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 날 가지고 놀았나? (6/72)

6. 날 가지고 놀았나?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질문이었다.

찰나의 짧은 순간, 이나의 고민은 길고 깊었다.

어떻게 대답해야 하는 걸까?

지하 1층에 도착한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렸다.

문이 닫히려 하자 재혁이 열림 버튼을 눌렀다.

문이 열리자 재혁은 팔을 뻗어 1층 버튼을 누른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그는 이나의 침묵에서 대답을 찾은 듯 보였다.

“회사에서 봅시다.”

뒷모습을 바라보는 그 순간, 이나는 알 수 없는 감정의 소용돌이에 휩싸여 버렸다.

***

“정이나 씨?”

점심시간이 다 되어가는 시간, 재혁의 목소리에 이나는 고개를 들었다.

“네. 팀장님.”

그는 무척 화가 난 듯 서류를 책상 위에 툭 내려놓으며 말했다.

“이런 형편없는 번역 실력으로 뭘 어쩌자는 겁니까?”

“많이 틀렸나요?”

“많이 틀린 정도가 아니라 완전히 소설을 썼더군요. 오늘 안으로 전부 새로 해 오세요.”

“네….”

이나는 그가 올려놓은 서류를 바라보았다. 적어도 두꺼운 책 한 권 분량의 양이었다.

“밤을 새워서라도 오늘 안에 끝내세요.”

“네… 알겠습니다.”

전날과 사뭇 달라진 분위기에 사무실 사무실에는 찬바람이 불었다.

“꼴 좋네.”

등 뒤로 들리는 지영의 목소리를 애써 무시한 채, 이나는 재혁이 놓고 간 서류를 다시 확인했다.

그 안에는 전날 번역했던 서류뿐 아니라 다른 서류들도 잔뜩 끼어 있었다.

‘설마… 어제 일 때문에?’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다가 사라졌다.

아무리 화가 났어도 그렇게 유치한 짓을 벌일 사람으로 보이지는 않았으니까.

***

재혁이 준 일은 퇴근 시간이 되어도 끝나지 않았다.

이나는 탕비실에서 커피를 타며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 무슨 일?”

“엄마, 나 오늘 야근. 찬이한테 잘 말해 줘요.”

“그래? 아까부터 엄마 보고 싶다고 난린데.”

전화기 너머로 찬의 목소리가 들렸다.

“엄마! 언제 와?”

“찬아. 엄마 오늘 좀 늦어.”

“찬이는 엄마랑 놀고 싶은데!”

“엄마도 그러고 싶은데 오늘은 안 되겠네. 엄마랑은 내일 재미있게 놀고, 오늘은 할머니랑 놀자.”

“힝! 엄마 미워.”

“미안 찬. 사랑해! 앗, 뜨거워!”

탕비실을 나가던 이나는 마주오던 남직원과 부딪쳤다.

이나의 손에 들고 있던 커피가 이나와 남직원에게 잔뜩 튀었다.

남직원은 이나의 옷을 물들인 커피는 보이지도 않는다는 듯 화를 냈다.

“아씨. 조심 좀 합시다! 상무님 결재 서류인데 큰일 날 뻔했잖아요.”

“죄송합니다.”

그가 툴툴대며 사라진 후, 이나는 주변 상황을 둘러보았다.

바닥이 온통 커피로 난리가 나 있었다.

이나는 다시 탕비실로 들어가 휴지를 풀어 옷에 묻은 커피를 닦은 후, 남은 휴지를 챙겨 밖으로 나갔다.

“어?”

탕비실 앞에는 재혁이 엉망이 된 바닥을 보고 서 있었다.

“정이나 씨가 이랬습니까?”

“네….”

“깨끗하게 치우세요. 바닥에 얼룩지지 않게.”

“알겠습니다.”

재혁이 돌아가자, 상황을 보고 있던 박 과장이 다가와 이나를 도와주었다.

“아무리 그래도 사람 너무하네.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박 과장의 말에 이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괜찮아요. 제가 잘못했는데요.”

바닥을 정리하고 자리에 돌아오니, 책상 위에 초록색 카디건 하나가 놓여 있었다.

누가 잘못 두고 갔나 싶어 주위를 둘러보는데, 옆에 앉아 있던 직원이 이나에게 말했다.

“그거, 팀장님이 놓고 가던데요?”

“….”

***

“정이나 씨, 수고해~”

모두가 퇴근한 시간, 이나는 홀로 남아 재혁이 맡긴 업무를 처리했다.

고요한 사무실에는 이나의 타자 소리가 고독하게 들려 왔다.

그렇게 이나가 일에 집중하고 있을 때, 팀장실 문이 열리더니 재혁이 나왔다.

사무실을 가로질러 온 재혁은 이나를 지나쳐 입구로 향했다.

뒤늦게 재혁이 지나간 것을 알아차린 이나는 다급하게 그를 불렀다.

“팀장님!”

마침 입구를 나가던 재혁이 문가에 멈춰섰다.

“카디건 감사합니다. 빨아서 드릴게요.”

“됐습니다.”

“살펴 가….”

재혁은 이나의 인사를 듣지도 않고 사라져 버렸다.

이나는 씁쓸한 마음으로 자리에 앉았다.

오전에 있었던 일이 못내 그녀의 마음에 남아 있었다.

사무실을 나온 재혁은 이유를 알수 없는 분노를 느끼며 복도를 걸어갔다.

자신이 무엇 때문에 이렇게 화가 났는지 왜 이런 감정 하나 추스르지 못하고 있는지 스스로 이해가 되지 않았다.

재혁의 발걸음이 일 순간 멈췄다.

‘정말 모른다고?’

그는 깨달았다.

분노의 이유를 모르는 것이 아닌, 자존심 때문에 모른 척 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그는 발걸음을 돌려 다시 사무실로 향했다.

“정이나 씨.”

재혁의 부름에 이나가 놀라며 그를 돌아보았다.

“단도직입적으로 물어봅시다. 아들도 있는데, 왜 나랑 잔 겁니까?”

재혁의 말에 이나는 말문이 막혔다.

“그건.”

“날 가지고 논 건가?”

재혁이 이나를 노려보며 한발 가까이 다가왔다.

먹잇감을 노려보는 굶주린 늑대처럼 그의 눈빛은 이나를 옭아매 옴짝달싹할 수 없게 만들었다.

그가 다시 말했다.

“날 가지고 논 거냐고 묻잖아.”

“그런 건 아니에요.”

“그럼 뭐였지? 남편이 있는 여자의 유혹에 넘어가서 한순간에 불륜남이 된 이 상황을 설명해 봐.”

“오해예요. 내가 왜 이런 걸 설명해야 하는지 모르겠지만, 그 사람은 내 남편이 아니구.”

“남편이 아니다? 그럼 아들이 있는 건 어떻게 설명할 거지?”

이나의 침묵에 가까이 다가오던 재혁의 발걸음이 멈췄다.

이나를 노려보며 그의 눈빛에는 겉잡을 수 없는 분노가 섞여 있었다.

재혁은 목 위까지 올라오는 수많은 모진 말들을 삼킨 채 그녀에게 서 돌아섰다.

그의 차가운 태도와 뒷모습이 이나를 서글프게 만들었다.

재혁이 막 문을 나서려는 그때, 이나가 나지막하게 말했다.

“얘기도 안 들을 거면서 왜 왔어요?”

“들을 필요도 없으니까.”

“그래요. 나 유부녀예요. 아들도 있어요. 그래서 뭐 어쩌라는 거죠? 그날 내가 도와 달라고 했나요? 내가 집에 데려다 달라고 했어요? 먼저 다가온 건 팀장님이면서, 왜 나한테 뭐라고 하는 건데요?”

재혁은 이나의 말을 잠잠히 듣더니 대답했다.

“그래서? 유부녀의 유혹에 넘어가서 미안하다고 사과라도 해야 하나?”

“아니요. 무례하게 군 거. 사과하세요.”

“어이가 없군.”

서로에 대한 오해들은 침묵이 되어 두 사람의 마음을 무겁게 짓눌렀다.

침묵을 깨고 재혁이 말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넌 너만 생각하는 이기주의자야.”

그의 말에 이나는 참지 못하고 가방을 집어 들었다. 더는 이 남자와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퇴근하겠습니다.”

이나는 그대로 재혁을 지나쳐 사무실을 빠져나갔다.

복도로 나간 그녀는 곧바로 계단으로 달려 내려갔다.

참아 왔던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재혁은 씁쓸한 마음에 우두커니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마음 한편에 자리 잡은 정체를 알 수 없는 묵직한 통증이 느껴졌다.

그녀는 남편이 있는 여자인데 왜 혼란스러운 걸까? 

누군가와 감정을 주고받는 일은 그에게 너무나 어려운 일이었다.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 누구를 사랑해 본 적도, 사랑할 생각도 해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이 여자는 자꾸 마음을 뒤 흔든다.

어떨 때는 폭풍처럼 무자비하게, 또 어떨 때는 가을 바람처럼 부드럽게 정신을 차릴 수 없게 한다.

그래서 위험하다. 

그녀가 유부녀일지라도 갖고 싶다는 충동이 수시로 가슴을 삐져나오니까.

“젠장.”

그의 입에서 욕지꺼리가 흘러나왔다.

사무실을 나간 재혁은 엘리베이터 앞에 섰다.

그가 사라진 후, 복도의 어둠 속에서 검은 그림자가 나타났다.

지영이었다. 

“대박 사건! 강 팀장이랑 정이나가 그렇고 그런 사이라고? 거기다가 유부녀?!”

***

다음 날 아침, 집을 나서던 재혁은 문고리에 걸려 있는 쇼핑백 하나를 발견했다.

안에는 어제 이나의 책상 위에 두었던 카디건이 들어있었다.

쇼핑백 안에서 미세하게 이나의 섬유유연제 향기가 났다.

그는 굳게 닫힌 이나의 집 문을 바라보았다.

밤사이, 유부녀인 그녀에게 더는 신경을 쓰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그는 쇼핑백을 현관 안쪽에 들여놓고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몇 분 지나지 않아 이나가 문을 열고 나왔다.

이나는 나오자마자 재혁의 집 문고리를 확인했다.

새벽에 걸어 둔 쇼핑백이 사라진 것을 보니 그는 이미 출근을 한 모양이었다.

그가 출근했다는 사실이 다행이면서도 아쉬웠다.

그녀는 복잡한 감정을 뒤로하고 집을 나섰다.

지하철역으로 향하는 길, 골목에서 승용차가 튀어나올 때 마다 재혁의 차일까 마음이 철렁 내려 앉았다.

‘사무실에서는 어떻게 보려고.’

그녀는 걱정을 한아름 끌어안고  출근시간 지하철에 몸을 싣었다.

이나가 회사에 도착했을 때 다행히 재혁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출근 시간이 지나도록 보이지 않는 것을 보니 오늘은 다른 곳에 출장을 간 모양이었다.

오전은 평소처럼 아무 일 없이 흘러갔다. 그러나 그것은 태풍 직전의 고요였다.

사건은 그녀가 화장실에 갔을 때 터졌다.

세면대에서 손을 씻고 있는데, 장지영이 이나의 옆으로 다가왔다.

“잤어?”

밑도 끝도 없는 터무니 없는 말에 이나가 미간을 좁혔다.

“무슨 말씀이시죠?”

“잤냐구. 하긴, 잤으니까 그 난리를 쳤겠지.”

“….”

“나는 말이야. 뒤에서 콩깍지 까는 여자들 정말 싫더라. 앞에서는 조신한 척하다가, 뒤에서는 남자 없으면 못 사는 그런 부류들 있잖아.”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건가 싶어  그녀를 노려보자, 지영이 은밀한 목소리로 말했다.

“애도 있다며?”

그 순간 이나의 동공이 흔들렸다. 지영은 이나의 반응을 보고는 신이 나서 말했다.

“하여간 남자들도 이상해, 유부녀가 뭐가 좋다고. 그러면 이거 불륜 아닌가? 처신 잘해. 안 그러면.”

할 때, 지영의 파우치를 낚아챈 이나가 화장품을 모조리 세면대에 쏟아버렸다.

“야! 미쳤어?”

이나가 차가운 눈빛으로 지영을 노려보며 말했다.

“이상한 소문 돌기만 해. 가만히 안 있을 거니까.”

이나의 기세에 눌린 지영은 감히 대들지 못하고 말문이 막힌 채 서있었다.

이나는 그런 지영을 한번 죽일 듯 노려보고는 화장실을 나갔다.

“허. 어이 없어. 헉! 화장품!”

그녀는 재빠르게 세면대의 물을 끄고 화장품들의 상태를 살폈다.

화장품은 물에 젖어 다시 쓸 수 없는 상태가 되어 있었다.

물에 흠뻑 젖은 파우더를 보며 지영은 분에 못 이겨 이나를 향해 소리질렀다.

“아으으!!! 재수 없어! 저 미친 x. 내가 가만두나 봐!”

때마침 들어 오던 사무실 직원이 지영에게 물었다.

“지영씨 왜그래? 무슨일 있어?”

“완전 어이없어.”

“무슨 일인데?”

“우리팀 계약직 정이나라고 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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