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투룸... 이라고?
며칠 후, 이나는 결국 블라디보스토크로 향하는 비행기 안에 앉아 있었다.
비행기와 함께 몸이 붕 뜨는 순간, 모두가 여행을 실감하며 설렘에 빠져 있을 때, 이나는 불편한 마음으로 멀어지는 활주로를 바라보았다.
그 이유는 바로 옆에 앉아 있는 재혁 때문이었다.
1등 호명이 있은 후, 이나는 화가 나서 재혁의 방을 찾았다.
“무슨 일입니까?
“팀장님. 뭔가 잘못된 것 같습니다.”
이나의 말에 재혁이 비어있는 시험지를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0점짜리 시험지를 냈는데 왜 1등이냐. 이 말입니까?
재혁이 가는 눈을 뜨고 이나를 바라보았다.
이나는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는 인정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네. 빈 시험지를 낸 제가 왜 1등인 거죠?”
“내가 되물어 봅시다. 왜 빈 시험지를 냈습니까? 반항입니까?”
“불공평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문제를 이미 알고 있었으니까요.”
“내 사심이 들어갔다?”
“아니라고 말씀하실 수 있나요?”
“정이나 씨. 혹시 공주병입니까? 아니면 도끼병? 세상의 모든 남자가 당신을 좋아하는 것 같다고 생각하는 거 아닙니까?”
“그런 게 아니라!”
“여기는 회사입니다. 내가 보기에 정이나 씨야말로 사심 때문에 공과 사를 구분 못 하고 있는 걸로 보입니다.”
“제가 사심이 있다구요?”
“빈 시험지를 제출한 이유를 내가 말해볼까요? 나와 블라디보스톡에 가고 싶지 않아서 아닙니까?”
“그게 왜 사심이죠?”
“누군가와 함께하고 싶지 않은 것. 그것 역시 사심입니다. 내 말이 틀렸습니까?”
정곡을 찌르는 재혁의 말에 이나는 뒷말을 삼켰다.
하지만 그녀는 이대로 물러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회사 내에서 더 이상의 잡음을 만들고 싶지 않았다.
이나가 신중한 태도로 말했다.
“내 인정하죠. 저 사심있습니다. 팀장님과 블라디보스톡에 갈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할 때, 재혁이 그녀의 말을 끊었다.
“늦었습니다. 정이나 씨. 시청출입자 명단을 블라디보스톡 측에 이미 제출했습니다.”
“네? 테스트가 방금 끝났는데 공문을 보내셨다구요? 언제요?”
“지금.”
그는 대답과 동시에 마우스를 클릭했다.
“일주일 후 출국입니다. 여권 없으면 만들어 놓으세요.”
“하지만.”
“그만. 더 이상의 항명은 용납하지 않습니다.”
때마침 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더 서 있을 겁니까?”
“….”
그 후, 지난 일주일 동안 이나는 회사직원들의 의심 가득한 눈초리를 견뎌야 했고, 찬이를 설득하기 위해 진땀을 빼야만 했다.
그간의 고생이 떠오르자, 문득 옆에서 태평하게 계약 서류를 살피고 있는 재혁이 미워졌다.
재혁은 갑자기 느껴지는 서늘한 기운에 고개를 돌렸다.
“무슨 일 있습니까?”
어리둥절해 묻는 재혁의 말에, 이나는 쌍심지를 켠 눈을 거두지 않고 말했다.
“아. 니. 요.”
차갑게 고개를 돌리는 이나를 보며, 재혁은 귀엽다는 듯 웃으며 다시 서류를 보는 것에 열중했다.
***
블라디보스토크 공항은 관광객들로 발 디딜 틈 하나 없었다.
생각보다 많은 인파에 놀란 이나를 보며 재혁이 심드렁하게 말했다.
“킹크랩 축제 기간입니다. 일 년 중 관광객이 제일 많을 시기입니다.”
“아.”
“오늘은 스케줄이 없으니 호텔에서 짐부터 풀고, 내일 계약 건 준비합시다.”
“알겠습니다.”
앞서 나가는 재혁의 뒷모습을 보며 이나는 긴장의 끈을 단단히 조였다.
공항을 나가니, 한국에서 만났던 블라디보스토크의 공무원과 애니카가 두 사람을 마중 나와 있었다.
재혁과 공무원이 악수를 하는 동안 이나는 애니카를 향해 고개를 숙여 간단한 수화로 인사했다.
“<잘 지냈어?>”
“<네, 이나도?>”
“<물론이지.>”
애니카와의 인사를 마치고 나자, 공무원이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수화도 할 줄 알았습니까?>”
이나가 능숙한 러시아어로 대답했다.
“<애니카를 만나려고 간단한 걸 배웠어요.>”
“<고맙군요. 자, 오늘은 피곤하실 테니, 숙소까지만 모셔다드리고 내일 아침 다시 오겠습니다.>”
공무원은 뒤에 마련된 검은 승용차로 두 사람을 안내했다.
공항을 출발하자, 블라디보스토크의 아름다운 풍경들이 펼쳐졌다.
하늘이 참 맑았는데, 푸른 하늘 사이에 둥둥 떠다니는 새하얀 구름이 꼭 찰흙을 하늘에 붙여 둔 것처럼 앙증맞아 보였다.
“<너무 아름다워요.>”
이나가 감탄하자, 운전을 하던 공무원은 운이 좋다는 투로 말했다.
“<운이 좋은 겁니다. 일 년 중 이렇게 맑은 날은 얼마 없죠. 아마 일이 잘 되려는 것 같군요.>”
푸른 하늘 아래로 에메랄드빛 바다가 끝도 없이 펼쳐져 있었다.
아름다운 바다를 구경하다 보니 어느새 유럽풍의 건물들이 나타났다. 아시아 속의 유럽이라는 블라디보스톡의 명성을 떠올리며 이나는 그 풍경들을 두 눈에 담았다.
금각교를 건너 도심으로 들어간 이나 일행은 한 호텔 앞에 멈춰 섰다.
이 호텔은 현재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제일 큰 호텔로, 앞으로 지어질 명성 그룹 호텔의 경쟁 상대가 될 곳이기도 했다.
공무원은 함께 짐을 내려 주고 일이 있다며 곧바로 돌아갔다.
공무원이 떠난 후, 두 사람은 체크인을 위해 곧장 호텔 로비로 향했다.
로비로 들어서며 재혁이 말했다.
“잘 봐둬요. 오래 사랑받는 데는 이유가 있는 거니까.”
오래된 철제문과 붉은빛의 카펫은 클래식한 느낌을 주면서도 어딘가 촌스러워 보였다.
이나가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동안, 재혁이 카운터로 성큼 다가가 말을 걸었다.
“<체크인을 하겠습니다.>”
“<성함이요?>”
“<명성 그룹으로 되어 있을 겁니다.>”
“<네, 잠시만요.>”
예약자 명단을 확인한 직원이 웃으며 열쇠를 내밀었다.
“<네, 확인되셨습니다. 본관 건물 708호로 가시면 됩니다.>”
호텔 직원이 내민 열쇠는 하나였다.
재혁은 뭔가 착오가 있을 거라 생각하며 물었다.
“<객실을 두 개로 예약했을 겁니다.>”
“<다시 확인해 보겠습니다.>”
재혁의 말에 컴퓨터 화면을 다시 확인한 직원이 고개를 갸웃하며 대답했다.
“<객실은 하나만 예약하셨네요.>”
“<그럴 리가 없습니다. 분명 방을 두 개 예약했습니다. 다시 확인 부탁드립니다.>”
재혁의 말에 한 번 더 확인한 직원이 단호한 표정으로 말했다.
“<확실합니다.>”
직원은 모니터를 돌려 예약 내역을 확인시켜 주었다.
직원의 말대로, 명성 그룹으로 예약된 방은 하나밖에 없었다.
뒤에서 보고 있던 이나가 이상함을 느끼고 재혁에게 다가왔다.
“뭐 문제가 있나요?”
“방이 하나만 예약되어 있군요.”
“네?!”
“잠시만 기다려요. 본사에 확인해 볼테니.”
휴대 전화를 꺼낸 재혁이 본사에 전화를 걸었다.
전화가 연결 되자 재혁이 심각한 목소리로 말했다.
“블라디보스톡 출장 건, 예약자가 누구입니까.”
이나는 불안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혹시 일부러?’ 하는 생각이 그녀의 머리를 스칠 때, 짜증 가득한 재혁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래서, 방 두 개를 잡으라는 말을 방이 두 개 있는 방으로 착각했다는 겁니까? 지금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는 겁니까?”
재혁의 말에 이나가 놀라 물었다.
“실수한 거래요?”
“하아. 일단 알겠습니다.”
뚝-
전화를 끊은 재혁은 짜증과 당황이 잔뜩 뒤섞여 있는 표정이었다.
“방을 하나 더 구해야겠군요.”
하지만 재혁이 통화하는 사이 몰려든 관광객들로 카운터 앞에는 긴 줄이 늘어서 있었다.
불안감이 몰려왔다. 혹여나 방이 다 떨어지면 어떡하지?
제발 방이 있기를 기도하며 두 사람은 줄의 맨 뒤에 섰다.
30분쯤 기다려 카운터 앞에 다다른 두 사람은 직원을 향해 물었다.
“<방을 하나 더 잡고 싶습니다.>”
직원은 난감하다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죄송하지만, 지금 남아 있는 방이 없습니다.>”
그녀의 말에 이나가 다급하게 말했다.
“<예약 취소된 방도 없을까요?>”
안타깝게도 직원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네, 이번 주 내내 모든 방이 예약되어 있습니다. 축제 기간이라 다른 곳에 가셔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청천벽력같은 소식이었다.
이나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다시 한번 말하려고 할 때, 직원이 단호하게 두 사람을 밀어냈다.
“<하지만,>”
“<죄송합니다. 더 도와 드릴 수가 없네요. 뒤쪽 손님을 도와 드려야 해서 잠시 비켜 주시겠습니까?>”
이나는 절망적인 표정으로 재혁을 바라보았다.
재혁 역시 이나와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
‘진짜 일부러 이런 거 아니야?’
이나는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재혁을 노려보며 객실로 들어갔다.
철컥-
문을 열자 은은한 향초 냄새가 풍겨왔다.
바닥에는 적갈색의 카펫이 객실 전체에 깔려 있었고 그 위로는 짙은 갈색의 목제 가구들이 놓여 있었는데, 고급스럽다기보다는 편안한 인상의 객실이었다.
천천히 방 안을 둘러보던 이나는 방문을 보고 깜짝 놀랐다.
한 방의 문이 반투명의 문이어서 거실에 앉아 있으면 안의 모습이 대략적으로 보였다.
그녀가 난감한 표정으로 문 앞에 서 있는데, 재혁이 자신의 짐을 들고 우측 방으로 들어갔다.
“내가 이 방 쓰죠.”
“….”
이나는 차마 그 방을 쓰겠다는 말은 할 수 없어서 재혁의 말에 따랐다.
그가 먼저 방으로 들어가 불을 켜자 아니나 다를까 재혁의 모습이 모자이크 처리된 것처럼 흐릿하게 나마 보였다.
예상하지 못한 상황들에 이나는 난감했다.
출장 일정은 총 4박 5일. 그 긴 시간을 재혁과 같은 공간에서 지내야 한다는 생각에 벌써부터 숨이 턱 막히는 기분이었다.
“호텔 말고 다른 데라도 알아봐야겠어.”
그녀가 문 앞에 서서 혼잣말을 하는데, 닫힌 유리문에 갑자기 살색이 번졌다.
방 안에 들어간 재혁이 이나가 보고 있다는 사실을 잊은 듯 거침없이 상의 탈의를 한 것이다.
“!!”
놀란 이나가 고개를 돌리기도 전에 재혁이 문틈 사이로 고개를 내밀었다.
“그렇게 계속 보고 있을 겁니까?”
이나는 얼굴이 붉어져서 고개를 돌렸다.
“죄송합니다.”
그녀는 내려 두었던 짐을 들고 남은 방으로 들어갔다.
문 뒤에 등을 대고 서서 이나는 다짐했다.
“꼭… 다른 방을 구해야겠어… 꼭!”
굳게 다짐한 그녀는 마음 한구석에 피어난 일말의 기대감을 애써 무시했다.
밖에서 재혁의 전화 소리가 들렸다. 회사에서 온 전화 같았다.
“네. 얼마를 써도 괜찮고 허름한 곳도 좋으니까 무조건 방 하나 더 잡아야 합니다. 알았습니까?”
그 말에 이나는 묘한 기분을 느꼈다.
그리고 그 뒤에 은밀하게 들린 재혁의 목소리가 그녀의 마음을 더욱 울렁이게 만들었다.
“방 구한 건 나한테만 보고하세요. 정이나 씨는 모르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