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입술, 입술이 보였다.
당황한 듯 굳어 버린 표정, 왠지 달아오른 공기, 그리고 이나를 감싸 안은 자세까지.
누가 보아도 완벽하게 키스 중인 상황. 엄마가 재빠르게 문을 닫았다.
놀란 이나가 문을 잡았다.
“엄마!”
문틈 사이로 엄마가 말했다.
“미안 하던거해.”
“그런거 아니야!”
이나가 문을 확- 잡아 당기자 엄마가 밖으로 튀어나왔다.
재혁은 퍼뜩 정신이 들었는지 엄마를 향해 90도로 고개숙였다.
“안녕하십니까.”
“누구?”
“팀장님!”
이나가 대답하자, 엄마는 재혁을 위아래로 훑어보며 말했다.
“아… 팀장님.”
“처음 뵙겠습니다. 강재혁입니다.”
엄마는 휙 고개를 돌려 이나를 한 번 보고, 다시 재혁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연예인 뺨치게 잘생겼는데다가 회사 팀장이라고? 합격.’
엄마가 재혁에게 말했다.
“나는 없던 샘 치고 하던 거마저 해요.”
말과 함께 엄마가 문 안으로 쏙 들어가 버렸다.
당황한 이나는 얼굴이 새빨게져서 엄마를 따라 들어갔다.
“팀장님 죄송해요. 내일 뵙겠습니다.”
쾅-
이나가 다급하게 집으로 들어가자, 요란스럽던 아파트 복도에 적막이 흘렀다.
재혁은 아쉬운 마음에 그녀의 집을 잠시 바라보다가 돌아섰다.
그의 입술에는 아직 이나의 감촉이 고스란히 맴돌고 있었다.
***
“누군데?”
“팀장님이라니까!”
이나는 엄마를 피해 방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이런 일을 그냥 넘어갈 엄마가 아니었다.
엄마는 이나의 뒤를 따라오며 집요하게 물었다.
“누가 그거 물어? 남자 친구?”
“아니야!”
“그럼 그냥, 가볍게 만나는 그렇고 그런 사이? 요즘 같은 세상에 그것도 나쁘지 않지.”
“엄마!”
“아고 깜짝이야! 애 떨어져!”
“제발, 찬이 듣겠어!”
“찬이 좀 들으면 어때? 니가 바람을 폈니? 생과부가 남자 좀 만나겠다는데.”
“진짜! 그런 거 아니라고요!”
“그런 거 아닌데 문 앞에서 물고 빨고 해? 너 립스틱 다 지워졌어 얘.”
놀란 이나는 입술을 만졌다.
그녀의 입술은 아침에 일어났을 때보다 깨끗한 상태였다.
이나의 행동에 엄마는 두 사람의 관계를 확신했다.
“몇 살이야?”
“몰라.”
“집안은?”
“모른다고.”
“그 사람도 애 있고 그런 거 아니지? 하긴 좀 있으면 어때, 너도.”
“엄맛!”
“아 애 떨어져! 왜 소리를 질러 소리를!”
이나는 찬이의 방문을 슬며시 바라 보았다.
하루 종일 어린이집에 있었던 탓인지 찬이는 금세 잠든 모양이었다.
키스하는 모습을 들킨 이상 무작정 발뺌할 수만도 없는 노릇이었다.
이나는 한숨을 푹 쉬고 엄마에게 일부만 시인했다.
“사귀는 거 아니고, 키스한 거 아니고. 그냥 앞집 살아서 데려다준 거야.”
“앞지입?! 세상에, 우리랑 같이 이사 왔잖아!”
“어… 나도 이사 오고 알았어.”
“난리 났다 얘. 일부러 온게 맞네 맞아.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지 우리 혼수부터 알아보자. 아니지 가자, 가서 인사부터 하자.”
엄마는 다짜고짜 재혁의 집으로 가려했다.
“왜이래! 쫌!”
“놔 봐. 인사만 하고 올게.”
이런 식으로는 도저히 대화가 끝나지 않을 것 같았다. 이나는 하는 수 없이 엄마에게 거짓말을 했다.
“엄마가 나서서 나 싫어하면 어떡해.”
“응?”
“요즘 남자들 그런 거 싫어한단 말이야. 알아 가는 사이야. 이렇게 막 나가면 안 된다고!”
“아. 썸 타는 중?”
이나는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썸 좋지. 그래. 한창 좋을 때지.”
“엄마 제발 부탁인데, 가만히 좀 있어 줘. 내가 알아서 할게. 알았지?”
“걱정 붙들어 매, 날 뭘로 보고. 흠, 밥 한번 해 먹이고 싶은데. 얘, 나중에 뭐 좋아하는지 좀 알아 와. 알았지?”
“그래… 알았어.”
“썸이라니, 그래. 썸부터 타야지.”
이나의 대답에 만족한 듯 엄마는 웃으며 방으로 들어갔다.
엄마가 방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보고 나서야 이나는 자신의 방으로 들어올 수 있었다.
“후.”
그녀는 침대에 앉아 조금 전 상황을 머릿속에 떠올렸다.
그와 입술이 맞닿던 순간의 아찔함에 그녀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김선생님이 벌였던 일은 이미 머릿속에서 사라져 버린 상태였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녀의 입술에도 재혁의 입술의 느낌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
딩동-
갑자기 울린 초인종 소리에, 재혁은 의아해 하며 문을 열었다.
열린 문틈 사이로 이나 엄마의 모습이 보였다.
“어…어머니.”
“뭘 그렇게 놀라고 그래요. 자 이거.”
이나 엄마는 불쑥 접시를 내밀었다.
그 안에는 맛있게 익은 김치 한포기가 들어있었다.
엄마는 푼수처럼 웃으며 자랑을 늘어놓았다.
“이거, 우리 김장김치인데~ 한번 먹어 봐요. 오호호호. 내가 김치 하나는 정말 끝내주게 담그거든. 한번 먹어 보면 우리 집에 장가오고 싶을 거예요. 오호호호.”
“아. 감사합니다.”
재혁이 어색하게 감사를 표할 때, 앞집 문이 열리며 이나가 성난 표정으로 뛰어나왔다.
“엄마!”
그녀는 엄마를 휙- 잡아끌더니 순식간에 집 안으로 사라졌다.
“팀장님 죄송합니다.”
“이거 놔 얘! 사윗감 좀 보겠다는데 왜 이래!”
문 사이로 들리는 이나 엄마의 목소리를 들으며 재혁은 생각했다.
‘오히려 잘 됐을지도?’
***
[이나야! 이나야!]
어디선가 다급하게 그녀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나야! 일어나! 이나야!!]
너무나 달콤한 꿈, 이나는 이 꿈에서 깨어나고 싶지 않았다.
“정이나! 출근해야지!”
엄마의 목소리에 이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녀의 눈 앞에 황당하다는 듯한 엄마의 표정이 보였다.
‘어디지?’
“출근 안 한 지도 몰랐네. 여덟 시야!”
익숙한 방안의 풍경, 그리고 8을 가리키고 있는 시계의 시침.
그렇다는 것은.
“8시?”
깨달음과 함께 이나가 용수철처럼 침대에서 튕겨져 나갔다.
잘못하면 지각을 할 판이었다.
그녀는 최소한의 준비만을 하고 집에서 뛰어나갔다.
머리는 감지 못해 떡이 져 있었고, 기본적인 화장조차 못 해 완전한 민얼굴이었다.
이게 다 그 달콤한 꿈 때문이라고 생각하며 그녀가 대로변에 서자마자 택시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하지만 그녀의 앞을 지나가는 택시들은 전부 손님을 태우고 있었다.
하지만 지성이면 감천이라 했던가, 때마침 지나가던 한 택시가 이나를 지나쳐 멈춰섰다.
그녀는 하늘이 구했다고 생각하며 택시를 향해 달려갔다.
그때, 골목에서 튀어나온 한 남자가 멈춘 택시를 가로챘다.
“저기요!”
이나의 애타는 부름에도 택시는 야속하게 멀어져갔다.
“아!”
그녀의 입에서 절망적인 탄식이 흘러나왔다.
이대로 꼼짝없이 지각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
그런데 그때, 익숙한 차 한 대가 이나의 앞에 멈춰 섰다.
“타요.”
내려가는 차창으로 재혁의 모습이 보였다.
그녀가 습관적으로 거절하려던 그때 재혁이 말했다.
“거절하면 그냥 갑니다.”
“….”
***
회사로 가는 길, 이나는 재혁의 차 보조석에 앉아 있었다.
이나는 백미러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엉겨 붙은 머리에 다리지 않아 구깃구깃한 블라우스, 그리고 화장기 없는 민얼굴까지….
재혁에게는 절대 보이고 싶지 않은 모습이었다.
민망함에 이나는 고개를 완전히 돌린 채로 앉아 있었다.
운전을 하던 재혁이 대뜸 입을 열었다.
“편지 읽어봤습니다.”
“….”
카디건을 돌려줄 때, 안에 짧은 편지를 넣어 두었다. 아무 말도 없어서 안 읽은 줄 알았는데 읽었던 모양이었다.
이나가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어제는 죄송했어요.”
“뭐가 말입니까?”
“엄마가 괜히 오버해서요.”
“김치 맛있더군요. 평생 먹고 싶을 정도였습니다.”
이나는 민망함에 다시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얽굴은 이미 홍당무가 되어 있었다.
이후 어색한 침묵이 찾아왔다. 어젯밤 키스의 여운이 두 사람 사이의 대화를 가로막는 기분이었다.
회사가 보이는 먼 사거리에 와서야 이나가 입을 열었다.
“사거리 전에 세워 주시겠어요?”
재혁은 별말 없이 차를 세웠고 이나가 내렸다.
“감사합니다.”
인사가 끝나기도 전에 차가 출발했다.
이나는 빠르게 멀어지는 그의 차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는 어젯밤의 일은 별로 염두에 두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충동적으로 한 거겠지?’
자신만 혼자 끙끙 앓고 있던 거 같아 분하기도 하고 창피하기도 했다.
그녀는 괜한 기대를 하지 말자며 속으로 다짐했다.
불륜이라는 오해는 풀었지만, 자신에게 아이가 있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었으니까.
회사에 가서는 아무렇지 않게 행동해야겠다고 생각하며 발걸음을 옮겼다.
다행히 지각은 하지 않을 것 같았다.
***
회사에 도착하니 왠지 어수선한 분위기였다.
“무슨 일 있어요?”
이나가 묻자, 박 과장이 팀장실을 바라보며 말했다.
“팀장님이 시험 결과 발표하신데. 이나씨는 러시아어 잘해서 좋겠어?”
“….”
이나는 자신의 시험 결과를 알고 있었기에 별다른 동요 없이 자리에 앉았다.
이런저런 걱정 어린 소리가 들리는 가운데, 지영의 표정이 유독 어두워 보였다.
아마 시험지를 한 장도 채우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잠시 후, 재혁이 종이 한 장을 들고 사무실에 나타났다.
재혁의 등장에 직원들은 잔뜩 긴장했다.
재혁은 무심하게 주변을 둘러보더니 말했다.
“채점 결과, 형편없었습니다. 호명하는 직원들은 본사에서 운영하는 어학 클래스를 수강하세요.”
이렇게까지 말하는데 감히 누가 불만을 표현할 수 있을까? 직원들이 쥐 죽은 듯 조용히 있자 재혁은 결과를 발표했다.
“어학 클래스 수강 인원은 총 다섯 명입니다. 꼴등부터 호명하죠. 장지영 대리.”
재혁의 말에 지영의 표정이 흙빛으로 변했다. 꼴등을 꼴등이라고 말할 줄 몰랐는지, 그녀는 똥 씹은 표정으로 고개를 푹 숙였다.
“김상철 대리, 정동식 대리, 김환철 과장, 그리고 박익준 과장.”
마지막으로 박 과장의 이름이 호명되자, 박 과장 역시 절망적인 표정으로 한숨을 쉬었다.
“대리 이상 상급자들의 어학 실력이 형편없습니다. 상급자로서 모범을 보이세요.”
누구 하나 재혁의 말에 대답하지 않는 가운데 그가 말을 이었다.
“그리고 테스트 1등입니다. 사전에 공지한 대로, 테스트 1등과 이번 블라디보스톡 출장을 갈 예정입니다. 1등은,”
이나는 마음을 놓고 있었다. 1등일 리는 없었다. 그녀는 분명 빈 시험지를 제출했으니까.
“정이나 사원.”
호명과 동시에 이나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럴 리가 없어요!”
갑작스러운 행동에 직원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이나를 바라보았다.
“무슨 말입니까?”
“그게. 제가 1등일 리가 없다고….”
“이유라도 있습니까?”
“다른 분들이 충분히 잘하셨을 거라….”
너무 관심을 끌어 버린 탓에 이나는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재혁은 이나의 말을 모른 척하며 말했다.
“자신을 더 믿으세요. 정이나 사원. 일부러 꼴등을 하려고 한 것도 아닐 텐데 왜 그렇게 주눅 들어 있습니까?”
이나의 표정이 굳어졌다.
재혁은 분명 자신을 비꼬고 있었다.
“아무튼 축하합니다. 정이나 사원.”
재혁이 이나에게 손을 내밀었고, 이나는 마지못해 그의 손을 잡았다.
그런 두 사람의 모습을 지영이 의심 가득한 눈초리로 바라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