재혁은 조금 마음이 놓였다.
생각보다 일이 수월할 수도 있겠다고 생각하며 말을 꺼냈다.
“<처음 뵙겠습니다. 어르신, 저희는 명성 그룹에서 나왔습니다.>”
“<명성 그룹?>”
“<네, 얼마 전에 시청에서 제안했던 호텔 부지 관련해서,>”
재혁의 입에서 호텔부지라는 단어가 나오는 순간 테이블 위에 놓여있던 홍차가 재혁의 얼굴로 날아들었다.
재혁이 재빠르게 반응했으니 망정이지, 하마터면 큰일 날 뻔한 상황이었다.
이후 방 안의 이런저런 물건들이 두 사람을 향해 날아오기 시작했다.
테이블 위에 올려 둔 먼지 쌓인 성경책과 지포 라이터, 이나 앞에 놓인 홍차 잔은 물론이고 심지어 지팡이도 허공을 가르며 날아왔다.
“<잠깐, 얘기 좀 들어 보시죠.>”
재혁이 멀찍이 물러나며 소리쳤지만, 노인은 죽일 듯 노려보며 손에 집히는 것들을 닥치는 대로 던질 뿐이었다.
“<어르신!>”
노인의 손에 김이 모락모락 나는 주전자가 들리자 이나와 재혁은 있는 힘껏 노인의 집을 뛰쳐나왔다.
닫힌 문 뒤로 노인의 분노 서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시는 찾아오지 마!>”
***
4박 5일의 출장 일정 중 하루가 지났다. 남은 3일 안에 노인을 설득하지 않으면 호텔 사업 자체가 어그러질 위기였다.
숙소에 도착한 이나는 노인의 집에서 본 사진과 문고리의 갈매기 모양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분명 어디선가 봤는데….’
그녀가 기억의 조각들을 불러 모으고 있는 사이, 재혁이 그녀에게 말했다.
“내일 다시 한번 접촉해 봅시다. 일단 선물을 준비하는 게 좋겠어요. 좋은 의견 있습니까?”
이나는 재혁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 생각에 빠져 있었다.
“정이나 씨?”
“잠시만요.”
이나를 의아하게 바라보던 재혁은 그녀의 진지한 표정을 보고 잠시 기다려 주었다. 그렇게 기다리기 몇 분 후, 이나가 대단한 발견이라도 한 것처럼 소리쳤다.
“생각났어요!”
“뭐가 말입니까?”
“갈매기요! 어디서 봤는지 생각났어요!”
“갈매기?”
이나는 급하게 노트북을 꺼내와 무언가 검색했다.
“이거예요!”
노트북 화면에는 독립군에 관련된 기사가 보였다.
“이게 뭐 어떻다는 겁니까?”
영문을 모르겠다는 재혁의 말에 이나가 다시한 번 잘 보라는 듯 소리쳤다.
“이 사진, 그 집 벽면에 걸려 있었어요.”
이나의 말에 재혁은 사진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낡은 프로펠러 비행기 앞에서 환하게 웃고 있는 두 청년.
유심히 기억을 떠올리자, 어렴풋한 기억으로 노인의 집 벽면에 걸려있던 사진이 떠올랐다.
“이건?”
“맞아요. 이 사진 속의 남자가 분명 그 노인분 일 거예요.”
재혁이 사진으로 시선을 돌리자 이나가 말을 이었다.
“이분… 죽은 동료를 기다리고 있는지도 몰라요….”
***
잃어버린 갈매기.
기사의 내용은 항일운동 당시 실종되었던 김중사의 시신을 찾았다는 내용과 함께 발굴된 그의 유품이 손녀인 김미숙 여사에게 전달되었다는 내용이었다.
기사 중간에는 항일 운동 당시 연해주 인근에 독립군의 비밀기지가 많았다는 내용을 소개하며 할아버지의 집을 찍은 사진이 실려 있었다.
출장을 오기 전, 블라디보스톡에 대해 이것저것 조사하던 이나의 기억 속에 이 기사가 남아 있었던 것이다.
늦은 밤, 재혁은 잠에서 깨기 위해 세수를 하고 나왔다.
노인을 설득하기 위한 마지막 계획을 오늘 밤 안에 마무리해야 했다.
그가 화장실에 나왔을 때, 테이블 위에 엎드려 있는 이나의 모습이 보였다.
서류를 보다가 그대로 잠들어 버린 것 같았다.
시간을 보니 새벽 3시가 넘은 상황.
노인을 찾아간 후, 벌써 이틀이 지났다. 그리고 지난 이틀 동안 할 수 있는 일은 최대한 끝냈다.
오늘 새벽, 마지막 작업을 마치고 나면 이제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계획대로 흘러가기를 바라는 것뿐이었다.
재혁은 방에서 가벼운 담요를 꺼내 와서 이나의 어깨 위에 덮어 주었다.
가까이 다가가니 이나의 숨소리가 들렸다. 아이같이 부드러운 숨소리였다.
그 모습을 보는 재혁의 얼굴에는 기분 좋은 미소가 걸려 있었다. 함께한 이틀 동안 그녀에 대해 참 많은 것을 알았다.
눈을 보고 대화할 때 어색하면 꼭 인중 쪽을 보는 것, 앉아 있을 때는 꼭 오른쪽 다리와 왼쪽 다리를 번갈아 꼬고 앉는 것 등….
‘나쁘지 않았어.’
그때 이나가 꿈을 꾸는지 ‘끄응.’ 소리를 내며 입술을 달싹거렸다.
그 순간, 그의 눈에 또다시 이나의 입술이 보였다.
그녀의 입술은 피곤한 중에도 생기를 잃지 않고 붉은색을 띠고 있었다.
티는 내지 않았지만, 그는 지난 이틀 동안 수많은 위기와 맞닥뜨려야 했다.
밀폐된 공간에 그녀와 함께 있다는 사실은 순간 순간 재혁으로 하여금 극도의 인내심을 불러 일으켰다.
그동안 초인적인 인내심으로 잘 참고 있었는데….
지금 이 순간, 그는 그녀의 입술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심장이 뛰기 시작했고, 재혁의 얼굴은 무언가에 이끌리듯 이나를 향해 움직였다.
그리고, 입술이 닿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