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 테스트 (7/72)

7. 테스트

“블라디보스톡 건 봤다. 좋던데.”

“네, 조만간 현장 한번 가 볼 예정입니다. 절차 마무리되면 바로 호텔 부지 협상 들어가야 하니까요.”

강 회장의 말에 차창 밖을 바라보던 재혁이 고개를 돌려 대답했다.

그는 지금 강 회장과 함께 부산 출장을 가는 길이었다.

재혁의 심란한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강 회장이 말을 이었다.

“좀 비싸게 사더라도 한 번에 마무리해. 부지 확보가 안 되면 외국인이라고 시에서 갑자기 취소할 수도 있어.”

“네, 미리 접촉할 수 있는 사람들은 유선상으로 접촉해 보고 있습니다.”

“그래. 블라디보스톡 건까지 마무리되면 바로 현장으로 가거라.”

“….”

“오늘 해운대에 그냥 가는 거 아니야. 1년쯤 맡아서 운영해 봐. 아직 준비가 안 됐다느니, 그런 말은 하지 말고.”

“예.”

“당분간 구설수에 오를 일은 하지 말아라. 작은 꼬투리 하나만 있어도 네 작은아버지가 맹수처럼 물고 늘어질 게다.”

“걱정 마세요. 그럴 일 없을 테니까요.”

재혁은 다시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강 회장의 말에 재혁은 이나를 떠올렸다.

유부녀와 불륜에 빠지는 것도 구설수일까? 라는 생각을 하면서….

***

호텔들의 화려한 불빛이 바다를 수놓은 해운대 앞바다. 그중 가장 명당이라고 불리는 자리에 명성 그룹의 썬라이즈 호텔이 우뚝 솟아 있었다.

오늘은 개장을 앞두고, 명성 그룹 관계자들이 모여 호텔의 운영 계획을 수립하는 날이었다. 

하지만 그건 명목이었고, 실상은 임원들의 조찬 파티였다.

재혁은 바쁘다는 핑계로 이번 파티에도 빠질 생각이었다.

그의 생각을 눈치챈 강 회장이 직접 찾아와 그를 부산까지 데려온 것이었다.

호텔에 들어서자 마카오의 카지노 호텔을 본따서 만든 화려한 로비가 두 사람을 맞이했다.

“아버님, 오셨습니까.”

강 회장이 들어서자 명성 그룹의 부회장이자 강 회장의 둘째 아들인 정수가 달려 나와 인사를 했다.

정수의 인사를 받은 강회장은 뒤에 서 있던 유리를 바라보았다.

강 회장과 눈이 마주치자 유리가 다소곳하게 고개를 숙였다.

“할아버님, 오셨어요.”

“그래, 할아버님은 잘 계시고?”

“네, 잘 계시죠.”

“그래, 좋아 보이는구나.”

“감사합니다.”

강 회장은 유리를 보며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유리의 조부인 최 회장은 재계 3위인 TS 조선의 오너로, 강 회장과는 40년 지기였다.

유리가 재혁과 헤어진 후 현준과 만난다고 했을 때, 마지못해 그 관계를 허락한 이유도 최 회장의 존재 때문이었다.

강 회장은 씁쓸하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주위에 말했다.

“들어가자꾸나.”

강 회장이 도착하자 본격적인 파티가 시작되었다.

파티에는 부산시의 정·재계 유력인사들이 대거 참석했다.

특별한 식순 없이 시시콜콜한 이야기가 오가는 가운데, 화제의 중심은 역시 현준과 유리의 약혼 소식이었다.

“회장님. 좋은 소식 들었습니다. TS 조선과 사돈을 맺으신다고요?”

“시장님, 오셨습니까. 그 소식이 벌써 거기까지 들어갔군요.”

“좋은 소식이니 많은 사람들이 알아야지요. 하하하.”

“감사합니다.”

강 회장과 대화를 나누던 시장은 옆에 앉아 있는 재혁에게 시선을 돌렸다.

“이렇게 듬직하신 손주분이 장가를 가시니 얼마나 좋으십니까. 축하해요. 재혁 군.”

시장의 말에 주위 분위기가 얼음장처럼 차가워졌다.

옆에 앉아 있던 정수가 어색함을 풀기 위해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예비 신랑은 여기 재혁이가 아니라 제 아들내미 강 본부장입니다.”

“제가 말실수를 했군요. 미안해요. 본부장.”

“괜찮습니다. 괘념치 마시죠 시장님.”

“그럼, 결혼은 강본부장이 하는거고, 재혁군은 짝이 있습니까?”

별 뜻 없이 묻는 말일 터. 아니라고 대답하려는데, 강 회장이 재혁의 말을 가로챘다.

“아마 현준이 약혼식 때 볼 수 있을 겝니다. 그렇지?”

금시초문, 갑작스러운 소식에 모두의 시선이 재혁에게 향했다.

특히, 유리는 동요한 듯 눈빛이 흔들리고 있었다.

“뭐. 네. 저 화장실 좀 다녀오겠습니다.”

재혁은 에둘러 대답하고 급하게 자리를 떴다.

평소 사람들 앞에서 입이 무거운 강 회장이었다.

그런 강 회장이 이렇게 행동했다는 것은, 그냥 넘어갈 생각 같은 건 하지도 말라는 뜻이기도 했다.

‘잘못하면 큰일 나겠는데?’

복잡한 생각을 안고 화장실을 나서는데, 복도에서 유리의 목소리가 들렸다.

“설마, 남자를 데려올 생각은 아니겠지?”

재혁은 인상을 구기며 유리를 바라보았다.

“상관할 거 아니잖아?”

“그래. 남자든 여자든 상관없어. 하지만 나랑 했던 약속 절대 잊지 마.”

“약속?”

“나랑 헤어지는 대신, 내가 결혼하기 전까지 아무도 안 만난다고 했던거.”

“난 대답한 적 없는 걸로 아는데?”

“내가 결혼하기 전에 오빠가 누구를 만난다면, 년이든 놈이든 무슨 수를 써서라도 오빠랑 헤어지게 만들 거야 반드시.”

“….”

한참 그녀를 바라보던 재혁이 말했다.

“유리야.”

“왜.”

“현준이나 챙겨. 난 그만 보고.”

“대답해!”

“걱정하지 마, 너랑 상관없이 누굴 만날 생각 없으니까.”

“농담 아니야. 알았어?!”

“간다.”

“….”

재혁은 등 뒤로 느껴지는 유리의 눈빛을 무시하고 파티장 안으로 들어갔다. 재혁이 지나간 복도 뒤, 현준이 심각한 표정으로 몸을 숨기고 있었다.

파티장에 돌아온 재혁은 아무렇지 않게 행동했다.

그에 반해, 유리는 계속 재혁이 신경 쓰이는 지 틈이 날 때 마다 그에게 시선을 돌렸다.

파티가 끝나고 서울로 돌아오는 차 안. 이나에게 문자가 왔다.

[어제 시키신 일 완료했습니다. 책상 위에 두겠습니다.]

재혁은 시간을 확인했다. 벌써 11시가 넘어있었다.

괜한 심술로 과한 일을 시킨 것 아닌가 하는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가 이내 사라졌다.

그는 휴대폰을 내려놓고 차창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빠르게 지나가는 고속도로의 조명 위로 이나의 얼굴이 지나갔다.

“보고 싶네.”

아무도 들리지 않게 혼잣말을 한 재혁은 피곤함에 눈을 감았다.

***

다음 날.

“!!”

출근을 위해 집을 나선 이나는 또다시 재혁과 마주쳐 버렸다.

재혁은 이나를 보고도 아무렇지 않게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이나가 불편한 듯 문가에 서있자 재혁이 심드렁한 말투로 말했다.

“안탑니까?”

“먼저 가세요.”

말과 함께 엘리베이터 문이 닫혔다.

이나가 한숨을 쉬며 문 앞에 서는데, 닫혔던 엘리베이터 문이 다시 열렸다.

“같은 사무실에서 일하는데 언제까지 피할 생각이지? 타.”

두 사람은 서로를 노려보며 서있었다.

이나는 마음을 굳게 먹고 그의 옆으로 다가섰다.

문이 닫히고, 엘리베이터가 아래층을 향해 내려갔다.

1층에서 문이 열리자, 이나가 내렸다.

이나는 뒤돌아보지 않고 입구를 향해 걸어갔다.

등 뒤로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났다.

입구에선 이나가 뒤돌아보았을 때, 아직 완전히 닫히지 않은 문틈 사이로 재혁의 모습이 보였다.

그녀는 아쉬운 마음을 뒤로한 채 돌아섰다.

역으로 향하는 길. 옆으로 재혁의 차가 지나가는 모습이 보였다.

어제는 그렇게 마음이 철렁하더니 막상 실제로 보니 별다른 기분이 들지 않았다.

그의 말대로 언제까지 피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멀어지는 재혁의 차를 바라보며 이나는 생각했다.

찬이의 정체를 아는 것보다, 차라리 오해하는 것이 낫다고.

***

긴장감이 맴도는 사무실, 오늘은 재혁이 공지했던 러시아어 테스트가 있는 날이었다.

“이나 씨! 이것 좀 도와줘!”

“이나 씨! 여기 발음 좀 말해 주라.”

“이나 씨! 이나 씨!”

평소에는 이나를 본체만체하는 사람들도 이나에게 러시아어 책을 들고 찾아왔다.

시험 준비로 모두가 바쁜 와중에, 지영은 전날의 일로 이나에게 복수할 기회만 엿보고 있었다.

그때, 재혁이 시험지를 들고 사무실 안으로 들어왔다.

그의 손에 들린 엄청난 두께의 시험지에 사무실 사람들은 얼굴이 하얗게 질려 버렸다.

재혁은 직원들에게 A4 용지 30장 분량의 시험지를 일일이 나눠 주었다.

“이번 블라디보스톡 호텔 사업에 관한 행정 명령서입니다. 한시간 안에 번역하시길 바랍니다.”

“하… 한 시간이요?”

“지금이 10시 30분이니, 11시 30분까지 하는 걸로 하겠습니다. 그리고 이번 테스트에서 1등 한 사람은 블라디보스톡 출장에 저와 동행합니다.”

“네?!”

재혁의 폭탄 발언에 사무실 사람들은 놀라서 입을 다물지 못했다.

관례상 해외 출장은 과장급 이상만 가게 되어 있었다. 재혁은 그런 회사의 관례를 깨부수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자, 그럼. 시작하시죠.”

재혁의 말이 떨어지자 모두 부리나케 시험지에 고개를 파묻었다.

오직 한사람 이나만 빼고.

그녀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자신의 앞에 놓인 시험지를 물끄러미 바라만 보았다.

블라디보스토크 출장. 계약직인 그녀에게는 능력을 뽐낼 좋은 기회가 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둘이 간다면….’

이나는 건너편에 앉은 지영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지영이 그날의 일을 알고 있는 상황에서 그와 더 가까워지는 것은 곤란했다.

만약 이상한 소문이라도 난다면 블라디보스토크에 둘이 간 것조차 다른 의미로 해석될 것이 뻔했다.

한참 동안 시험지를 내려다보던 이나는 그대로 시험지를 덮어 버렸다.

‘0점이면 뽑힐 일도 없겠지.’

***

직원들이 제출한 답안지를 확인하는 재혁의 눈동자가 빠르게 움직였다.

직원들의 러시아어 실력은 그가 예상한 것보다 훨씬 더 형편없었다.

빨간 비가 내린 답안지가 쌓여 갈수록 재혁의 표정은 일그러졌다.

한참 동안 채점을 하고 있는데, 재혁의 눈길이 한 답안지에 멈췄다.

“….”

너무나 깨끗한 답안지의 위에는 ‘정이나’ 이름 세 글자가 쓰여 있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뒷장을 넘겨 보았지만, 역시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았다.

재혁의 미간이 좁아졌다. 이나는 0점일 수 없는 시험이었다. 이 시험지의 문제는 전날 재혁이 그녀에게 맡겼던 두꺼운 책의 일부였으니까.

그런데 백지라고?

그는 책상에서 전날, 이나가 번역해 둔 서류를 꺼내 백지의 시험지와 비교해 보았다.

이나가 작업한 책에는 전문가 수준의 번역이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재혁의 입에서 실소가 흘러나왔다.

손에 든 빈 시험지가, ‘나와는 블라디보스톡에 갈 생각 마세요.’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해보자는 거지?”

재혁은 0점짜리 시험지를 쓰레기통에 넣고, 번역이 되어 있는 책 겉장에 이나의 이름을 적었다.

“깔끔하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