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늑대 앞에 선 토끼
퇴근 후 이나는 찬의 유치원으로 향했다.
엄마의 계모임 때문에 찬이를 유치원 종일반에 맡겨 둔 상태였다. 요즘 들어 엄마의 모임이 많아졌다는 생각을 하며, 그녀는 퇴근길 빽빽한 지하철에 몸을 실었다.
숨 막히는 지하철 안에서 이나는 연신 시간을 확인했다. 오늘도 문제는 지영이었다. 퇴근 30분 전, 지영이 팀 브리핑 서류라며 일을 맡기는 바람에 퇴근 시간이 늦어졌다.
미리 늦을 것 같다고 전화를 하니, 원장님은 걱정 말라며 이렇게 말했다.
‘걱정 마세요. 김 선생님이 찬이랑 있겠다고 하네요.’
원장 선생님의 말이 이나의 마음을 더 급하게 만들었다.
계속되는 김 선생님의 도움이 그녀에게 부담으로 쌓이고 있었다.
유치원 입구에 도착하자, 창문으로 고개를 내밀고 있던 찬이 손을 흔들며 이나를 불렀다.
“엄마!!”
우당탕 소리를 내며 달려오는 찬이를 본 순간 이나의 얼굴에는 환한 미소가 피었다.
“우리 아들, 오래 기다렸지?”
“아니! 선생님하고 로보트 놀이 했어.”
“그랬어? 우리 찬이 재미있었겠네.”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는 동안 김선생님이 다가왔다. 그를 본 이나가 자리에서 일어나 깍듯하게 인사했다.
“감사합니다.”
이나의 인사에 김 선생은 특유의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별말씀을요. 제 일인데요.”
그는 곰처럼 커다란 덩치에 눈꼬리가 아래로 쳐져, 인상이 선한 사람이었다.
자신에게 호감을 보이지만 않았다면 좋은 선생님이었을 텐데….
이나는 서둘러 자리를 뜨기 위해 찬에게 인사를 시켰다.
“자, 찬아 가자. 선생님한테 인사해야지.”
“선생님, 수고 많았습니다.”
“인사가 그게 뭐야. 안녕히 계세요, 해야지.”
“선생님, 안녕히 계세요.”
“저, 찬이 어머니. 제 차 타고 가시죠.”
김 선생님의 말에 이나는 불편한 기색으로 대답했다.
“괜찮아요.”
평소였으면 물러났을 김 선생님은 오늘은 어쩐 일인지 포기하지 않았다.
“이제 찬이도 얼마 안 남았지 않습니까. 제가 많이 아쉬워서 그렇습니다.”
그의 간절한 부탁에도 이나는 냉정하게 돌아섰다.
“말씀은 고맙습니다. 마음만 받을게요.”
그때, 찬이 김 선생님 차 앞에 붙어 있는 장난감을 보더니 소리쳤다.
“우와! 옥토넛! 엄마 옥토넛이다! 나 구경할래!”
김 선생은 때는 이때다 찬을 돌아보며 말했다.
“찬아, 이거 보고 싶어?”
“네!”
“찬아!”
이나가 말릴 새도 없이 김 선생님이 차 문을 열어주었고 찬이가 앞 좌석에 올라탔다.
“엄마! 옥토넛이야!”
당황한 이나가 찬이를 데려오려는데 김 선생님이 이나에게 간곡하게 말했다.
“그냥 데려다만 드릴게요. 부탁드립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냉정한 이나도 거절하기가 어려웠다. 이나는 마지못해 허락했다.
“알았습니다.”
“그럼, 여기서 잠시만 기다리세요! 유치원 문단속 좀 하고 오겠습니다!”
***
“아기 상어~ 뚜루뚜두두~ 귀여운~ 뚜루뚜두두~”
집으로 가는 차 안, 김 선생과 찬이는 유치원에서 부른 노래를 부르며 가고 있었다.
그 모습이 어쩐지 유치원 선생님이 아닌 아빠처럼 구는 것 같아 이나는 마음이 불편했다.
“찬아. 선생님 운전하시잖아. 그만 부를까?”
“괜찮습니다, 이나 씨. 찬이랑 노는 건 하나도 안 힘들거든요. 그치, 찬?”
“응! 선땜님이랑 노는 거 재밌어!”
김 선생님이 이나 씨라고 부르며 은근슬쩍 친밀감을 표시했다.
이나는 그의 말에 급격한 거부감을 느꼈다.
이런 이나의 마음을 모르는지, 김 선생님은 계속해서 친근하게 굴었다.
“아. 배고프네요. 이나 씨, 햄버거 드시겠습니까? 찬아? 햄버거 어때?”
“햄버거 쪼아!”
찬이 신나게 대답했지만, 거절하는 이나의 목소리는 차가웠다.
“아니요. 그냥 집으로 가주세요.”
“아… 그게 아니고 시장하실까 봐.”
“괜찮습니다. 김 선생님.”
“네….”
“찬이 햄버거 먹고 시뿐데….”
“참아, 찬.”
이나의 단호한 말에 찬도 이상함을 느꼈는지, 힝- 소리를 내고는 입을 다물었다.
김 선생의 차가 아파트 입구에 멈춰 서자 이나와 찬이 내렸다. 이나는 운전석에서 내리는 김선생님에게 완벽하게 선을 긋겠다는 듯 깍듯하게 인사하고 돌아섰다.
“감사했습니다. 찬아, 인사.”
“선땜님, 안녕히 가세요.”
김선생님은 인사를 받는둥 마는둥하며 우물쭈물하고 있었다.
할 말이 있는 눈치였다.
불길한 예감에 이나가 찬이를 데리고 급하게 돌아섰다.
등뒤로 트렁크 여닫는 소리가 들리더니 김선생님이 이나를 불렀다.
“이나 씨!”
김 선생의 부름에 돌아선 이나는 깜짝 놀랐다. 꽃을 든 김 선생이 결연한 표정으로 그녀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이나 씨, 할 말이 있습니다.”
“뭐 하시는 거죠?”
이나는 당황한 나머지 그에게서 뒷걸음질쳤다.
다가오는 김 선생의 모습을 보고 있던 찬이가 말했다.
“선생님, 우리 엄마 좋아해요?”
“그래, 찬아. 선생님이 엄마 좋아해.”
그 모습을 본 이나는 정신이 퍼뜩 들었다.
그녀는 찬이의 손을 잡아 채며 돌아서려 했다.
“찬아, 가자.”
“이나 씨, 제 말 좀 들어 보세요!”
다급한 긴선생님이 이나의 어깨를 잡아 끌었다.
“놔요!”
이나가 소리치며 돌아서는데, 그녀의 옆으로 한 남자가 무심히 지나갔다.
남자의 얼굴을 본 이나는 그 자리에서 굳어버렸다.
그 남자는 다름 아닌 재혁이었다.
재혁은 이나를 본체만체하며 아파트 안으로 들어갔다.
등 뒤에서 털썩- 하는 소리가 들렸다. 설마 하며 돌아보니 김 선생님이 무릎을 꿇은 채로 이나에게 꽃을 내밀고 있었다.
“이나 씨! 좋아합니다! 아니 사랑합니다.”
끔찍한 상황이었다.
이나는 찬의 손을 잡고 무작정 아파트 안으로 들어갔다.
김 선생님의 행동이 도저히 이해되지 않았다.
어쩌자고 아이 앞에서 이런 짓을 벌이는 걸까?
그때, 등 뒤에서 김 선생의 절규에 가까운 외침이 들려왔다.
“사랑합니다! 이나 씨!”
엘리베이터 앞에는 재혁이 서 있었다. 이나가 옆에 서자 어색한 적막이 흘렀다.
“엄마~ 선땜님이 엄마 좋아한대~”
천진난만한 찬의 말이 이나의 마음을 더욱 무겁게 했다.
“응~ 당연하지, 친구끼리는 원래 좋아하는 거야.”
“엄마 선땜님이랑 친구야?”
“어….”
이나는 재혁의 눈치를 보며 대답했다. 하지만 재혁은 별로 관심이 없는 것 같았다.
때마침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고, 이나는 찬을 데리고 냉큼 올라탔다. 재혁이 무표정하게 서서 올라타는데, 문 쪽에서 김 선생이 달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이나 씨!”
그는 포기할 생각이 없는 듯 했다.
놀란 이나가 어쩔 줄 몰라 하는 찰나, 김 선생이 도착하기 전에 엘리베이터 문이 닫혔다.
“이나 씨!”
닫힌 문 뒤로 김 선생이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작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이나의 눈에 닫힘 버튼을 누르고 있는 재혁의 손이 보였다.
“동료 아저씨! 안녕하세요.”
재혁을 본 찬이 다시 해맑게 인사했다.
재혁은 저번과 같은 따뜻한 미소를 지으며 찬에게 인사했다.
“그래, 안녕.”
찬은 아까 못 먹은 햄버거가 못내 아쉬웠는지 재혁에게 물었다.
“아저씨, 햄버거 좋아해요? 오늘 우리 햄버거 먹으려고 했어요.”
“찬아!”
“좋아해. 아저씨도.”
이나가 찬이를 나무랐지만, 재혁은 아무렇지 않게 대답해 주었다.
엘리베이터가 집으로 올라가는 동안, 이나는 혼란스러운 표정을 감출 수 없었다.
이런 상황을 만들지 않기 위해 노력했지만, 최악의 상황에서 맞이해 버렸다.
문이 열리자마자 찬이 집으로 뛰어 들어갔다.
“할머니 다녀왔습니다!”
이나 역시 집 안으로 들어가려는데 뒤에서 재혁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 사람 뭡니까?”
남편이 아니었냐는 물음이었다.
“찬이 선생님이요.”
이나가 대답하고 들어가려는데 재혁이 다시 물었다.
“괜찮습니까?”
“….”
이번에는 쉽게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잠시 서서 고민하던 이나가 대답했다.
“네. 감사해요.”
대답을 들은 재혁이 자신의 집 쪽으로 돌아섰다.
등 뒤로 이나의 목소리가 들렸다.
“싱글 맘이에요.”
이번에는 재혁이 자리에 멈췄다.
“팀장님을 불륜 상대로 보거나 한 건 아니니까, 오해하지 않으셨으면 해요.”
재혁은 자신이 안도하고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
불륜 상대가 아니라는 말 때문이 아니었다.
그녀가 싱글 맘이라는 사실이, 그러니까 그녀에게 남편이 없다는 사실에 그의 마음이 요동치고 있었다.
어떤 충동이었을까? 재혁은 순간적으로 손을 뻗어 열려 있던 이나 집의 현관문을 닫아 버렸다.
의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이나는 문과 재혁 사이에 갇힌 모양이 되었다.
재혁의 입에서 낮은 쇳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런 건 진작말했어야지.”
“들으려고 안했잖아요.”
이나는 꿋꿋한 척했지만 늑대 앞에 선 토끼처럼 몸을 옴짝달싹할 수가 없었다.
문득 느껴지는 그의 눈빛은 자신의 입술에 닿아 있었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그녀의 시선에도 재혁의 입술이 보였다.
그의 입술은 남자답지 않게 진한 붉은색이었다.
팽팽한 긴장감이 맴도는 사이, 재혁의 굵은 목젖이 위아래로 움직였다. 그 목젖의 움직임에 이나는 마음이 울렁거렸다.
당장이라도 그의 얼굴이 다가올 것만 같아 마음이 조마조마했다.
심장소리가 들렸다.
이번에는 누구의 심장소리인지 분명하게 알 수 있었다.
재혁의 심장이 그녀를 향해 맹렬하게 뛰고 있었다.
마치 지금 입술을 머금지 않으면 터져버릴 것처럼 말이다.
“왜. 그러세요.”
개미가 기어갈 듯한 목소리로 이나가 말하는 순간.
그의 입술이 이나의 입술을 머금었다.
갑작스러운 키스에 이나는 눈을 질끈 감아 버렸다.
벽을 디딘 두 팔 안은 감옥이 되어 옴짝달싹조차 할 수 없었다.
그의 입술은 아기의 살결처럼 부드럽고, 촉촉했다.
거칠게 다가온 그의 입술은 천천히 와 닿아 백조가 수면 위를 떠가는 것처럼 조심스럽게 그녀의 입술 위를 유영했다.
미세한 면적이 닿고 떨어질 때마다 두 사람의 입술에는 짜릿한 전기들이 톡톡 튀다가 모래알처럼 바스라졌다.
재혁은 아이스크림의 겉면을 핥듯이 그녀의 입술을 가볍게 핥았다. 그녀의 입술에서는 단맛이 났다. 가벼운 키스로는 그녀를 향한 욕구가 충족되지 않았다.
그는 숨을 몰아쉬며 그녀의 입술을 완전히 머금으려 했다.
그런데 그때, 띠리리-
등 뒤에서 문이 열렸다.
“뭐 해, 안 들어오고? 헉!”
그 순간, 이나의 엄마와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